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3 - 2학기 종강 (1)
길었던 휴강 기간이 끝났다.
2주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아카데미가 습격받고 희생자가 발생하는 불운한 일도 있었지만, 어쨌든 사건을 잘 수습하고 깔끔한 대처를 이어가며 아카데미는 다시 활기찬 개강을 맞이할 수 있었다.
특히 최근 진행된 캘리포니아 홀더 아카데미와의 협업.
그 훈련광이던 박진우마저 변하게 만든 대형 교류 프로젝트 덕분에, 아카데미 내부엔 외국인 홀더들이 넘쳐났다.
지나가는 거리마다, 스쳐 가는 건물마다…
꼭 한 명씩은 금발의 푸른 눈이 보이곤 했다.
“어! 도재현 홀더 맞죠? 와, 와! 저 팬이에요.”
…그리고 꼭 한 번씩은.
이렇듯 날 알아보는 미국 홀더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이번 작전으로 내 팬이 됐다고 주장하며, 펜과 종이를 건네 사인을 부탁하곤 했다.
‘아니, 내가 싸운 거 본 적도 없을 텐데.’
본 적도 없는 사람의 팬이 될 수 있나?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내 손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건넨 펜과 종이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 팬이라는 분에게 야박하게 굴 순 없지.
기사에서 얼굴만 보고 팬이 됐을 수도 있고.
“감사합니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또한, 이렇게 말을 건네면.
사인을 요청한 사람들 대부분은 놀라 되물었다.
“영어를 할 줄 아세요?”
“조금요. 막 유창하진 않아요.”
“그런 것치곤 억양이 되게 깔끔하신데….”
이번 작전을 통해 얻게 된 공통룬, [언어]의 힘이었다.
[언어] 룬은 꽤 특이한 룬이다.
처음엔 단순히 괴수나 정령 등 인외적 존재와의 소통에 필요한 룬인 줄 알았는데, 그 영역은 인간들 사이의 언어에도 적용이 됐다.
한 번이라도 보고들은 언어라면, 해당 언어는 시스템 적용을 통해 내게 자연히 입력된다.
그때부터 듣는 귀가 뚫림은 물론, 말하는 것도 국어처럼 익숙하게 나온다.
당연히 영어 같은 만국 공통어는 쉬웠고, 전통 부족 언어 따위도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한다면 능숙하게 내뱉을 수 있었다.
그 능숙함과 응용력은 룬 레벨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내 [언어] 레벨은 8.
무려 [요리]보다 1레벨이나 높으니, 그 숙련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꼭 수업 같이 들어요!”
“네. 고마워요.”
그렇게 개강 이후.
나도 몰랐던 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일이 빈번해졌다.
작전 전에도 종종 있는 일이긴 했지만, 이렇게 많이… 그것도 바다 너머 외국인들마저 그토록 격한 환영을 해주니 당황스러우면서도 고마웠다.
어쨌든 신선한 얼굴들이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으니, 아카데미에도 연일 활기가 가득했다.
“하압!”
“빠르네요! 하지만 캘리포니아 홀더들은 그보다 더 빠릅니다!”
“말이 많다아!!”
특히 아카데미 연무장.
실전 연습 및 훈련을 진행하고, 학생들끼리 대련도 가능한 장소.
이곳은 매일 같이 대련을 나누는 한미 홀더들로 붐비곤 했다.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고 맞서 겨뤄보고 싶은 건, 전투 계열 홀더라면 누구나 가질 공통적인 욕심.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 먹히는 관심사였다.
캉-!!
그그그-
“크읍….”
방향은 살짝 다르긴 한데…
나도 이러한 연무장 배틀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화요일 저녁.
아카데미 연무장 내에 자리한 ‘프라이빗 배틀룸’.
교수급이 직접 신청해야 사용할 수 있는 이 개인 대련 공간에서, 나는 유은설의 거침없는 검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진짜 사정없이 패시네.’
임시휴강 때도 몇 번 받아본 검이지만, 오늘은 유독 더 강하게 몰아치시는 것 같다.
…일부러 개강에 맞춰 파워를 높이신 건가?
유은설은 간신히 숨을 고르던 날 보더니, 이내 또 매정한 선고를 날렸다.
“다시 갑니다.”
“넵!”
남다른 성장 속도 덕에 하루하루 기록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나지만, 이번 작전과 휴식을 통해 이룩한 성장은 꽤 값진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획득한 룬의 개수가 많아서가 전부는 아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늘 약점이라 생각하던 공통룬들을 대폭 얻게 됐고, 또 이 룬들이 서로 시너지를 낸다.
어쩌면 언젠가 [룬 사냥꾼] 아래 ‘상위룬’이 될 가능성도 있는 룬들이었다.
거기에 일본에서 얻었던, 이제는 내 주력룬이 될 수도 있는 3개의 전설룬.
마지막으로 불필요한 룬들을 따로 덜어낼 방법까지 생기면서, 나는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인 전투가 가능해졌다.
‘그래도….’
그중 가장 고무적인 걸 꼽으라면.
역시 암살자 계열 능력들의 성장이다.
벌써 10레벨에 도달한 [은신]을 비롯해, [약점 파악], [치명타] 등의 핵심 공통룬들이 갖춰졌고, 이를 보조할 보법류 룬 [날렵한 몸놀림]도 어느새 8레벨이다.
특히 유은설에게 직접 배운 [매화검법]과 지윤재를 처치하고 얻은 [은닉의 비도술].
암살자 계열의 두 갈래라고 볼 수 있는 영역에서, 각각의 무공룬들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제 좀 암살자 계열 같네.’
그동안은 말만 암살자 계열이지 전사 계열에 가까운 멀티홀더였는데, 이제는 어엿한 암살자 계열의 향이 풍긴다.
어지간한 B급 암살자 계열, 혹은 A급 암살자 계열의 퍼포먼스도 충분히 따라잡을 능력이 돼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건.
당연히 내 전담 수업을 맡아준 스승님 유은설의 공이 가장 컸다.
룬이라는 스승이 막대한 힘을 주긴 하지만, 재밌게도 현실에서의 스승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더욱 많았다.
캉-!!
그그그-
타닥- 탓-
“대련 종료. 여기까지 할게요.”
“허억- 허억-. 수고… 허억- 하셨습니다, 허억….”
유은설의 종료 선언이 들리고 나서야, 악착같이 붙들고 있던 소검 두 자루를 내팽개쳤다.
그리고 그대로 누우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유은설과의 대련은 거의 항상 이런 식이다.
나를 한계의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그 끝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도와준다.
그동안 내 암살자 계열 능력들이 빠른 성장을 거듭한 건, 유은설의 이러한 한계돌파식 강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매화검법은 이제 더 가르칠 게 없는 것 같네요.”
누운 채로 한참을 숨을 몰아쉬던 중.
유은설이 문득 꺼낸 말에, 난 다시 상체를 들었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 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요?”
“네. 지금 도재현 홀더의 매화검법은 완성형에 가까워요. 도재현 홀더 스스로도 잘 알지 않나요?”
“아….”
룬 레벨을 직접 확인할 수 있지 않느냐.
유은설은 그걸 돌려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매화검법] 룬은 벌써 8레벨.
응용 단계를 제외하면, 기초와 숙련 단계는 거의 다 익혔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저… 스승님?”
“네.”
“혹시 매화검법엔 궁극스킬이 없는 건가요?”
지금껏 내가 무공 혹은 기술적인 요소를 담은 룬들을 획득했을 때엔, 해당 룬들에 모두 궁극스킬이 있었다.
[파상검법]엔 [파상천검]이.
[유수검법]엔 [유수활검]이.
심지어 지윤재의 [은닉의 비도술]을 얻었을 때도, [나이프 레인]이라는 궁극스킬을 획득했었다.
[매화검법] 역시 이러한 룬들고 유사한 형태의 무공룬.
당연히 10레벨에 도달하면, 궁극스킬을 획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은설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 매화검법은 어디까지나 중국 화산파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간소화 및 변형시켜 암살자 계열에 최적화시킨 무공이에요. 국내의 많은 암살자 계열이 이 룬에 대해 연구를 진행 중이지만, 아직까지 개발된 궁극스킬은 없다고 들었어요.”
룬은 때때로 현실의 힘이 시스템에 구현화 되기도 한다.
화산파의 실제 무공인 [이십사수매화검법]이 룬으로 등록된 게, 그 대표적인 케이스.
때문에 룬이 주는 힘 안에서 기술적인 부분을 연구한다면, 궁극스킬 역시 얼마든지 개발될 수 있다.
그 확률이 거의 하늘의 별 따기만큼 희박하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어쨌든… 제가 계획한 이번 학기, 도재현 홀더의 임시 전담 수업은 여기까지예요.”
“아….”
유은설의 조용한 말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알고는 있었다.
어쨌든 유은설과 나는 이해관계에 따라 만난 관계.
<용의 숨결이 닿는 강> 내 이중 던전을 함께 공략하고, 또 그에 대비해 내 무력을 키우고자 전담 수업까지 맡은 것이었다.
다만, 그간 교육을 받으며 나름 정이 생긴 걸까.
이제 끝…
이라고 선언하니, 괜히 아쉬운 마음만이 들었다.
‘그래도 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이유야 어쨌든, 그녀 덕분에 나도 어엿한 암살자 계열 홀더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감사 표시는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정중한 자세를 취하며 유은설에게 고개를 숙이려 했다.
“스승님, 그동안…”
“그리고 지금부턴, 도재현 홀더를 정식 전속 제자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도재현 홀더 생각은 어떤가요?”
“…예?”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가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전속 제자.
지금까지 날 가르치며 달아온 ‘임시’ 타이틀을 뺀, 정식 제자 제안.
이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 명도 없지 않나?’
현 국내 S급 홀더 중엔, 정식 전속 제자를 보유한 홀더가 없다.
S급 홀더를 키워낸 스승은 있어도, S급 홀더의 제자는 없었다.
즉, 유은설은 지금.
그러한 암묵적인 균형 관계를 깨고, 최연소 S급 홀더인 그녀가 정식 제자를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 제자 자리의 주인공은 나고.
그렇게 충격적인 선언을 한 유은설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도재현 홀더, 혹시 내 존댓말이 불편한가요? 불편하다면 말해줘요. 나도 고쳐볼게요. 사실 나도 스승이란 걸 해본 적이 없어서… 사제 관계에 대해선 잘 모르거든요.”
심지어 제자를 위해.
자신의 습관도 고쳐보겠다고 말하는 유은설?
세간에 알려지면, 또 한 번 언론이 뒤집힐 만한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