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사기 룬을 얻었다 (182)화 (182/353)

Chapter 182 - 도재현을 아세요? (3)

“진짜 뒤지겠네….”

혹사다.

혹사도 이런 혹사가 따로 없었다.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탁원호 교수의 일정 때문에, 시간을 쪼개 가며 새벽부터 그와 대련을 했었는데…

난데없이 아침엔 박진우에게 끌려가 대련을 하고 왔다.

박진우가 원체 이런 부탁을 하지 않는 녀석이라, 어떻게든 들어주기는 했는데…

한껏 무리하고 나니 온몸이 쑤셨다.

“박진우 이 자식… 여자 때문에 친구를 팔다니.”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린다.

‘진짜 중요한 문제’라고 꼬셔서 갔던 연무장엔, 웬 금발 청안의 외국인 여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카밀라 플로레스라는 이름의 미국인 홀더.

이번 아카데미의 타국 교류 프로젝트로 온 학생.

박진우는 그녀에게 ‘한국 홀더들의 싸움’을 보여주겠다는 명목으로 날 끌고 온 거였다.

“한국 홀더들의 싸움은 개뿔.”

그게 다 개소리라는 건, 도착하자마자 파악했다.

카밀라의 아름다운 외모와 밝은 기운.

연무장 내 두 사람 사이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웃음꽃이 피는 대화 속에서, 그 묘한 기류를 못 느낄 수가 없었다.

박진우는 대화 주제를 더 다채롭게 이끌어가기 위해, 날 제물로 쓴 것이다.

“빌어먹을 자식. 관심 없는 척이란 척은 다 하더니.”

그 광경을 처음 봤을 땐, 솔직히 깜짝 놀랐다.

강해지는 게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보이던 전투 중독 박진우가, 여자에 관심을 보이다니.

그를 알고 지낸 모든 사람이 놀랄 만한 사건.

원작에서도 일어난 적 없는 특이 현상이었다.

“애초에 원작은 로맨스가 없었으니까.”

<넥스트 룬 홀더>는 로맨스가 없는, 순수 성장물이다.

박진우의 성장 과정과 전투, 인간관계, 권선징악 등을 주요 주제로 삼고 있지만, 주요 인물들의 연애에 관한 내용은 담겨있지 않았다.

극 중 강주연의 명칭이 ‘여주인공’으로 분류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녀는 말 그대로 여주인공.

박진우와는 다른 방향성의 성장을 보여주는, 극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그 때문에 원작에서는 주인공들의 어떤 로맨스도 나오지 않았었고, 당연히 지금 일어난 현상은 나의 개입과 수많은 변수를 통해 나타난 강한 나비효과였다.

카밀라라는 새로운 인물과 박진우가 전투 외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

상당히 생소하면서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래도 뭐… 나쁘진 않나.”

나는 씨익 웃으며 볼을 긁었다.

몸은 온통 찌뿌둥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어쨌든 지금의 박진우는 내 친구다.

그것도 거의 유일하게 검을 나눠 볼 수 있는, 내외적으로 통하는 게 많은 절친.

원작이 어땠고, 나비효과가 어땠고…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친구에게 마음에 드는 여성이 생겼고, 뭔가 더 잘해보기 위해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

그를 도와줌에 있어, 흔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박진우와의 대련에 임해줬다.

비록 박진우가 지긴 했지지만, 카밀라는 결과에 상관없이 수준 높은 대련에 기뻐했다.

순수하게 무(武)를 다루는 것에 관심이 많은 듯한 홀더였다.

그리고 대련이 끝난 후.

따로 박진우를 불러, 아카데미 지도와 주요 시설 관계도 등을 건네며 이런저런 조언을 건넸다.

-여기 카페는 분위기가 특히 좋으니까, 안내 다 해주고 시간 남으면 가 봐.

진심 어린 조언에 꽤 놀란 듯한 박진우의 얼굴.

녀석은 쑥스러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도 해댔다.

-오우… 이렇게 잘 아는데, 넌 왜 그러고 있냐.

-뭐, 갑자기. 왜 알려줘도 지랄이야.

-에휴- 아니다. 어쨌든 오늘 도와줘서 고맙다. 진짜로.

-고마우면 나중에 한 턱 쏘든가.

-오늘 주기로 한 자유대련 10회권, 20회로 늘려줄게.

-아오, 좀! 그딴 거 필요 없다고.

어쨌든 그렇게 박진우는 안내를 빙자한 썸을 타러 떠났고, 나는 아까의 카페로 돌아와 있었다.

다 마신 커피를 버리고, 또다시 달달한 음료를 시킨다.

떨어진 당을 채우려고 왔었는데, 방금의 대련으로 다시 녹초가 돼 버렸다.

두 번째 당 충전이 필요했다.

그리고 카페 테이블에 얼굴을 기댄 채 쉬던 중.

당장 갖다 버리고 싶은, 지긋지긋한 문자가 또 왔다.

[강동욱 교수님] 도재현 홀더, 오늘 현장 실습인 거 잊지 않았죠? 오늘은 제대로 달려서, 2단계 봉인 해금까지 가봅시다! 하하하.

“…진짜 살려줘.”

어째서인지 큰 사건을 마무리하고, 더욱 바빠진 것만 같은 스케쥴이었다.

* * *

유은설은 요즘 들어 꽤 기분이 좋았다.

처음엔 단지 개인적인 목적으로 취임했던 아카데미 강사지만, 어느덧 두세 달을 넘게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나름 정이 생겼었다.

그런 학생들의 평화를 빼앗고, 무고한 시민까지 학살했던 <빌런> 클랜.

유은설이 특정 집단에 대해 그토록 강렬한 혐오감을 느꼈던 건, <빌런>이 처음이었다.

그런 그들을 모두 소탕하고, 아카데미가 안정을 되찾았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유은설의 텐션을 높이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도재현, 또 일냈다! 융화의 질서 1단계 감응 성공.

-한국 최대 기대주, 도재현의 행보. 외신에서도 극찬 중!

-도재현은 유은설의 전속 제자? 호화로운 그의 스승들…

-천재가 가르치는 천재. 도재현은 여섯 번째 S급이 될 수 있을까.

소탕 작전이 끝나고, 시간이 꽤 흐른 지금.

도재현에 대한 열기는 아직 식질 않고 있었다.

혼자서 <빌런> 클랜원 수십을 붙잡아두고, 황동연이 만든 언데드 군단을 무력화시킨 홀더. 

심지어 유은설마저 잠시 놓친 황성연…

어쩌면 S급 홀더일 그 남자와 잠깐이라도, 아주 잠깐이나마 겨루는 데에 성공했던 홀더.

그 정도 홀더가 아직 고작 아카데미 1학년이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열광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은 영웅을 좋아한다.

아카데미에 나타난 젊은 영웅.

도재현은 현재, 한국 홀더 계의 최대 기대주였다.

“…….”

유은설은 살며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붙잡았다.

그게 요즘 유은설의 기분이 좋은 이유였다.

자신의 제자다.

그녀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전속으로 맡아, 직접 가르치고 있는 제자.

그런 이가 온 국민의 관심을 받고, 홀더 계에선 ‘최고의 기대주’라는 찬사까지 받고 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신기해.”

처음엔 단지 파티원을 구하기 위한 목적에 불과했다.

도재현은 그간 유은설이 찾아다니던 ‘용의 기운이 담긴 홀더’였고, 이는 <용의 숨결이 닿는 강> 내 이중던전에 입장하기 위한 조건에 부합했다.

유은설 개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

냉정하지만, 홀더의 세계에선 당연하기도 한 이야기였다.

도재현 역시, 그러한 관계로부터 얻어간 게 많았었고 말이다.

“지금은….”

하지만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그를 임시 전속 제자로 받은 후.

그녀의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도재현은 재능 있는 홀더였다.

가르치는 모든 수업을 빠르고 정확하게 흡수했고, 그에 따라 성장하는 속도도 어마어마했다.

처음 받아보는 전속 제자임에도, 지금까지 유은설의 교육엔 한 번도 막힘이 없었다.

<빌런> 소탕 작전에서의 그의 활약은.

뜬금없는 요행이 아닌, 준비된 결과였던 것이다.

언론에서 자꾸 떠들어대는 도재현의 새로운 별명.

예비 S급 홀더.

최연소 S급 홀더 출신인 유은설은, 그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유은설 홀더님. 혹시 도재현 홀더에 대해서 잘 아세요?”

대중의 관심은 언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실제로 알고 지낸 지인들도 종종 이런 질문을 건네오곤 했다.

S급 홀더인 유은설에게, 그녀가 아닌 다른 유망주 홀더에 대해 묻다니.

유은설은 그런 상황이 신기하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제 전속 제자예요.”

그래서 요즘은 이런 말도 스스럼없이 나온다.

정확히는 임시 전속 제자지만, 그런 불필요한 부연설명은 없어도 괜찮았다.

“와, 정말요?”

“네. 도재현 홀더에게 단검술을 가르친 지도 벌써 몇 달이 됐네요.”

“기사 내용이 사실이었구나….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저희 석양의 꽃 클랜에서도 도재현 홀더를 꼭 영입하고 싶거든요. 앞으로 한국 홀더 계를 이끌어 갈 유망주잖아요.”

“맞아요. 도재현 홀더의 재능은, 그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니죠.”

일전에 공격대 형식으로 같이 파티를 이룬 적이 있는 <석양의 꽃> 소속 홀더.

그녀와의 식사 자리에서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그리고 상대의 말에, 유은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도재현은 확실히 어떤 클랜이든 탐 낼 만한 인재였다.

국내 3대 클랜도 모여드는데, <석양의 꽃>이라고 달려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역시 내 제자야.’

그리고 그런 낯부끄러운 생각이, 동시에 머리에 든다.

이젠 민망하지도 않다.

이런 게 스승의 기쁨일까?

도재현이 잘나갈수록, 더 칭찬받을수록…

유은설은 괜히 자신의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임시로만 생각했던 ‘전속 제자’.

이젠 정식으로 바꿔도 괜찮을 것 같다고.

도재현이라면 충분히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유은설 홀더님, 제자랑 별로 안 친하세요?”

“…네?”

갑자기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유은설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석양의 꽃> 클랜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니, 그냥 도재현 홀더, 도재현 홀더 하시길래, 뭔가 사제지간에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요. 아하, 아하하. 시,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유은설 홀더님께 못하는 말이 없네요. 제자한테 존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호칭이야 상관없죠.”

“…….”

당황한 듯 서둘러 말을 끝마치는 상대.

하지만 그 말에, 유은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존댓말도 쓰는데.’

그리고 다시 한번 고민했다.

제자한테 존댓말 쓰면 너무 정 없어 보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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