Chapter 153 - 잊혀진 용기사의 긍지 (1)
당혹스러운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중력의 지배자, 차수연.
그녀는 <빌런> 클랜에서 아카데미를 총괄하는 지부장이자, 상부의 일원인 핵심 클랜원이다.
지금까지 아카데미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의 시발점.
그건 모두 차수연의 손에서부터 시작이었다.
아카데미 내부에 괴수가 출현했던 것도, 안도권의 눈먼 도끼에 김채은이 죽을 뻔했던 것도, 김도윤의 습격으로 문가은과 내가 위험했던 것도….
그녀가 직접 기획했거나, 혹은 계획을 인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실력은 최상위.’
지부장이라는 직함에 맞게, 실력 역시 압도적이다.
아카데미 지부 내에선 오래된 경력을 자랑하는 최강자였고, <빌런> 클랜을 통틀더라도 그녀를 따라올 만한 클랜원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마스터나 부마스터 정도?
내 동기로 잠입한 지윤재.
그 또한 같은 A급이지만, 차수연과는 비교하는 게 민망한 수준이었다.
A급 홀더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실력.
그게 차수연의 힘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원래라면 차수연이 등장하는 시점은 내년이다.
아카데미 습격 사건.
본격적으로 <빌런> 클랜이 아카데미를 급습하고, 주요 인물들과 혈투를 벌이게 되는 시점.
차수연은 그때 처음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카데미에선 당시 A급 홀더로 올라선 강주연과 맞대결을 펼친다.
그런데 최근 상황이 달라졌다.
S급 홀더인 유은설이 아카데미에 부임하고, <빌런>의 계획이 족족 무산으로 돌아가면서…
난데없이 차수연도 ‘아카데미 강사’로 취임했다.
지윤재와 함께 아카데미 내부 스파이로 잠입해, 직접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
원작 내용과 확실히 틀어지는 파격적인 행보였고, 이는 내가 <안티 빌런>이라는 써클을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길 왜?’
차수연은 <빌런> 내 지부장급 인사다.
당연히 한국 홀더 협회에서 이를 갈며 찾는 수배범 중 한 명이고, 무수히 많은 가명과 변장을 거쳐 지금에 이르러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활동 영역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고위 인사일수록 전면에 나서는 게 부담이 되니까.
그녀가 난데없이 아카데미 강사로 취임했을 때 놀랐던 이유도,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전면에서 나서는 걸 넘어, 이번엔 아예 우리 앞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습격과 함께 칼에 찔린 김성철.
같이 나타난 지윤재 및 다수의 클랜원.
그리고 공격적인 언사와 포위 상황.
이건 누가 봐도 우릴 습격하는 모양새였다.
“음음- 엄청 당황한 얼굴이네?”
차수연이 날 보고 다시 한번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상황을 파악하려는 내 모습을 비웃는 것 같았다.
“끄, 흡?!”
“김성철 홀더님!”
그리고 습격으로 들어온 칼이 뽑히며, 김성철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옆에 있던 아키바가 그를 다급히 부축했고, 앞선에 있던 우리는 서둘러 그 주변으로 달려갔다.
타다닥-
스릉- 스르릉-
후방 인원들을 감싸듯 원을 만든다.
서둘러 김성철을 치료하고, 그 인원을 보호하기 위한 구도였다.
전방 인원은 모두 각자의 무기를 뽑아 전투태세를 취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고,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들이 ‘적’이라는 것.
적어도 그건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파티원들도 다 인지하고 있었다.
“불의 심판이랑 아카데미, 정말 재밌는 애들이 다 모였어. 그리고… 꽤 반가운 얼굴도 있네?”
손가락을 튕기며 말하던 차수연의 시선이 파티원 중 한 명을 향한다.
나도 힐끗 눈을 돌려 그 주인공을 살펴봤다.
그건, 한쪽에서 김성철을 치료 중인 이수미였다.
그녀는 온 신경을 집중해 치료에 전념 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얼굴만은 두려운 표정으로 덮여 있었다.
‘…뭐지?’
지금껏 이수미와 작전을 하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
그리고 차수연의 의미심장한 말.
아마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연이 있는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연결고리였다.
“안녕, 도재현. 혹시 날 아니?”
차수연의 시선이 다시 날 향한다.
그 목소리가 역겨울 정도로 짜증 났지만, 나는 절대 그걸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의 우리 파티는 위기다.
보스 두 마리를 사냥하며 모든 전력을 쏟아냈고, 그 탓에 온몸이 지치며 마력은 고갈됐다.
당장 <빌런>과 싸우면 상대할 힘이 없다.
예상컨대 분명 전멸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상대를 자극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며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게다가 차수연은 권오준이나 강주연이 아닌,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이건 지금의 내가 확실히 <빌런> 클랜에서 견제를 받는 중이라는 걸 의미했다.
“차…수연.”
간신히 토해내듯 꺼낸 대답.
그에 차수연의 눈동자가 커진다.
“오? 정말 알고 있었니?”
“…그래. 그 옆에 지윤재도 잘 알지.”
차수연의 옆에 번듯이 서 있는 지윤재.
그는 평소처럼, 아무런 표정 없이 날 보고 있었다.
일전에 내게 감정을 들킨 적이 몇 번 있었지만, 평소의 그는 이처럼 무뚝뚝한 성정이었다.
‘그리고 저 녀석은….’
그 뒤엔 익숙한 얼굴이 한 명 더 있었다.
구명훈.
<안티 빌런> 써클 부원으로 들어왔다가, 회의 첫날 회장을 바꾸자고 억지를 부리던 2학년.
그러다가 박진우와 대련 끝에 영혼까지 털렸던, 윤지아의 빠돌이였다.
저 사람이 어찌 된 영문으로 저기에 붙어있는진 모르겠지만, 눈에 초점이 없고 불길한 기운의 검 하나를 겨우 쥐고 있는 게…
얼핏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수가 너무 많아.’
나는 차수연의 말에 대충 어울려 주면서, 빠르게 상대의 전력을 체크했다.
무리의 수는 총 10명.
차수연, 지윤재, 구명훈.
세 명을 포함해, 나머지 7명도 모두 <빌런>의 클랜원인 듯 보인다.
평소라면 충분히 해볼 법한 숫자지만, 지금의 우리 파티는 너무 지쳤다.
10명은커녕, 5명도 상대하기 힘들었다.
“후후. 친구에게 배신당한 기분은 어떠니?”
“친구? 누가. 그 새끼가? 요즘은 개새끼랑 어울려 준 것도 친구로 치나?”
“…….”
“뭐? 푸, 푸후훗.”
내 대답에 차수연이 웃음을 터뜨리고, 무뚝뚝하던 지윤재의 표정은 아주 오랜만에 썩어갔다.
그리고 그의 손이 허리춤의 단검들을 뽑아낸다.
이내 쏜살같이 쏟아지는 네 자루의 단검.
나도 아주 잘 아는 스킬, [쿼터 나이프]였다.
슥- 스사삭-
‘미친… 백병전 선언!’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는 다급히 [무술의 달인] 파생스킬 [백병전 선언]을 사용했다.
그 공격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저 새끼의 단검이 내가 아닌…
안쪽에 있는 강주연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급습까지 예상하고 도발했던 건데, 설마 그 순간에 다른 동료를 노릴 줄은 몰랐다.
툭- 투두둑-
일정 영역에서 원거리 물리공격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사기 스킬.
[백병전 선언]에 지윤재의 단검들이 힘없이 내려앉았다.
그 놀라운 광경에, 차수연이 눈을 살짝 치켜떴다.
“재밌는 스킬을 갖고 있구나? 그건 뭐니?”
“미안하지만 빌런 새끼들한테 알려줄 스킬은 없는데.”
“음음- 눈치챘니?”
“모르면 그게 더 병신이지.”
적당히 대꾸하며, 나는 권오준에게 흘깃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내 시선에 무겁게 눈을 감았다.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몸짓.
그리고 그건, 다른 파티원들의 기색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승산이 보이질 않는다.
절망.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방금 보스 공략을 마친 상태로, <빌런>의 핵심 클랜원들을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후후. 눈알 돌려도 뭐 안 나온단다. 파놓은 함정에 보란 듯이 굴러와 줬는데, 해결책이 있겠니?”
“…….”
차수연의 비아냥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밀수 동굴’은 결국 <빌런> 클랜의 함정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 수입원인 ‘불법 아이템’의 거래현장과 ‘미허가 워프 게이트’를 미끼로 우리를 끌어들였고, 때문에 던전 공략을 막 끝낸 우리는 완전히 위기에 봉착했다.
‘…….’
하지만 아직도 이해는 잘 안 간다.
클랜의 수입원을 미끼로 삼았다는 점, 차수연과 지윤재급 인물들이 직접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작전에 참여했다는 점, 만약 이대로 우리 파티를 전멸시키면 <불의 심판> 클랜과 전면전을 펼쳐야 한다는 점 등….
<빌런> 클랜이 지금 만든 함정은, 결과가 성공으로 끝나더라도 리스크가 너무 높았다.
그렇기에 이들의 등장을 더 예상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넌 너무 거슬렸단다, 도재현. 오늘 네 동료들이 죽는 건, 모두 네 탓이라고 봐도 좋아.”
“개소리 좀 작작해라. 나만 죽일 거면 더 좋은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왜. 내가 죄책감을 가지고 죽으면, 당신 쾌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
“…….”
내내 여유롭던 차수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완전히 정곡을 찔린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웃음을 되찾으며 지윤재에게 말했다.
“음음- 눈치 빠른 애는 재미가 없네. 이제 슬슬 끝내야겠어. 윤재야.”
“예, 지부장님.”
“준비하렴.”
“예.”
그리고 그 말과 함께.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불쾌할 정도로 지독한 살기가 보스 룸 안을 덮쳤다.
지윤재는 소검 두 자루를 꺼내 들며 전투를 준비했고, 구명훈도 거무튀튀한 검을 들고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흡?!”
“끄, 끄으읍…!!”
강렬한 마력이 발현되며 파티를 덮친다.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쥐고 있던 탱커들이 무너졌다.
권오준은 아득바득 서 있었지만, 신유나와 박진우는 버티지 못한 채 무릎을 꿇었고, 나 역시 강렬한 압박에 고통을 느꼈다.
‘중력이다.’
차수연의 주특기, 중력 계열 마법이었다.
그간 텍스트로만 접했었지 실제 위력을 경험한 적이 없었는데, 직접 마주한 그녀의 중력은 어마어마했다.
전 범위로 퍼진 마력의 압박은 온몸을 짓누르듯 조여왔고, 그 강도는 숨통이 막힐 정도로 버티기 힘들었다.
거대한 중력 마법의 지원과…
이어 다가오는 <빌런> 클랜원들.
이대로라면 우리 파티는 전멸이었다.
‘방법이 필요해.’
돌파구가 필요했다.
숨 막히는 고통 속에서,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걸 떠올렸다.
마력룬?
사용할 수 없다.
이미 모든 마력이 고갈됐고, 상대가 발현시간을 기다려줄 리 없었다.
저주나 신성룬?
마찬가지로 어렵다.
당장 신성술을 쓰려면 집중을 해야 하는데, 차수연의 중력마법 때문에 온전한 활용이 버거웠다.
궁극스킬?
아직 [유수활검]을 안 쓰긴 했지만, 이건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해결책이 아니다.
방어 스킬은 돌파구가 될 수 없었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선전포고!’
찾았다.
[위압]의 [선전포고].
이제는 4레벨이 되며 꽤 숙련도까지 더해진, 상태 이상 계열 스킬.
상대들의 정신 수치가 얼마나 높을진 모르지만, 일단은 시도해야 했다.
우우웅-
“…어?”
“힘이….”
순간 거대한 공명이 일어나고, 고통스러워하던 파티원들이 기력을 되찾았다.
먹혔다.
[선전포고]의 ‘공포’가 적들에게 먹혔다.
특히 중력 마법을 활용하던 차수연이 멈칫하며, 파티에 가해지던 마력의 압박도 모두 사라졌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공포의 지속시간은 기껏해야 3초다.
[선전포고]는 단지 시간을 끄는 용도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마력석을…!’
이어진 내 행동은, 마법 가방에서 특수 아이템을 꺼내는 것이었다.
[잊혀진 아룡의 석판].
오래도록 내 가방에 묵혀 있던 전설급 아이템이었다.
분명 지금의 나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 <빌런>을 물리칠 힘이 없다.
마력은 모두 고갈됐고, 쓸 수 있는 룬과 스킬은 한정적이다.
하지만…
새로운 힘을 얻어낸다면.
아직 얻지 못한 힘을 앞당겨 받는다면.
만약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보이지 않던 길이 생겨날지도 몰랐다.
‘플레임 히드라의 마력석.’
두 마리의 보스 괴수.
그중 플레임 히드라의 마력석을 채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단지 야마타노오로치의 마력석이 없을 뿐이었다.
플레임 히드라의 마력석을 캐고 보스 룸을 정리하던 도중 <빌런>을 마주쳤기에, 야마타노오로치의 마력석까지 뽑을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아…!!’
그리고 결과는 럭키.
성공, 대성공이었다.
플레임 히드라는 [잊혀진 아룡의 석판]이 요구하던 ‘한 마리의 아룡’이 맞았다.
휑하니 홈 하나를 비워두던 석판은, 플레임 히드라의 마력석을 채우자 이내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일전에 [룬 사냥꾼]이 갱신되던 때처럼…
눈부신 황금색의 빛이었다.
“음음-?”
“저게…?”
잠시 공포 상태에 걸려 당황하던 <빌런> 측이, 갑작스레 나타난 기현상에 2차로 당황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지윤재가 곧바로 움직였다.
상태 이상에서 풀리자마자,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잊혀진 아룡의 마력석이 채워집니다. 석판이 묘한 힘의 기운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석판 안의 마력석이 모두 채워졌습니다. 봉인이 해금됩니다.]
…
…
[광활한 창공, 드넓은 긍지, 신념의 맹세. 아주 오래전. 인간과 용이 맺었던 맹약이, 시대를 넘어 영웅들이 잠든 땅에 도래합니다. 신비롭고 거룩한 힘이 당신이 머문 모든 자리에 깃들고 있습니다.]
…
…
[새로운 룬 ‘잊혀진 용기사의 긍지’를 획득합니다.]
강렬한 빛이 쏟아진다.
이는 석판과 내 손을 타고 흘러, 이내 내 온몸을 장식했다.
새로운 걸 파악하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짧은 시간.
하지만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해야만 하는 것.
이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
천천히 눈을 뜬다.
다시 마법을 준비 중인 차수연과 내게 달려드는 지윤재.
그 외 각자 무기를 들고 쏟아지는 수많은 적들.
그 어두운 풍경들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악의와 살기.
분노와 집념.
온갖 부정적인 기운이 공간 안을 덮은 그 순간.
검을 든다.
그리고 읊조렸다.
“쇄도하라.”
마침내.
나는 오랜 여정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