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9 -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4)
우리는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원형 탑처럼 기다랗고 회전하듯 펼쳐진 계단.
그 길이는 생각보다 길었다.
3분 넘게 걸어도 끝이 나오질 않았다.
특히 계단 자체가 모두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어, 외관이 투명하고 재질은 미끌미끌했다.
“앗…!”
“괜찮아?”
아래로 내려가던 도중.
문득 넘어질 뻔한 강주연의 손과 허리를 붙잡았다.
하체에 집중하던 그녀의 마력이, 순간적으로 풀린 모양이었다.
“…괜찮아.”
강주연은 살짝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말했다.
“내 손 잡고 천천히 따라와. 난 보조 룬 있어서, 마력 파쿠르 좀 더 수월하니까.”
“응.”
평범하지 않은 재질로 이루어진 특수 장소를 이동할 땐, 이렇듯 발바닥과 다리 쪽에 최대한 마력을 집중시켜 천천히 이동해야 한다.
그건 홀더가 벽이나 나무, 물을 타고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원리.
마력을 활용한 일종의 파쿠르라고 볼 수 있다.
내 보조룬 중 [날렵한 몸놀림]은 이러한 ‘마력을 활용한 파쿠르에 능숙해진다’라는 특수효과가 있다.
평소엔 딱히 쓸 데가 없는 효과지만, 이런 상황에선 거의 평지를 걷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곤 했다.
덕분에 ‘얼음 계단’의 미끄러움을 전혀 못 느낀 채, 우리는 숨겨진 보스 룸까지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보스 룸이 두 개인 던전이라니, 이거 홀더 계에서 최초 아닌가?”
“…아마도?”
“일본에선 보스가 두 마리인 던전도 보고… 진짜 우리 같이 다니면 뭔가 있긴 한가 봐. 별 결 다 보네.”
보스가 두 마리인 던전과 보스 룸이 두 개인 던전.
내가 알기론 두 개 다, 홀더 계에서 최초였다.
‘레스트 룸이 괴수인 적도 있었지.’
<홉고블린 부락>에서의 ‘황금 고블린’을 떠올리자, 괜히 또 웃음이 나왔다.
해당 내용을 보고했을 때, 홀더 협회의 이지혜도 전혀 믿질 않았었다.
황금 고블린이 레스트 룸인 게 말이 되냐면서.
그동안의 난 빙의자 지식을 토대로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직접 찾아낸 기이한 현상들이 꽤 많았다.
그만큼 지금의 내가, 이곳 세계에 잘 적응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
이제는 정말 도재현이라는 존재에 이질감이 들지 않았다.
턱-
스스스-
보스 룸의 문을 연다.
문 또한 얼음으로 만들어져, 끼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고 부드럽게 열렸다.
“어?”
“와….”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감탄했다.
입구를 비롯한 주변 모든 곳엔 눈이 쌓여 있고, 고목처럼 군데군데 심어진 나무들은 새하얗게 물들어 있다.
그 길은 원형으로 뻗어 있으며, 그 안엔 물…
아니, 얼음이 가득 찼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얼음.
푸른색인지 하늘색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깨끗한 코발트블루.
아이스 루돌프가 보유했다는 특수한 보스 룸.
그건 하나의… 커다란 ‘얼음 호수’였다.
“…전부 얼어 있는 거야?”
“그런 것 같아. 얼음 정원이라더니,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가 숨겨져 있었네.”
정말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다.
언뜻 삭막해 보이는 눈과 서리는 부드러운 색감을 자랑했고, 호수 안 물과 얼음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빠져들 것 같았다.
북유럽이나 캐나다 쪽에 여행을 가면 이런 얼음 호수를 구경할 수 있다는데, 눈앞의 풍경은 그보다 훨씬 신비롭고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던 강주연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물었다.
“…보스는?”
보스 룸인데 보스가 없다.
사실 이 부분은 이미 입장 때부터 예측했다.
“아마 우리가 아까 잡은 이레귤러 보스가, 이 보스 룸의 보스일 거야. 정보창에도 아이스 루돌프가 소유한 던전이라고 했었거든.”
즉, 이 얼음 호수는 말만 보스 룸이지, 이미 보스가 공략된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강주연이, 문득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어?”
아까 우리와 싸웠던 아이스 루돌프.
그와 매우 유사하게 생긴 조각상이 호수 앞 평지에 있었다.
그 양옆엔 작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고, 가운데엔 마력석을 비롯해 각종 아이템이 잡동사니처럼 굴러다녔다.
공략이 끝난 보스 룸의 보상.
레스트 룸마저 같은 공간에 합병되어 있던 것이다.
우린 그쪽으로 걸어가 보상들을 확인했다.
[얼음 여왕의 왕관]
[상급 아드리안 주문서(빙결)]
[푹신한 선물 주머니]
… …
아이템 목록을 쭉 훑던 우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
“꼭 누구한테 주라고 하는 듯한 아이템들이네.”
아이템 정보들을 얼핏 봤지만, 나와 강주연 둘 다 써먹을 만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그런 경우 보통 협회에 팔거나, 경매장에 올리는 게 정석.
하지만 나도 강주연도, 그런 자본적인 요소에 구애받지 않는 홀더들이었다.
아마 이 아이템들은 더 좋은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
“처리는 잠깐 보류해둘까?”
“…네 맘대로 해도 돼.”
“에이- 같이 잡았는데 굳이 왜. 잠깐 보관했다가, 나중에 같이 처리하자.”
“응.”
그렇게 보상 정리가 끝난 후.
우리는 얼음 호수 앞에 놓인 의자에 각자 앉았다.
마침 의자도 두 개에, 호수와의 거리도 적당하다.
둘이서 앉아 경치를 구경하기에 딱 좋은 배열.
특히 그사이엔 데코레이션처럼 아이스 루돌프의 조각상이 놓여 있어, 마치 어딘가의 관광 명소라는 느낌이 물씬 났다.
아마 커플 홀더들이 이곳을 찾았다면, 다들 사진 찍고 난리가 났을 거다.
“…….”
“진짜 예쁘다….”
그런 쪽과 거리가 있는 우리는…
가만히 앉아 경치를 구경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여기에 있으니까, 진짜 화이트 크리스마스 같다. 주변에 눈이 쌓여 있어서.”
“…맞아.”
<얼음 정원>이 단순히 빙판길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공원의 느낌이었다면, 이곳 얼음 호수는 눈과 얼음이 조화롭게 섞인 절경이었다.
덕분에 눈이 내리지 않는 오늘.
주변이 온통 눈으로 가득 차…
아름다운,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를 보여주고 있었다.
“재현아.”
“어?”
그렇게 조용히 경치를 구경하던 중.
문득 날 부르는 강주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저번에… 내 룬 말했던 거 기억나?”
“룬? 아, 그 일본에서 새로 각성했다던?”
“응.”
“기억나지, 당연히. 에픽에서 전설급으로 각성했다며. 다시 한번 축하해. 주력룬이 재각성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주연이 네가 확실히 난 재능이긴 한가 보다.”
강주연의 주력룬은 원래 [꺼지지 않는 불꽃].
내가 몇 번이나 얻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에픽룬.
이제는 얻을 수 있게 됐지만, [엘리멘탈 마스터] 때문에 굳이 필요성이 사라진 룬.
그러나 불속성 마력룬 중에선…
여전히 최고로 꼽히는 룬.
원작에서도 강주연을 대표하던 룬이었고, 강주연이 B급을 넘어 A급까지 성장하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주력룬이었다.
그런 그녀의 룬이 새로이 각성하게 됐다는 사실은 당연히 경험한 적 없는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이젠 그런 사건이 일어나도 그러려니 했다.
내 행동으로 발생한 나비효과들이 워낙 많아서, 이젠 일일이 그걸 파악하는 게 더 피곤했다.
“이 룬… 재현이 네 덕분에 생긴 룬이야.”
“…예?”
하지만 이 말엔 또 한 번 놀라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각성 계기가 아예 나라고?
헛웃음도 안 나올 지경이다.
“그때 일본에서 빌런과 싸울 때… 재현이 네가 새로 각성한 힘에, 내 룬도 반응했어. 맹약의 레드 드래곤 카날레스가 다루던 힘이래. 왜인진 모르지만… 내 원래 룬에 그런 힘이 담겨있었나 봐.”
맹약의 레드 드래곤, 카날레스.
완전히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맹약’이라는 단어에서 짚이는 바가 있었다.
[잊혀진 용기사의 긍지].
오래전 용기사의 맹약을 담은 그 전설룬이, 또다시 다른 전승과 연관이 돼 있는 모양이었다.
“이 룬은 전반적으로 기존 룬보다 성능이 좋아졌는데… 특색 자체가 방어적으로 바뀌었어.”
“방어?”
“응. 그래서 방어 관련 스킬도 많아지고… 방어 용도로 마력을 쓸 때 힘이 더 강해져.”
[수호하는 영원의 불꽃]
굳이 안 밝혀도 된다고 말해줘도, 강주연은 그 룬의 이름을 말해줬다.
최고의 불속성 룬으로 꼽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의 파괴력에, 방어와 안정성이 더해진 룬.
당장 일본에서 경험했던 ‘호신화기’ 스킬과 오늘 그녀가 보여준 ‘광범위 융해’만 보더라도… 해당 룬의 강력함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각성이 아직 안 끝난 것 같아.”
“아직 안 끝났다고?”
“…응.”
대답하는 강주연의 목소리가 작다.
거기에 시선도 나와 마주치지 못하는 게…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말하려는 걸로 보였다.
몇 번을 입을 오물거리던 강주연은,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음… 네 룬으로 각성된 룬이라서… 아마 최종 각성도 네 힘이 필요한 것 같아….”
“아…! 그렇구나.”
곧장 이해가 된다.
맹약으로 묶여 있던 레드 드래곤의 힘.
그 진정한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선, 맹약자의 특별한 해금이 필요한 게 어쩌면 당연했다.
특히 이건 내 룬과도 관련이 있는 내용이기에, 어쩌면 각성 도중에 내 힘도 새로이 생겨날 수 있었다.
나는 괜히 들뜬 마음에, 그녀 쪽으로 다가가 물었다.
“뭔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도울게.”
“…으, 음.”
딱 달라붙은 그녀와 내 의자.
가까워진 우리의 거리.
하지만 강주연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돌린 채.
우물거리며 쉽게 말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이, 입을 맞춰야 해.”
강주연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나는 순간, 머리 회전이 멈춘 느낌이 들었다.
잘못 들었나?
“뭘 해야 한다고?”
“입… 맞춤. 맹약을 맺은 용기사와 입을 맞추면… 룬에 봉인된 능력이 해금 돼….”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고개를 푹 숙이는 강주연.
…이거 진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