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7 - 평화로운 일상 (3)
탁원호 교수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나는 강동욱 교수와 대화 자리를 가졌다.
그가 내게 궁금한 게 많은 것처럼, 나 또한 그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우선, 도재현 홀더와 계약한 그 괴수 말입니다. 분명 빌런 마스터 황동연의 계약 괴수 아니었습니까?”
차를 꺼내오고,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는 강동욱 교수.
나는 그의 말에 가볍게 답했다.
“본드 말씀하시는 거죠?”
“본…드요?”
“아, 제 계약 괴수 이름이에요. 온몸이 뼈로 이루어진 본 드래곤이라, 줄여서 본드.”
“…….”
그 말에 순간 강동욱 교수가 멈칫했다.
자기가 방금 뭘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확실히 이름을 잘못 짓긴 했구나.
강 교수님까지 이러는 걸 보면.
나는 지난날의 실수에 반성하며 말을 이었다.
“흠흠. 어쨌든 본드는 황동연의 계약 괴수가 맞아요. 전투 당시에 순간적으로 계약이 파기되고, 저와 계약을 맺었죠.”
“…그게 정말 사실입니까?”
“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아니요. 문제라기보단 혁신이죠! 지금까지 조련 계열의 역사에서, 타인의 계약 괴수를 탈취했던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도재현 홀더가 최초예요.”
강동욱 교수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또 최초다.
홀더가 되고 난 후, 최초 타이틀을 참 많이도 얻는 것 같았다.
운이 좋은 건지, 이쯤이면 내 실력인 건지.
어쨌든 강동욱 교수는 서둘러 가방에서 필기구들을 꺼내더니, 나와 했던 대화를 요약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열정이 진짜 대단하구나.’
이미 몇 번이나 뵌 분이지만, 강동욱 교수는 아카데미 교수 중에서도 유독 학구열과 연구 욕심이 넘치는 교수였다.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괴수의 조련은 상황적인 요건이 모두 맞아야만 시도할 수 있습니다.”
“네, 기억해요. 마력 고갈과 쇠약 상태였죠, 아마?”
“정확합니다.”
강동욱 교수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빌런> 소탕 작전의 투입 직전.
호텔 카페에서 짧게 이뤄졌던 강동욱 교수의 강의.
그는 당시 괴수를 조련하기 위해선, 두 가지의 요건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력 고갈’과 ‘쇠약’.
전자는 말 그대로 괴수의 마력이 전부 바닥나 있는 상태를 말하고, 후자는 전투가 오래 진행됐을 때 드물게 발생하는 상태 이상이다.
한마디로 말해.
괴수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여 싸운 다음, 앞서 말한 상태 이상 두 개가 발생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후 [조련 계약] 룬의 파생스킬인 [계약의 손길]을 사용하면, 괴수와의 계약은 성공적으로 이어진다.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지만…
이 조건을 모두 지켰을 때 계약 성공 확률은 100%.
지금껏 어떤 조련 계열 홀더도, 이 틀 안에서 실패를 경험한 이는 없었다.
“그런데 도재현 홀더가 그 틀을 깬 겁니다. 심지어 상대의 괴수를 빼앗아오는 방식으로.”
강동욱 교수가 정말 신기하다는 듯 날 바라봤다.
…사실 그건 나도 신기하다.
당시엔 그저 본 드래곤을 처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가갔었는데, 어느새 내 계약 괴수가 돼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여기엔 나름의 근거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룬 특수효과.’
[용언이 맺은 약속]은 용의 전설과 관련이 있는 이들 혹은 용의 특성 중 일부를 띠는 계약 대상에 한해, 계약의 성공 확률이 급격히 상승한다.
본 드래곤인 본드는 당연히 이 조건에 해당.
갑작스러웠던 계약에도, 무리 없이 곧장 진행되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황동연도 본드를 제대로 못 다뤘다는 거지.’
나는 어제 잠깐 확인했던 황동연의 주력룬.
[죽음의 군단장]의 룬 정보를 떠올렸다.
<룬 정보>
◎이름: 죽음의 군단장
◎등급: 에픽(Epic)
◎레벨: Max
◎새겨진 부위: 뒷목
◎특수효과
: 다수를 지휘할 때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한다. 최소 셋 이상의 대상을 지휘할 때만 적용된다.
: 계약할 수 있는 ‘사령’의 대상에 제한이 없어진다. 계약을 마친 사령이라면, 통솔 수치와 상관없이 모두 다룰 수 있다. 대신 계약자와 공유 중인 마력이 모두 고갈되면, 사령의 소환은 해제될 수 있다. 이 효과와 궁극스킬 ‘데스 리바이벌’은 ‘사령 계약’과 관련된 룬을 보유하고 있을 때만 적용된다.
◎궁극스킬
[데스 리바이벌]
-언령: 일어나라
-대기시간: 30일
-미리 ‘제작’해놓은 사령들과 동시에 계약을 마치며, 단번에 일으킬 수 있다. 단, 계약 당시의 사령들은 24시간 동안 ‘불안정한 계약 관계’에 놓이게 된다. 24시간이 지나면, 다시 계약자들과의 정식 계약이 가능하다.
…
…
[죽음의 군단장].
작전이 있던 날, 황동연이 그토록 많은 언데드를 부릴 수 있었던 이유가 이 룬에 있었다.
아무리 통솔 수치가 높아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언데드를 부리는지 궁금했는데, 제한이 사라진다는 이 사기적인 효과 때문이었다.
또한, 내가 본드와 계약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룬에 있었다.
[데스 리바이벌].
제작 괴수를 언데드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는 독특하고 강력한 메리트가 있지만, 그로 인해 이어진 계약이 온전하지 않다는 리스크도 있었다.
‘…그렇다고 괴수를 뺏어갈 미친놈이 있을 줄은 몰랐겠지만.’
이건 아마 황동연도 예측하지 못했던 부분일 거다.
“그럼 도재현 홀더의 룬은 조련 계약이 아닌 겁니까?”
“어… 엄밀히 말하면 그렇죠. 어쨌든 본드는 언데드고, 사령에 해당하니까요. 물론, 형태는 괴수겠지만요.”
“그렇군요.”
[용언이 맺은 약속]은 엄밀히 말해 [조련 계약]과 다르다.
[조련 계약]이 짐승이나 곤충, 특이 형태의 괴수 등의 계약에 한정된 반면, [용언이 맺은 약속]은 마력석에 의해 지성을 잃은 ‘존재’라면 누구나 계약할 수 있다.
아마 정령도 되고, 본드와 계약했듯 사령도 될 거다.
예상컨대 계약과 관련된 룬 계열에서 최상위 포지션을 맡는 룬.
룬의 등급이, 전설인 게 단번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럼 도재현 홀더의 그 본드…는 정확히 등급이 어느 정도일까요. 당시 신체 능력을 봤을 땐 국내 최고 수준이 확실합니다만.”
강동욱 교수의 그 질문엔 나도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확실히 모르겠어요. 아마 A급 괴수는 확실히 넘는 것 같고, S급까지는 판가름이 안 되네요. 아시다시피 S급이 평범한 등급이 아니라서.”
“혹시 본드는 지금 서울에 있습니까?”
“네. 홉고블린 부락이라는, 제 개인 소유 던전에 거주 중이에요.”
“…도재현 홀더, 던전도 가지고 있었나요?”
“네? 아, 하하… 예, 뭐.”
이제는 질린다는 듯한 강동욱 교수의 표정에,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다들 던전 하나쯤은 갖고 있잖아요?
라는 농담을 던지려다가…
겨우 참았다.
그랬다간 진짜 분위기 이상해질 것 같아서.
참고로 본드의 던전 거주에 대해선 어제.
한국 홀더 협회의 확답을 받았었다.
[이지혜] 협회 상부에서 허가 떨어졌습니다! 본부장님께서 도재현 홀더님 부탁은 뭐든 다 들어주라고 하시네요, 헤헤. 오늘부로 던전 입장 경고문에도 해당 내용 통지해 놨으니까, 편하게 두시면 될 것 같아요.
협회는 내게 아주 호의적이었다.
그제부터 자질구레한 몇 가지 일들을 부탁했는데, 모조리 하루도 안 돼 처리됐다.
‘…이해는 가네.’
그도 그럴 게, <빌런> 클랜은 그간 홀더 협회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홀더는 물론, 일반인에게까지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던 지독한 단체.
그들을 한 번에 소탕할 기회는 절대 쉽게 오지 않았다.
이번 사건이 아카데미가 사활을 건 작전이긴 했지만, 협회에서도 나름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 해결의 중심에 있던 나는 협회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됐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협회장이, 자꾸 밥 한 끼 먹자고 연락이 올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그럼 언제 한 번 제가 그 던전으로 찾아봬도 될까요? 너무 귀중한 연구 대상이라서요.”
“당연하죠. 계약 관련해선 제 스승님이신데. 그리고 저도 본드를 더 잘 다루려면, 강동욱 교수님의 연구가 필요하니까요. 편하게 연락 주세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그 말을 끝으로, 강동욱 교수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볍게 나와 탁원호 교수에게 마무리 인사를 건넨 그는, 이내 문을 열고 교수실을 나섰다.
끼익- 턱.
“와….”
나는 소파에 철퍼덕- 하고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뭐랄까.
기가 다 빨린 기분이다.
분명 건설적이고 좋은 방향의 대화였는데, 동시에 힘들기도 하다.
연구에 관한 강동욱 교수의 열정.
이걸 따라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생했다.”
그에 교수실 한편에 앉아있던 탁원호 교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나도 허탈하게 웃으며 답했다.
“스승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이걸 다 듣고 계셨다니….”
“고생이랄 게 있나. 앉아서 듣기만 했는데. 그보다…”
탁원호 교수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에 들려있던 종이 한 장.
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나는, 곧바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게 뭡니까?”
“읽어봐라.”
한 장 내에 적혀 있는, 간략한 계획안.
거기엔…
<학생 클랜 창설 계획안>
이라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나는 눈이 휘둥그레 해져 탁원호 교수를 봤다.
“스승님, 이게…?”
탁원호 교수는 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카데미는 이번 작전으로, 도재현. 네게 큰 빚을 진 것이나 다름없다. 네게 어떤 보상을 해야 할지, 어떤 대우를 해줘야 할지 운영 재단 내에서도 오랫동안 회의를 했었다.”
그는 탁자를 톡톡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 최초로 계획된 학생 클랜 창설은, 그러한 보상 방안 중 첫 번째 안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확립된 사안은 아니고, 어떨까 정도에서만 착안된 계획이다. 한번 읽어 보고 감상을 말해다오. 당사자인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보상도 많이 준비돼 있으니.”
또 한 번 최초라는 타이틀이 걸린 보상 방안.
하지만 이번엔 그 의미가 남달랐다.
만약 성사된다면…
학생들이 주도하고, 학생들이 창설하게 될 클랜.
그 클랜의 전폭적인 지원을, 내게 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