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4 -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9)
부우웅-!
문가은과의 특별했던 사냥 데이트.
그리고 점심을 먹고 돌아가는 길.
진동음이 핸드폰을 자꾸만 울려댔다.
이름을 확인하니, 어김없이 문가은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몇 번째 톡이야, 이게.”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는데, 벌써 다섯 번째 톡이 울리고 있다.
[가은이] 어쨌든 내가 첫 번째인 거야!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
[나] 알았다니까 ㅋㅋ
[가은이] 힛.. 벌써 보고싶다아
“귀엽네, 진짜.”
그동안 이걸 어떻게 참고 지냈을까.
지금까지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문가은은 털털하고 장난치는 걸 좋아하지만, 부끄럽고 민망한 것에 대해선 면역력이 약하다.
당장 내가 가짜 남자친구 역할을 했을 때만 봐도 그렇다.
손만 잡는 데에도 깜짝 놀라며 부끄러운 얼굴을 하곤 했으니… 아마 물어보진 않았어도 연애 경험이 제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근데 이젠 나보다 더해.”
그랬던 그녀가 이젠 표현하는 데에 막힘이 없었다.
좋아하는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계속해서 내 마음을 확인하려 했다.
몇 번이나 그녀를 놀렸던 내가, 이젠 역으로 놀림당할 기세다.
이래서 늦게 배운 감정이 무섭다는 걸까.
긍정적으로 변한 그녀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귀여웠다.
우우웅-!!
그렇게 핸드폰을 보던 중.
또다시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이번엔 문가은이 아니었다.
[채은이] 어디쯤이야?
크리스마스의 마지막.
저녁 약속을 함께 하기로 한 김채은이었다.
매번 딱딱하게 ‘김채은’이라고 저장되어 있던 이름도 이젠 바뀌었다.
그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내게 호감을 지니고 다가와 준 여자들.
그녀들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을 나도 인정하게 되면서…
스스로 모른 척하고 피해왔던 것들을 차근차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들의 이름을 더 정감 있게 저장한 건, 그런 변화의 시작점이었다.
나는 주변을 잠시 둘러보곤 김채은에게 답장했다.
[나] 집 근처 거의 다 왔어. 근데 우리 안 나가? 홍대 쪽 가기로 하지 않았었어?
저번에 크리스마스 저녁 약속을 잡을 때.
김채은은 홍대에서 보자는 말을 했었다.
전부터 꼭 가고 싶은 디저트 카페가 있다면서,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일찍 가자는 말도 덧붙였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일단 문가은과의 약속이 끝나면, 그냥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전했다.
“뭐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군말 없이 그녀를 따라주기로 했다.
어쨌든 처음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제안한 게 김채은이기에, 최대한 그녀가 하자는대로 맞춰주고 싶었다.
그건 그동안 내 던전 공략과 전투, 써클, 그 외 다양한 계획에 마찬가지로 군말 없이 따라준 게 고마워서이기도 했다.
부우웅-!!
그리고 마침 그 의문을 해결해 줄 답장이 왔다.
[채은이] 오늘 우리집에서 파티할 거야.
[나] 너희 집에서?
[채은이] 응응.
[나] 김명현 교수님 집에 안 계셔?
[채은이] 아빠 요즘 엄청 바빠. 크리스마스에도 일해야 하나 봐.
스승님에 대한 소식은 얼핏 들었었다.
원래도 뛰어난 검술 실력과 알찬 수업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명현 교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서 더 많은 이들의 인정과 찬사를 받게 됐다.
아카데미 내에선 전보다 훨씬 더 위상이 올라갔고, 홀더 계에서도 더 존경받는 홀더로 자리 잡았다.
친분이 있던 탁원호 교수가 신난 건 덤이었다.
아카데미 운영의 실권을 잡은 그의 입장에선, 일 분담에 대외적 제한이 없어진 게 기쁠 수밖에.
듣기로는 다음 학기부터, 아카데미 전사 계열의 계열장을 맡게 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지금의 그라면, 휴일에 상관없이 바쁜 게 이해가 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답문을 보냈다.
[나] 그럼 저녁은? 뭐 좀 사 갈까?
하지만 그 질문엔…
설마 했던 절망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김채은] 아니? 오늘은 내가 다 준비했어. 편하게 와.
“…아.”
이번엔 진짜 올 게 왔구나.
오늘은 내가 다 준비했다.
즉, 직접 요리를 했다는 뜻이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머리가 어지럽다.
문득, 크리스마스에 바쁜 스승님이 원망스러워졌다.
* * *
잠깐 내 집에 들러,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나는 김채은의 집에 와 있었다.
그리고….
김채은은 단단히 삐진 채,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에이, 왜 또 말을 그렇게 할까. 혹시나 해서 그랬지, 혹시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걸 느낀다.
전에도 몇 번 경험했던 상황이지만, 겪을 때마다 난감하기 그지없다.
그녀가 삐진 이유는 간단했다.
김채은이 음식을 만들었다!
그 충격적인 이야기에 불안한 기색을 잔뜩 내비치며 집에 들어왔는데…
앞에서 서프라이즈를 준비 중이던 김채은에게, 그 표정을 그대로 들켜 버렸다.
그녀 입장에선 서운함이 극도로 차 오를 만한 일이었다.
‘심지어 직접 요리한 것도 아니었어….’
다 준비해놨다길래, 여느 때처럼 직접 음식을 만든 건 줄 알았는데 그게 또 아니었다.
김채은은 ‘홈 파티 출장뷔페’를 통해 집에 음식들을 들여놨다.
정식 명칭은 <룬 푸드>라는 곳인데…
이들은 [요리] 룬을 보유한 홀더들이 모여 만든 업체로, 주로 고급 음식과 고가의 서비스만을 취급했다.
어지간한 요리사들 뺨치는 홀더들이 만드는 음식인 만큼, 일반적인 출장뷔페와는 차원이 다른 퀄리티를 자랑하곤 했다.
“이걸 언제 다 준비한 거야?”
“몰라.”
“…미안해애- 어떻게 하면 풀려 줄 거야.”
고개를 돌리고 말하던 김채은이, 그 말에 다시 내 쪽을 올려다봤다.
뭔가 기대감이 어린 듯한 눈빛이다.
“안아줘.”
“…안아달라고?”
“응.”
“너도 허그파였냐.”
허무한 결말에 웃음이 나온다.
물론, 문가은은 백허그를 좀 더 좋아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나는 김채은이 원하는 대로.
두 팔을 크게 벌려 그녀를 품에 안았다.
워낙 비율과 몸매가 좋은 탓에, 키가 작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드는 김채은이지만… 나보단 당연히 훨씬 작기에 품 안으로 가볍게 들어왔다.
그렇게 포옹이 하고 싶었던 걸까.
김채은이 마음껏 나를 안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살짝 민망하네.’
사실 김채은과 팔짱을 낀다거나 손을 잡는 등의 가벼운 스킨쉽은 해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서로를 앞에 두고 안아본 적은 처음이다.
그리고 몸매가 좋은 사람과 포옹을 하면, 필연적으로 닿게 되는 부분들이 있다.
그게 곧바로 느껴지니, 민망하면서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문가은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뭔가 알 수 없는 마귀에 씌인 기분이다.
“헤헤.”
포옹을 마친 김채은이 몸을 떨어뜨렸다.
특유의 웃음을 짓는 걸 보니, 기분이 다 풀리긴 한 모양이다.
“웃기는. 그래서, 이걸 언제 다 준비했는데?”
“오늘 아침부터! 아침 일-찍부터 준비했어.”
나는 살짝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럼 진짜 갑자기 계획 바꾼 거네? 홍대는 왜 안 가려고 한 거야?”
그 말에 김채은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 그, 그런 게 있어. 헤헤. 재현이 너도 이렇게 홈파티 하는 게 더 좋지 않아?”
“그렇긴 하지. 오늘 같은 날 밖에 나가면, 사람 너무 많으니까.”
크리스마스엔 정말 나가는 게 일이다.
당장 어제 강주연과 했던 데이트만 봐도 그렇다.
홀더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입구에 들어가는 것조차 불편했다.
아마 ‘아이스 루돌프’ 사냥으로 열린 이중 보스 룸이 아니었다면, <얼음 정원>의 그 많은 홀더들 사이에서 뭔가 즐기긴 힘들었을 것이다.
“와… 근데 진짜 잘 꾸몄다.”
나는 천천히 거실 안쪽을 둘러봤다.
테이블은 무려 3개나 있었다.
요리를 얹은 접시들과 와인, 과일, 디저트…
ㄷ자 형태로 구성된 테이블에, 각각의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베란다 쪽엔 커튼을 걷어내고 건 조명들과 풍선이, 그 옆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다른 한쪽 구석엔 웬 벽난로 같은 구조물도 보였다.
“저 벽난로는 뭐야? 불 진짜 나오는 건가?”
“응! 발화석 아이템으로 피우는 중이야.”
“와….”
진짜 본격적이구나.
[발화석]은 연금술 계열 홀더들이 제작하는 아이템 중 하나로, 마력석을 활용해 불을 피울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이었다.
홀더들에게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그걸 고작 분위기 내는 소품으로 썼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신경을 쓴 건지 느껴졌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요리들도 둘러보며 물었다.
“음식은 다 룬 푸드?”
“응. 와인은 직접 골랐어.”
“나 안 써봐서 모르는데, 룬 푸드 가격 좀 세지 않아? 일반인들은 비싸서 엄두도 못 낼 텐데.”
“난 일반인이 아니잖아. 큰맘 먹고 돈 좀 썼지이-.”
확실히 그렇다.
돈만 쓴 게 아니라, 정성까지 쏟은 게 느껴진다.
요리와 장식들은 각기 있어야 할 곳에 어우러져 있었고, 그 조화는 은은하고 조용한 크리스마스의 느낌을 완벽히 자아냈다.
그에 나는 연신 감탄하며 우리만의 작은 파티장을 구경했다.
아마 어딜 가도 쉽게 느끼지 못할 분위기.
김채은이 직접 만들어낸 홈 파티였다.
“고마워. 혼자 고생했네.”
김채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갑작스럽게 바꾼 일정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런 파티를 즐길 수 있게 해준 것도 그녀 덕분이다.
그 마음이 예쁘고 기특해서, 몇 번이고 더 칭찬해주고 싶었다.
김채은은 맑은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웃었다.
…올려다보는 게 꼭 말티즈 같네.
그리곤 이내 자연스럽게 내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헤헤. 밥부터 먹자. 배고프지?”
“응. 고기 먹고 싶어.”
“이쪽으로 오면… 어?”
문득 멈춰 선 김채은에게 물었다.
“왜 그래?”
그러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눈… 눈 온다.”
그녀의 말대로, 창밖엔 새하얀 눈송이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
어제 <얼음 정원> 보스 룸에서 봤던 이계의 눈이 아닌, 진짜 현실에서의 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반짝이는 조명과 따뜻한 벽난로.
그 분위기에 맞게 떨어지는 새하얀 눈.
꼭 누군가의 소원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은…
아름다운,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