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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사기 룬을 얻었다 (178)화 (178/353)

Chapter 178 - 평화로운 일상 (4)

탁원호 교수의 말대로였다.

계획서는 기초적인 창설 방안에 대해서만 적혀 있고, 구체적인 시기와 규모, 지원 방향 등은 추후 논의로 서술되어 있었다.

어쨌든 당사자는 나기 때문에, 나와의 협의로 구성된다는 거겠지.

그래도 꼼꼼하게 계획서를 읽던 나는 탁원호 교수에게 물었다.

“학생 클랜이면, 아카데미 내부에서 창설되는 클랜인 건가요?”

“그건 아니다. 가칭만 학생 클랜일 뿐, 아카데미는 대외 협약 때문에 사익을 추구하는 클랜을 창설할 수 없어. 다만, 이건 탁씨 가문과 재단에서 네게 장학금 형식으로 제공하는 지원인 거지.”

그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스승님 앞에서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그래도 재단의 압력이 들어오지 않을까요? 그 정도로 큰 규모로 진행되는 지원이면, 간섭하지 않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은데.”

재단에서 이리저리 간섭하는 꼭두각시 클랜.

그런 클랜이라면 사실 받아들이는 게 더 독이 되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탁원호 교수는 단호한 얼굴로 그에 답했다.

“전혀. 이 지원사업의 담당자로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보증하마. 운영진도 다 네가 뽑는 인선에서 이뤄질 거야. 애초에 홀더 협회에서 공증하고 감독하는 사업이라, 그건 조금의 가능성도 없는 일이다.”

“…협회에서요?”

“그래. 협회장이 이 방안에 대해서 아주 적극적으로 찬성하더군. 국민 영웅이 만드는 클랜이라면 무조건 지원이라 했던가.”

…국민 영웅이라니.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냐고.

주변 인물들의 과한 치켜세움이 부담스럽긴 해도, 어쨌든 성과를 인정받는 기분은 나쁘진 않았다.

전에도 느꼈지만, 한국 홀더 협회와 협회장의 날 향한 호의는 상당히 깊은 것 같다.

그건 단순히 이번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내서 뿐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성과를 어지간히 갖다 바쳤어야지.’

룬 홀더가 되고 난 후 약 8개월.

F급 홀더에서 시작한 내가 B급 홀더로 오르기까지.

반년간 올린 성과는 어마어마했다.

보고되지 않은 아카데미 지하 던전부터 시작해, 홉고블린 부락, 뱀이 뒤덮은 숲, 얼룩진 암석 더미, 구름을 가린 둥지, 그 외 필드 사냥 및 재난 괴수 사냥까지.

이러한 성과들은 내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지만, 이를 담당하는 협회 입장에서도 함박웃음을 지을 만한 성과.

그간 발굴한 신규 던전과 마력석 거래성과만 해도 ‘올해의 홀더’에 선정될 정도였다.

이런 상황 속, <빌런> 소탕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니… 협회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클랜 창설이라.’

나는 탁원호 교수가 건넨 제안에 흥미가 솟는 걸 느꼈다.

신규 클랜 창설.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언젠가 내가 이끌고 운영하는 클랜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그 막연한 일이 이렇듯 앞당겨질 줄은 몰랐다.

‘재밌겠다.’

그리고 의외로…

그 앞당김에 두려움이 들지 않았다.

<안티 빌런> 써클을 창설할 때도 느꼈는데, 나는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할 때 주로 열정을 느끼는 편이다.

S급 괴수 사냥, 최상급 던전 공략, 최악의 범죄조직 소탕.

그동안 내가 해결해 온 많은 사건엔, 생소하면서도 어렵게 느껴지는 일들만이 담겨있었다.

클랜 창설 역시 마찬가지.

아무리 지원을 많이 받더라도, 고작 아카데미 1학년인 학생이 클랜을 만든다는 건 언뜻 불가능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또 한 번 열의를 느꼈다.

하고 싶다.

분명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못 하면 또 어때.’

실패는 두렵지 않았다.

무너지면 다시 일어서면 그만이었다.

비단 홀더 계가 아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랬다.

나는 지금껏 잘해왔고, 그 반대급부로 일어날 실수들에 대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부담감도, 이제는 적절한 긴장감으로 즐길 수 있는 단계가 되는 것 같았다.

계획서를 고이 접어 품에 넣으며 대답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부분은 다음에 다시 논의할게요. 어차피 사업 착수 들어가는 것도 내년부터죠?”

“잘 아는군. 아무리 빨라도 내년 2학기일 거다.”

“그럼 더 천천히 논의해도 되겠네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껜 매번 도움만 받네요.”

“글쎄. 그 반대인 것 같은데.”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지만, 정작 그의 입가엔 아주 미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스승님도 어지간히 감정 제어에 약하시다.

흐뭇한 일이 있을 땐 도무지 표정을 숨기지 못하셨다.

그에 나도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점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 제가 클랜 창설에 관심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심지어 나조차도 막연하게 지니고 있던 생각.

그걸 탁원호 교수는 어떻게 안 걸까.

그 질문에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스승인 내가 하나뿐인 제자 생각을 모를까. 불의 심판 인턴이 끝나고, 네 스탠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중엔 몰라도 지금 당장은, 대형 클랜 가입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아하….”

그런 추론이 또 가능하구나.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나도 <불의 심판> 인턴을 하며 클랜 활동의 이점을 모두 흡수했었고, 왜들 그렇게 대형 클랜에 가입하고 싶은 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 결정만큼은 아카데미 졸업 후로 미루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도중 이런 기회가 찾아온 것이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는 그럼 다음에 또 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래. 추가 보상에 관해서도 얘기할 게 많지만, 오늘 제자가 좀 바빠 보이는군.”

“아, 하하….”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역시 겉보기와 다르게, 눈치가 빠르시다.

오늘은 탁원호 교수와의 면담 말고도, 잡혀 있는 약속이 꽤 많았다.

아침 일찍부터 아카데미로 나온 이유가 있었다.

“그래. 가보도록. 나중엔 그간 안 했던 대련 한 번 하면서 얘기를 나누지.”

“스승님과의 대련은 언제나 영광입니다.”

주먹을 한 손으로 감싸 쥐며, 익살스럽게 말을 건넨다.

스승님이라는 호칭이 이제는 입에 잘 붙는다.

평소 교수님이라는 호칭만 하다가, 이번에 유은설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면서 세 분의 교수님들에 대한 호칭을 모두 바꿨는데… 은근히 정감 가면서 괜찮은 호칭인 것 같다.

김채은이 괜히 스승님, 스승님 하면서 정선영을 따르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교수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탁원호 교수가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도재현.”

“네, 스승님.”

탁원호 교수는 자신의 자리에 앉은 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말했다.

“고생했다. 네가 아카데미를 구했다.”

짧지만 묵직한 그의 한마디.

주변과 언론에서 닳도록 언급하던 낯부끄러운 칭찬이었지만, 이런 표현을 잘 안하시는 스승님께 들으니 기분이 또 새로웠다.

그래서 나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제가 생각해도 그럽니다.”

“…….”

그리고 방안에 흐른 정적.

…이건 너무 과했나?

* * *

교수실에서 잠깐 대화만 나눈 것 같은데,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11시30분.

벌써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점심 약속엔 선약이 있었다.

“빨리 와- 인기 많아서 늦는단 말이야.”

아카데미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가은.

날 보자마자 팔을 붙잡으며 재촉하는 그녀의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뭐가 그렇게 급해. 어차피 휴강 기간이라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아니야. 거긴 일반인들이 더 자주 찾는 데라, 일찍 가도 줄 서야 해.”

“그래?”

아카데미 근처에 그런 맛집이 있었나?

[요리] 때문에 근처 맛집 탐방은 모두 다녀본 내가 모르는 음식점이 있었다니.

역시 세상은 넓고, 맛집은 많다.

“으으, 진짜 늦겠다. 빨리 가자.”

“그래서 내가 직접 만들어준다 했잖아. 왜 굳이 사 먹으려 해.”

“치- 아무리 요리 잘해도 맛집보단 아니지.”

“네가 진짜 잘 하는 요리를 안 먹어봐서 그래.”

생각해 보니, 문가은은 내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구나.

언제 한 번 날 잡고 대접해야겠다.

깜짝 놀라서 표정이 바뀌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딱 맞췄다! 저기로 가자.”

도착한 장소는, 아카데미 외곽의 한 생선요리 전문점.

그중에서도 명태를 주로 다루는 음식점이었다.

점심 약속으로 명태를 먹자니, 참 문가은다운 털털한 선택이다.

게다가 그녀의 말처럼 음식점은 점심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한창 붐볐다.

딱 한 자리만이 남아있어,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문가은은 자연스럽게 음식을 주문했다.

“사장님, 주문이요!”

“네- 뭘로 드릴까요?”

“여기 명태조림 2인분 주세요.”

“명태조림 2인분 받았습니다.”

그 짧은 대화에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명순조…?”

“응? 왜 그래, 재현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명태조림 맛집이라니까 분명 다르겠지.

그건 그렇고, 문가은에게서도 이제 내 이름이 자연스럽게 불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도재현, 도재현 하고 불렀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사실 나도 이걸 의식하기 전까진 성을 붙여 부르는 것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이름을 트고 나니 훨씬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기분은 어때?”

“뭐가?”

“아카데미의 영웅이 된 기분 말이야. 이제 우리만 알던 유망주에서, 뉴스에도 나오는 국내 유명 홀더가 됐잖아. 아카데미의 영웅, 도재현! 이런 슬로건으로.”

“아우- 너까지 왜 그러냐. 민망해 죽겠어.”

“아하하.”

그간 놀림 받은 것의 복수를 하려는지, 문가은이 열심히 날 놀려댔다.

안 그래도 음식점에 들어오고 나서도, 주변에서 자꾸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이게 그 연예인병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증세가 아주 심각했다.

어쨌든 우리는 이번 작전과 그 전후 과정을 통해 발생한 일들을 중심으로 주로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 문가은의 아버지, 문정혁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아빠가 요즘 자꾸 보채.”

“뭘?”

“너랑 사귀는 거 언제 밝힐 거냐고.”

“푸흐읍-”

물을 쏟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 아직도?”

“아직도가 아니라 더 심해졌어. 재현이 네가 이번에 워낙 유명해지니까, 본인이 막 더 신나셨나 봐. 어쨌든 딸 남자친구가 잘나가는 거니까.”

“아….”

문정혁의 팔불출 끼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건 강우현의 팔불출과는 방향성이 바뀐, 또 다른 형태의 팔불출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뭐라 하긴. 오히려 그걸 핑계로 댔지. 너무 유명해져서, 밖에 알려지면 만나기 힘들다. 계속 비밀로 만나는 게 편하다. 연예인들 생각해봐라. 뭐, 그런 식으로.”

“…이야, 잘 둘러댔네.”

확실히 누가 들어도 납득할 만한 변명이다.

그에 감탄을 흘리자, 문가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그치, 그치?”

“어. 완전 달라 보여. 내가 아는 가은이랑 다른 것 같아. 너 누구야?”

“씨이- 진짜 죽을래? 꼭 사족을 붙여.”

“미안.”

그렇게 웃으며 서로 장난을 치던 중.

기다렸던 음식이 나왔다.

다양한 종류의 각종 반찬과 담백한 국거리.

화려하면서도 도를 넘지 않는 비쥬얼.

이 음식점의 메인 메뉴, 명태조림의 상차림이었다.

“잘 먹겠습니다아-”

문가은은 잔뜩 신난 듯한 얼굴로 젓가락을 들었다.

그에 한껏 의구심을 품던 나도 젓가락을 집었다.

자연스럽게 명태조림을 한 점 집고,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아.”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입안 가득 느껴지는 익숙한 풍미.

반가움과 짜증이 동시에 밀려오는 맛.

아씨…

맞잖아, 명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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