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6 - 평화로운 일상 (2)
잔뜩 격양된 듯한 얼굴의 김채은.
그녀는 뭔가 말할 듯 말 듯 입을 오물거리더니, 문득 탁자를 탁- 치며 외쳤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어? 나가게? 어디 가려고.”
뭐야.
지금 밖에 나간다고?
갑자기?
띡-
띠리릭-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외투와 짐을 챙기더니, 바람처럼 문을 열고 집 밖을 나서 버렸다.
덕분에 모처럼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던 나는…
조용한 부엌 가운데에서.
홀로 덩그러니 서 있어야만 했다.
“…금방 오겠지?”
설마 이렇게 버려두고 간 건 아니겠지…?
잠깐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금방 오겠지?
김채은을 믿지만, 홀로 쓸쓸히 주방에 남아있자 나도 모르게 불안감이 차오른다.
“쩝.”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냉장고 안의 재료들을 꺼냈다.
어쨌든 남은 사람은 또 꿋꿋이 요리해야지.
탁- 탁-
식탁에 요리 재료들이 하나둘 놓인다.
나는 머릿속으로 요리할 것들의 과정을 미리 계산해 놨다.
“고기는… 잠깐이라도 재워 놓고.”
고기는 잠깐이라도 숙성시킨다.
하루 전부터 미리 냉장실에 넣어 놔 해동은 끝이 났지만, 특별히 마리네이드(*식재료를 재워두는 조미액) 숙성 과정을 거치진 못했다.
3시간 정도 재워두면 좋은데, 딱히 식사 시간을 정하질 못했으니….
그래도 지금 조리하기 전.
20분 정도라도 재워두면 더 먹기 좋았다.
“음음~ 건면은 불려 놓고.”
커다란 냄비에 소금물을 끓이고, 파스타에 사용할 건면을 펼쳐서 넣는다.
면은 의외로 금방 익기 때문에, 넣자마자 곧바로 다음 재료를 준비하는 게 좋았다.
치이익-
프라이팬에 가볍게 기름을 두르고, 준비해둔 양송이버섯과 양파, 그리고 베이컨을 넣는다.
여기까진 아주 기초적인 요리 과정.
이제부턴 ‘룬’의 힘이 추가로 들어간다.
‘스태미나 푸드.’
어느덧 7레벨까지 오른 [요리] 룬.
그 파생스킬인 [스태미나 푸드]를 사용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스킬이지만, 홀더의 마력과 체력을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일종의 버프 스킬.
신성 계열의 스킬 중 [레스트]와 비슷했다.
“그리고 고기는 이쪽에서….”
나는 프라이팬과 냄비를 더 꺼내 조리공간에 놓았다.
한쪽엔 파스타 소스 준비, 한쪽엔 파스타 면 준비.
다른 한쪽은 또 스테이크를 구울 준비.
많은 냄비와 프라이팬이 동시에 사용되지만, 집이 워낙 크고 주방 공간도 널따란 탓에 진행에 전혀 차질이 없었다.
“…진짜 넓긴 하다.”
새삼 우리 집 크기에 감탄하게 된다.
사실 이곳 세계에 떨어졌을 땐, 이를 체감할 겨를이 없었다.
빙의하자마자 곧장 룬 홀더가 되고, 아카데미에 진학하고, 원작의 주요 인물들과 얽히게 되고….
또 ‘아카데미 지하 던전’을 공략하면서 내적으로 큰 성취를 이뤘었고, 본격적인 홀더들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되기도 했다.
홀더들의 세계.
던전 공략 한 번에 큰돈을 만질 수도 있고, 성장을 위해서라면 거액의 투자를 아끼지 않는 곳.
이곳에 익숙해지다 보니, 우리 집이 얼마나 잘 사는지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었다.
“스무 살 자취 집치곤 너무 넓잖아.”
요리하다 문득 거실 쪽을 둘러본다.
방 2개 있는 24평 집.
아니, 24평보단 확실히 조금 더 평수가 많은 것 같다.
월세를 내본 적이 없으니, 아마도 전세.
동작구의 전세가가 최소 6억부터 시작하는 걸 고려하면.
이 집을 상경할 때부터 알아봐 준 우리 부모님은…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걸 방증했다.
문득 이번 작전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와 나눴던 전화 통화가 생각났다.
“엄마는 갖고 싶은 거 없으세요?”
-갑자기 웬 존댓말이니?
“네? 아, 하하… 저도 이제 성인이니까요. 습관 좀 들이려고요.”
-듣기는 좋네. 네 아부지가 좋아하겠다.
“그보다 갖고 싶은 거 없으세요? 엄마, 아빠 선물 하나씩 해드리고 싶은데.”
-아이고, 됐다. 갖고 싶은 건 무슨… 가진 거나 잘 보존했으면 좋겠다. 요즘 쌀값이 폭락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쌀값이 그렇게 많이 떨어졌어요?”
-응. 작년보다 20%나 폭락했어. 우리도 이번 순 매출만 거의 4억이 감소했지 뭐니.
“……네?”
거기까지 들었을 땐.
더 생각하는 걸 멈췄다.
부모님은 단순히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분들이 아니셨다.
시골에서 농사를 아주 크게…
거의 중소기업 수준으로 진행하는 분들이셨다.
하나뿐인 외동아들을 서울에 홀로 덩그러니 보내신 데엔, 모두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농사 부자 부모님 덕분에 오늘 같은 날.
나는 편안하고 아늑한 집에서, 유유히 요리를 즐길 수 있었다.
“종강하면 한 번 찾아봬야겠다.”
저번 학기엔 <불의 심판> 인턴을 한답시고 코빼기도 얼굴을 비추지 못했었다.
워낙 시니컬하신 분들이라 내색은 안 하지만, 은근히 섭섭해하셨을지도 모른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꼭 한 번 시골에 내려가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띡- 띡-
띠디딕-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요리를 마무리하자, 나가 있던 김채은이 돌아왔다.
“재-현아!”
“왔어?”
마침 요리도 끝나가던 찰나였다.
파스타에 들어갈 크림치즈 소스도 조리가 끝나가고, 이제 재워둔 고기를 굽기만 하면 된다.
이리저리 펼쳐둔 조리기구로부터 잠시 손을 떼, 뒤를 돌아봤다.
돌아온 김채은의 손엔…
뭔가를 잔뜩 담은 비닐봉지가 가득했다.
“푸딩 사 왔어! 포도 맛으로.”
“그걸 그렇게 많이…?”
“헤헤. 근처 마트에 안 팔아서, 워프 게이트 타고 강남 가서 사 왔어.”
“와….”
귀를 의심할 만한 이야기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 열정이다.
오랜만에 먹는 내 요리가 그렇게 감동이었나?
이유야 뭐가 됐든, 김채은은 내 요리에 대한 보답으로 푸딩을 사러 나갔다 온 모양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겠지만…
내게 있어선 아주 바람직한 보답이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얼른 앉아. 요리 다 됐어.”
“응!”
밤 11시.
저녁치고는 너무 늦은 시각이지만…
지독했던 <빌런>과의 혈투가 끝난 후.
정말 오랜만에 맞이하는, 평화로운 식사였다.
* * *
다음 날 아침.
아카데미는 여전히 임시 휴강 중이지만, 나는 아침 일찍 아카데미로 나섰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난 이번 작전 및 사건에 연루된 중요 인물이기 때문이다.
협회와 협조해 조사받아야 할 내용도 많았고, 김명현 교수가 기록 중인 총괄 보고서에도 도움을 줘야 했다.
한마디로 할 일이 많았다.
아카데미 안으로 가는 길엔, 다른 학생들이 속닥이는 내 얘기도 종종 들렸다.
“진짜 1학년이 다 때려잡았다고?”
“아, 그렇다니까. 이 새끼 뉴스도 안 보나 보네.”
“봤어, 나도. 근데 내가 볼 땐 불의 심판이랑 용광검로 얘기밖에 안 나왔었는데.”
한 학생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핀잔을 주던 학생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노노. 걔네는 숟가락만 얹은 거야. 너 진짜 도재현 몰라? 요즘 아카데미에서 도재현 모르면 간첩인데. 왜, 저번에 한창 학생회관 대자보에도 올라왔었잖아. 이달의 학생, 뭐 그런 걸로.”
“아니, 그딴 걸 누가 챙겨 봐.”
“아무튼 걔가 이번 작전 혼자 캐리했대. 소문엔 S급 홀더라는 이야기도 있더라.”
“뭐? S급 홀더?!”
‘S급 홀더 아닙니다….’
날조가 가득한 쑥덕거림에, 정정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팩트는 능력치 증폭 효과 룬 및 스킬을 풀도핑해야 겨우 A급에 다다르는데, S급 홀더라니….
하여간 이 동네는 뭐만 했다 하면 과장이 패시브다.
‘그래도 다들 난리네.’
작전이 완료된 지 벌써 이틀이 지났지만, 주변은 여전히 <빌런>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동안 온갖 범죄란 범죄는 다 저지르고 다니며, 철저하게 모습은 숨겼던 이들.
홀더 계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건들며 시민들을 골치 아프게 했던 조직.
이들을 완전히 소탕했다는 소식에…
다들 놀라면서도 꽤 들뜬 모양이었다.
그리고 잔뜩 들뜬 건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도재현 홀더어!! 왜 이제야 아카데미에 나온 겁니까!”
아침 일찍 아카데미에 오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
탁원호 교수의 교수실.
돌아왔음을 간략하게 보고하고 습격작전 당시 많이 다치셨던 스승님의 안부도 물을 겸 찾아왔는데…
정작 날 반긴 건 특수 계열의 강동욱 교수였다.
강동욱 교수는 감동이 어린 얼굴로 문 앞으로 달려와 내 손을 잡았다.
“정말 한참을 찾았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제게 조련 계약에 관해 묻더니, 어떻게 하루도 안 돼서 그런 강력한 괴수와 계약한 겁니까? 대체 그 괴수의 등급은 얼마나 되는 겁니까아!!”
거의 랩을 하듯 내게 질문을 토해내는 강동욱 교수.
나는 그대로 굳은 채, 잠시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교수실 가운데엔 여전히 부상 치료 중인 탁원호 교수가 보였다.
그의 팔과 어깨, 가슴팍엔 수없이 많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한다.
그러자 탁원호 교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마치…
이렇게 된 강동욱 교수는, 누구도 못 말린다고 말하는 듯한 고갯짓이었다.
“대답해 주십시오, 도재현 홀더어!!”
광기가 어린 듯한 그의 울부짖음.
정말.
정말 연구에 미친 사람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구나.
나는 골이 아픈 머리를 붙잡으며, 그에게 말했다.
“하나씩… 하나씩 답변해드릴게요. 천천히 물어보세요.”
그야말로 평화로운 아카데미의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