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9 - 첫 계약 (2)
뒤에 남은 파티원들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이곳 기장섬에 모인 <빌런> 클랜원들은 얼핏 봐도 40명 이상.
유은설과 도재현이 앞장을 서며 적진을 휘젓고는 있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있다.
막말로 이들 중 절반인 스무 명만 공격을 와도, 연합군 파티 입장에서는 지옥이었다.
김채은은 그런 전황을 바라보며, 살짝 입술을 베어 물었다.
‘너무 위험해.’
뒤편의 파티에 남은 인원은 13명.
그중 앞선을 설 수 있는 전사 계열 및 암살자 계열은 4명.
권오준, 박진우, 신유나, 최동욱.
네 명뿐이었다.
이들은 한 명당 최소 3명의 <빌런> 클랜원들과 상대하며, 후방 인원을 보호하고 있었다.
아무리 버프와 지원을 받으며 싸운다지만…
다대일의 구도에선, 당연히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재현이도….’
문득 김채은의 시야에, 저 멀리 외롭게 싸우는 도재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파티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그리고 파티장 유은설을 돕기 위해, 적진에 홀로 뛰어든 도재현.
김채은은 전투가 시작한 후.
머릿속이 온통 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해,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그가 잘못될까 봐.
적과 싸우면서도, 그런 불안감이 마음 한 편에 자리했다.
‘…바보.’
생각해 보면,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어떤 사건이든 위기 상황이 찾아오면, 늘 앞장을 섰다.
망설이거나 고민하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자기 자신도 위험하고 무서울 텐데, 항상 웃는 얼굴로 남은 이들을 안심시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무리하다고 느껴질 법한 권오준의 부탁에, 군말 없이 준비를 마치고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때론 안전한 역할을 맡더라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을 텐데… 도재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했을 경우, 결국 파티에 돌아올 리스크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채은은 그런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가 짊어진 부담엔, 쉽사리 헤아리기 힘든 짐들이 있었다.
거기엔 분명.
김채은 자신이 준 부담도 있을 것이었다.
‘도움이 돼야 해.’
그런 그의 짐을 덜어줘야 했다.
이대로 가면 모두 위험했다.
후방 인원인 이쪽이 고전하면, 지원을 받아야 할 도재현 쪽은 당연히 더 버거워진다.
이쪽에서도 결국 돌파구를 찾아야만, 전투의 흐름을 긍정적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그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멤버.
그들은 분명 이 파티에 있었다.
“주연아.”
“…응.”
김채은의 부름에, 땀을 흘리며 마법을 시전 중이던 강주연이 답한다.
평소엔 은근히 앙숙 같은 느낌을 풍기는 그녀들이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일 여유는 없었다.
“너도 알지? 저 마법사를 잡아야 해.”
“…….”
김채은의 말에 강주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로부터 조금 떨어진 거리.
<빌런> 클랜원들 중심에서, 홀로 마법을 펼치는 여자 홀더.
차수연, 그녀가 문제였다.
일본에서도 한 번 경험한 적 있었지만, 차수연의 중력 마법은 상당히 까다롭다.
앞선의 움직임을 전반적으로 제어하며 ‘둔화’ 효과를 냈고, 마법사 계열 역시 집중력에 방해를 받아 온전한 공격이 어려웠다.
앞쪽 적진의 중심이 황동연과 황성연이라면, 뒤쪽 적들의 중심은 차수연이었다.
그녀를 어떤 방식으로든 처치해야만, 지금의 막막한 상황을 풀어갈 수 있었다.
“난 준비됐어.”
옆에서 문가은이 그녀들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위를 당겼다.
강하게 쏘아지는 [익스트림 샷].
<빌런> 클랜원 한 명이, 그에 정통으로 다리를 맞으며 무너졌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오우. 할 거면 빨리 하자고. 슬슬 지친다.”
챙- 채쟁-
무기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순간 뒤로 물러선 박진우가 이쪽으로 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말처럼 시간이 많진 않았다.
여전히 <빌런>의 수는 이쪽보다 훨씬 많았고, 부족한 전사 계열을 끌어다 쓰는 건 꽤 큰 리스크였다.
‘더 확실하게 하면 돼.’
하지만 리스크가 있다는 말은 즉, 그만큼 분위기를 가져올 효과적인 전략을 펼칠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강주연, 문가은, 박진우, 그리고 김채은.
중상급 던전인 ‘아카데미 지하 던전’을 공략할 때 함께 했던 정예 파티.
도재현을 제외하면,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합이 잘 맞는 파티.
그 멤버가 모두 모였음을 확인한 김채은은, 굳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짧은 언령으로, 작전의 신호탄을 알렸다.
“냉기를 삼켜라.”
주변이 냉기로 가득해진다.
김채은이 일전에 획득했던 룬, [얼어붙은 전장].
그 궁극스킬인 [블리자드].
스승인 정선영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스킬이, 이곳 기장섬 한가운데에 펼쳐진다.
[블리자드]는 단일 대상에 대한 공격스킬이다.
닿을 수만 있다면, 대상의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강력한 얼음 계열 마력 공격.
아직 김채은의 숙련도가 너무 낮아 미숙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는 스킬인 건 확실했다.
그 타깃은…
당연히 처음부터 논의했던 적의 핵심 홀더.
차수연이었다.
스스스스-!
쩌저적-!!
“지부장님…!!”
하지만, 차수연의 지척까지 냉기가 닿으려던 찰나.
적 클랜원 중 한 명이 재빨리 다가와, [블리자드]를 직접 몸으로 막아냈다.
그 움직임은 굉장히 빨라서, 특정 룬의 효과나 스킬을 사용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걸 보고 김채은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만약 먹혀들었다면 완전히 구도가 바뀌었을 텐데, 역시 적들도 바보는 아닌 터라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괜찮아.’
그래도 실망하진 않았다.
자신의 궁극스킬이 그대로 먹혀들지 않을 거라는 건,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위기를 감지한 적들이 움직이면서, 이전의 구도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박진우! 그대로 뛰어!!”
문가은이 크게 소리치며, 광역스킬 [트리플 파워샷]을 적들에게 날린다.
그녀의 주력룬은 [윈드 아쳐].
바람 속성이 가미된 활 계열 무기룬으로, 풍향이나 풍속에 따라 공격의 위력이 달라진다는 독특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지금의 풍향은 북서.
정확히, 이쪽에서 <빌런> 쪽으로 부는 방향이었다.
“오우…!!”
그와 동시에, 박진우가 앞을 향해 폭발적으로 달려간다.
박진우는 속력을 중점적으로 성장시킨 쾌검 성향의 전사 계열.
지금의 그를 상징하는 주력룬 역시, [쫓을 수 없는 쾌검]이다.
비록 도재현처럼 돌격류 룬을 보유하진 않았지만, 이런 짧은 거리와 난전에선 충분히 효과를 보이는 능력을 지녔다.
때문에 문가은의 지원을 받으며 날개를 단 그의 진입은… 적들을 당황케 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챙- 채쟁-!!
카가강-!!
“씨발! 막아!!”
“뭐가 이렇게 빨라… 힘을 숨겨뒀던 건가?”
“어이! 너희까지 가면 균형이 무너지잖아!”
파상공세로 몰아치던 <빌런> 측에 균열이 일어났다.
김채은의 궁극스킬 [블리자드]와 박진우의 쾌속 진입, 그리고 문가은의 화력 지원.
수비적인 태세에서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한 파티.
뭔가 각성이라도 한 듯 몰아붙이는 기세에, 한껏 눌린 듯한 움직임이었다.
“자기가 맡은 녀석들을 절대 보내지 마! 아득바득 붙잡아!”
덕분에 힘겹게 싸우던 <불의 심판> 사냥 5팀과 남은 파티원들도, 흐름을 알아채고 더 힘을 보탰다.
권오준의 외침에 모두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떻게든 박진우를 차수연에게 닿게 해야 했다.
그리고 그에 응답이라도 하듯.
박진우는 더욱 거침없이 안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쫓아라!”
순간 가로막는 세 명의 <빌런> 클랜원.
그들의 앞에서 박진우는 아껴뒀던 궁극스킬을 사용했다.
[비월참].
본래는 단일 대상을 총 17번 베어내는 스킬이지만…
지금처럼 다수가 한곳에 집중돼 있을 땐, 마치 그 다수를 한 대상으로 묶듯 공격을 이어갈 수 있었다.
“끄, 끄아악-!!”
“내구를 무시한다! 조심해!”
<빌런> 측 클랜원들은 어떻게든 그를 막아서려 했지만, 대비되지 않은 방어는 모래성일 뿐.
그들은 박진우의 검에 꽤 쉽사리 무너졌다.
김채은은 [블리자드]를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스킬이 논타겟이라 적중 자체가 어렵다.
반면 박진우는 이미 예전에 궁극스킬을 익혔고, 김채은과 달리 오랫동안 [비월참]을 다루며 연구해왔다.
도재현에게 온종일 깨져 가며 겨우 완성한 궁극스킬이다.
그런 공격을, 무작정 몸을 던진다고 해서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음음- 정말 쓸모없는 새끼들이네. 역전하라.”
상황이 여기까지 흐르자, 적에게서도 결국 대응책이 나왔다.
짜증이 잔뜩 섞인 차수연의 목소리.
궁극스킬인 [리버스 그래비티]를 펼치는 언령이었다.
[리버스 그래비티]는 그동안 대상들에게 가해지던 중력을, 순식간에 역전시켜 힘을 뒤바꾸는 스킬이다.
그녀의 중력 마법이 일종의 ‘인력’으로 잡아당기는 힘이었다면, 이 궁극스킬은 ‘척력’으로 밀어내는 힘이라고 해야 할까.
때문에 한창 중력 마법의 압박으로 고통받던 홀더들은, 이 스킬이 펼쳐짐과 동시에 곧바로 하늘로 떠올랐다.
권오준이나 최동욱 등 앞에서 버티던 홀더들도.
마력 공격을 준비하던 마법사 계열 홀더들도.
심지어는 차수연을 향해 달려들던, 박진우조차도.
모조리 [리버스 그래비티]의 영향으로 하늘에 떠버렸다.
차수연의 주특기.
상태 이상의 극한을 보여주는 궁극스킬이었다.
“…아?”
“오…우. 닿았다, 씨발년.”
그러나.
차수연이 놓친 게 하나 있었다.
박진우는…
아니, 이 짧은 작전을 계획한 김채은은.
처음부터 차수연을 박진우로 잡을 생각이 없었다는 것.
단지 상처하나.
혹은 내구를 깎은 ‘지점’ 하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리버스 그래비티]로 떠오르기 직전.
박진우의 검은, 아슬아슬하게 차수연의 어깨를 살짝 베어냈다.
그리고, 그걸로 박진우의 역할은 끝이었다.
“음음- 죽고 싶다고 발악을 하는구나. 넌 특별히 도재현, 그 새끼랑 같이…”
화, 화르륵-!!
불쾌하다는 듯 떠오른 박진우를 끝장내려던 차수연은, 순간 느껴지는 마력에 깜짝 놀라 [마력 방어막]을 펼쳤다.
뜨거운 마력의 기운.
강렬한 화마가, 차수연의 어깨 쪽으로 쉴 새 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타올라라!”
특정 조건을 모두 만족한 궁극스킬.
강주연의 [인페르노]가, 차수연의 어깨에서부터 거침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걸 태워 흔적까지 없애버릴 듯한 불길.
강주연의 불은, 한 번 잡은 타깃을 절대 놓지 않았다.
“끄, 끼아아악-!!”
또 한 번.
일본에서 들었던 차수연의 끔찍한 비명이, 기장섬에 울려 퍼졌다.
이번엔 정말 물러설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의 벽이었다.
* * *
됐다.
강주연의 한 방이, 제대로 먹혔다.
김채은은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기뻐했다.
역시 아카데미 최고의 유망주 홀더.
평소 행실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녀의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악으로 치닫던 상황 속에 그녀는 유일하게 믿을 만한 홀더였고, 그 능력을 여실히 증명했다.
덕분에 적들의 핵심 홀더였던 차수연은 완전히 리타이어됐고, <빌런> 측은 혼란에 빠졌다.
아직도 수가 너무 많긴 하지만, 이런 기세라면 충분히 막을 만해 보였다.
‘재현이는….’
짧은 작전이 성공으로 끝나고, 뒤쪽의 상황이 안정적으로 흐르자 김채은은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도재현을 도와줄 여유가 생겼다.
외롭게 싸우고 있을 그에게 힘을 보탤 시간이었다.
그런데….
“…에?”
고개를 돌린 김채은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뭔가.
뭔가가 엄청 많다.
엄청난 수의 홀더로 가득했던 적들 쪽엔…
이번엔 엄청난 수의 괴수가 가득했다.
그렇다.
괴수.
저들은 분명 괴수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홀더들의 혈투가 이어지던 이곳 기장섬에… 웬 괴수들이 무수히 나타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주인공들은 언데드.
스켈레톤, 듀라한, 밴시, 레이스 등.
얼핏 봐도 저주 계열로 보이는 온갖 괴수들이, 끔찍한 모습을 과시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제 막 안정권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
하지만.
정작 김채은의 눈을 비비게 만든 건, 그러한 괴수들의 행렬이 아니었다.
그 괴수들 한가운데에, 마치 대장이라도 되는 듯.
거대하고 육중한 크기를 자랑하는 엄청난 괴수.
온몸이 모두 뼈로 구성된 거대용.
그 저주받은 용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왜 거기 있는 거야, 재현아…?”
정확히는 그 거대용 위에 올라탄 홀더.
그리고 뭔가 비장하게 지시를 내리는 것 같은…
아주 익숙한 생김새의 홀더.
자신의 친구, 도재현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