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6 -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1)
“대책이 필요해!”
김채은이 선언하듯 말했다.
그에, 강주연과 문가은이 의아한 얼굴을 지었다.
“……?”
“무슨 대책?”
아카데미 2학기가 종강하기 직전 주.
근처 조용한 카페.
세 여자는 카페 세미나 룸을 빌려, 한데 모여 있었다.
정확히는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김채은.
그녀의 부름에 강주연과 문가은이 따라온 것이었지만.
“곧 크리스마스잖아.”
“그런데?”
“그런데라니. 가은이 너, 크리스마스에 뭐 할 거야?”
순간 날카롭게 찔러오는 김채은의 질문.
그에 문가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당황에 물들었다.
그건 마치.
몰래 계획하고 있던 뭔가를 들킨 듯한 얼굴이었다.
“뭐, 뭐야 갑자기. 아, 아무 계획 없는데?”
“거짓말.”
“씨- 거짓말 아니거든? 그러는 채은이 넌 뭐할 건데?”
살짝 억울함 섞인 역질문에, 김채은은 당당히 말했다.
“나 재현이랑 보낼 건데?”
“…뭐?”
“……!”
무심코 던진 돌이 두 사람을 동시에 가격했다.
김채은의 답에 문가은은 물론, 강주연도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도재현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겠다.
이 말은 다른 이들에겐 몰라도…
그녀들에겐 폭탄선언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강주연과 문가은 역시, 마음 한편으론 도재현과 크리스마스를 보낼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래. 재현이가 너랑 있겠대?”
벌써 선수를 뺏겼나?
그런 생각에 문가은이 초조하게 물었다.
생애 첫 크리스마스 데이트.
자칫하면 그게 무산될…
아니, 시도조차 못 해보고 끝날 위기였다.
그러나 김채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물어보지도 못했어.”
“…휴.”
“…….”
안도의 한숨이 세미나 룸 곳곳에 퍼졌다.
아직 기회가 있다.
그런 생각에 자신들도 모르게 나온 한숨이었다.
아무 계획이 없다던 문가은의 말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
그에 김채은이 피식 웃었다.
“거봐. 너희도 재현이랑 보낼 생각이었잖아.”
“…….”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서로 다른 공간, 같은 생각.
세 명은 각자 비슷한 계획을 지니고 있었다.
‘대책이 필요하다’던 김채은의 말이, 금세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탁자를 톡톡 두드리던 김채은이 새로 말을 꺼냈다.
“난 우리가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고 봐.”
“…솔직?”
강주연의 되물음에 김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장 이번만 해도 그래. 어떻게 할지 맘속으로만 감춰두고 있다가, 서로 일정이 겹칠 뻔했잖아?”
그 말엔 다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이 모두 똑같은 날에, 똑같은 제안을 한다?
이건 악수 중 악수다.
도재현을 상대로 한 계획일 수록 더더욱 그렇다.
그중 선택 받는다면 당연히 좋긴 하겠지만…
도재현 성격에, 누구 한 명을 딱 집어 고를 리 없었다.
아마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모두가 상처 받지 않는 선택을 하겠지.
‘…혼자 갑자기 사냥을 간다거나.’
크리스마스에 괴수 사냥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미친 생각인데, 도재현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오히려 그럴 확률이 더 높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 참사를 막기 위해서, 오늘 같은 논의는 꼭 필요했다.
“우린 지하 던전 때부터 이번 빌런 소탕까지 함께 싸워온 친구들이고, 그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해. 앙숙 같은 느낌이 날 때도 있지만, 어쨌든 그만큼 유대감이 있다는 거니까.”
그 말을 하고 잠시 눈을 감은 김채은은, 이내 눈을 뜨며 본론을 꺼냈다.
“난 재현이한테 관심 있어. 이성적으로.”
“……!!”
“그리고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추측 중이야. 다들 맞지?”
너무 직설적인 말이지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모두가 의식하고 있던 내용.
그리고 가벼이 넘기기엔 꽤 무거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가은은 김채은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공감을 산 건 문가은 뿐이었던 모양이다.
조용히 김채은의 말을 듣던 강주연.
그녀는 문가은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후…
살짝 멍해진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가은.”
“어?”
“…너, 재현이 좋아해?”
“…….”
순간 세미나 룸에 흐르는 정적.
숨 막히는 고요와 그 속에서 타오르는 무형의 불길이, 작은 공간 전부를 덮쳤다.
큰일이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그대로 직화구이가 된다.
안 그래도 불속성 중 최고로 꼽히는데, 격한 분노가 섞인 불꽃은 더더욱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아, 아니? 너 방금 채은이 말 못 들었어? 과, 관심이 있는 걸 말하는 거잖아. 좋아하는 게 아니고.”
묘하게 말을 돌리며 당황을 감추는 문가은.
그에 강주연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게 그거 아니야?”
“다르지! 조, 좋아한다는 건 기회가 왔을 때 언제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고백하는 것처럼 말이야. 근데 지금 난 절대 고백 같은 건 못 해. 너, 넌 할 수 있겠어?”
그 질문에 잠깐 멈칫한 강주연은,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아니.”
“그래? 휴, 다행이다… 아니. 이, 이게 아니라 아무튼! 나도 그런 상태야. 관심만 있어, 관심만.”
“…….”
이해가 가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 강주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하다.
관심이 있다는 건, 결국 언제든 좋아하는 감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아니, 애초에 이성적 관심과 좋아하는 감정에 경계선이 있긴 한가?
거기까지 생각한 강주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문가은은 찔리는 게 있는지, 괜히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강주연의 고운 미간이 다시 한번 찌푸려진다.
“…배신자.”
“뭐, 뭐래.”
억울함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문가은이 반박했다.
“그러는 주연이 너도 재현이 좋아하는 거 아니라며. 그때 내가 그렇게 추궁했어도, 아니라고 발뺌했잖아. 나한테 연애 안 해봤다고 놀리기까지 했으면서…!!”
사실 강주연도 지금까지 쭉 감정을 숨겨왔었다.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봐 온 친구 문가은은 물론,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김채은마저 눈치챌 정도로 티 나는 감정이었지만…
스스로 만큼은 그런 게 아니라고 자신을 속여왔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르고, 감정이 더욱 깊어진 지금.
이제서는 더 숨길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살짝 민망해진 강주연이 고개를 돌렸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관심만 있는 거야.”
“이씨! 바로 써먹는 거 뭐야!”
쩌적-
쩌저적-
그녀들이 자신들만의 대화에 취해 티격태격할 때쯤.
어느덧 세미나 룸 안이 냉기로 가득해졌다.
벽면과 테이블에도 점차 서리가 꼈다.
난데없는 특이 현상에, 말다툼하던 강주연과 문가은이 고개를 돌렸다.
“헤헤. 잡담하는 건 좋은데, 우리 이제 대책을 좀 세울까?”
김채은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주변엔 냉기가 풀풀 풍겼다.
그 압도적인 분위기에…
강주연과 문가은은 자신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그러자!”
착한 사람이 화날 때 무서운 건, 역시 고금을 막론하고 만국 공통이다.
* * *
2학기가 모두 끝이 났다.
이번 학기 말 평가는 기말고사, 과제 및 수행평가 등으로 대체됐다.
학기 내에 겪은 아카데미 습격이나 빌런 소탕 작전 등이 학생들에게 과도한 피로감을 줬고, 그 때문에 또다시 대련과 관련된 평가를 진행하는 건 무리가 있을 거라는 운영진의 판단이었다.
<아카데미 간이 투기 대회(12.23) 결과>
대신 지원자들에 한해, 자유 매칭을 통해 연무장에서 대련하는 간이 투기 대회를 개최했다.
원래라면 2학기 말에 진행됐을 ‘축제’와 ‘투기 대회’.
<빌런>의 습격과 소탕 때문에 무산됐던 대규모 행사들을 그나마 대체한 대회였다.
난 일정이 바빠 참가하지 못했는데, 듣기론 박진우와 우리 써클 부원 몇 명은 참여했다고 한다.
“어?”
그런데 결과를 본 내 눈이 잠시 커졌다.
<우승자 – 카밀라 플로레스>
우승자로 적힌 이름이 상당히 익숙했기 때문이다.
카밀라 플로레스.
일전에 박진우에게 억지로 불려갔을 때 마주친, 캘리포니아 아카데미 소속 미국 홀더.
사실 그런 것보단, 박진우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여자 홀더라는 게 더 인상적이었던 홀더.
이번 대회는 일종의 축제처럼 진행된 간이 대회로, 교환 학생으로 온 미국 홀더들도 모두 참여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대회 우승자로 그녀의 이름을 마주하니 신기했다.
처음 봤을 때도 무에 대해 적극적인 향상심을 보였던 그녀였는데, 본연의 실력 또한 상당한 모양이었다.
“…아는 사람이야?”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지만, 이젠 미묘한 다정함이 깃든 목소리.
검붉은 톤의 머릿결과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헉.’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릴 뻔했다.
아카데미 학생회관 앞.
오늘 만나기로 한 강주연의 의상이…
생각보다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길이의 짧은 원피스.
팔까지 모두 감싸져 있지만, 오프 숄더라 어깨는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 원피스의 색깔이… 붉은색이다.
붉은색 오프숄더 원피스.
누가 봐도 산타의 느낌을 낸, 눈에 띄는 특별한 옷.
강주연답지 않게 파격적인, 그러나 누구보다 매력적이고 잘 어울리는 의상이었다.
‘강우현 홀더님한테 들키면 큰일 날 것 같은데.’
오늘의 강주연과 같이 있는 모습을 들킨다?
강우현이 어떻게 나올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제발 오늘은 우릴 찍는 기자들이 없기를….
“흠흠, 언제 왔어?”
“방금. 저 사람은 누군데?”
강주연이 내가 바라보던 종이를 가리켰다.
내가 생소한 외국 이름을 빤히 보고 있던 게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아, 카밀라 플로레스라고… 그 캘리포니아에서 교환 학생으로 혼 홀더인데, 진우랑 친분이 좀 있어.”
“…박진우?”
“응. 나도 저번에 인사했는데, 오늘 보니까 간이 투기 대회에서 우승했더라고. 신기하네.”
물론, 간이 투기 대회 결과만 보이는 건 아니었다.
학기 마무리와 더불어 한해가 끝나며, 아카데미 학생회관엔 많은 벽보들이 붙었다.
학장이나 교수, 학생회장 등 주요 인물들의 연말 인사부터 시작해, 졸업자를 대상으로 한 클랜 모집공고, 각종 중고 장비 거래 제안 등…
다양한 종류의 벽보들이 수시로 붙었다.
그중엔 나와 관련된 벽보도 있었다.
<공식 아카데미 선정 ‘올해의 써클’>
-안티 빌런 (회장: 도재현/1학년)
-총평: 안티 빌런 써클은 올해 2학기에 처음 창설된 써클로,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활동 기간에 믿기지 않는 성과를 연달아 쌓았다. 가장 먼저 … …
<2학기 학년별 수석 공고>
*1학년 (전체: 도재현)
-전사: 박진우
–마법사: 강주연
-암살자: 도재현
… …
“전체 수석, 축하해.”
옆에서 같이 벽보를 보던 강주연이 말했다.
무뚝뚝한 말투지만, 저게 진심을 다한 축하라는 걸 지금의 난 알 수 있었다.
“고마워.”
빈말로라도 ‘난 네가 될 줄 알았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이번 학기는, 성취도나 발전성 측면에서 내 성적이 압도적이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한 만큼 따라오는 결과.
그에 나는 마음껏 기뻐하기로 했다.
“슬슬 갈까?”
“…응.”
우리는 벽보들을 뒤로 한 채, 몸을 돌렸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강주연과의 저녁 약속이 잡혀 있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