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사기 룬을 얻었다 (195)화 (195/353)

Chapter 195 -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10)

김채은이 준비한 음식들엔 특이하게도 한식이 많았다.

중앙에 가지런하게 정돈된 버섯과 고기, 원형 그릇에 종류별로 놓인 나물, 알맞은 굽기로 익은 듯한 생선, 동치미와 같이 입맛을 다시는 반찬들까지….

얼핏 둘러봐도 익숙한 음식들.

그러나 그 수준은 확 높아진 고급 한식들이 눈에 띄었다.

특히 중앙에 놓인 꼬치 형태의 소고기는 나도 본 적이 있는 음식이다.

설하멱적.

고려 시대에 유행했던 음식 중 하나로, 적당한 굽기와 양념으로 특수조리를 하는 고기구이.

고급 한식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음식들이 테이블 곳곳에 놓여 있었다.

“양식이나 일식은 평소에도 워낙 많이 먹잖아. 그래서 한식으로 준비해 보면, 좀 특별하지 않을까- 해서.”

짧게 덧붙이는 김채은의 설명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뭔가 크리스마스엔 양식이지- 하는 고정관념도 깨는 것 같고.”

“그치, 그치?”

“응. 완전 잘 준비했는데.”

크리스마스엔 항상 레스토랑을 간다거나, 카페에 간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둘만의 공간에 간다거나.

늘 똑같은 레파토리였던 것 같은데…

‘한식으로 구성된 홈파티’라는 신선한 이벤트를 마주하니 꽤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가 한쪽 테이블에 시선이 닿았다.

아까 김채은이 직접 골랐다던 와인들이 놓여 있는 테이블이었다.

그걸 보며 난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와인이랑은 좀 안 어울리지 않아?”

한식이야 나도 워낙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준비된 술들이 이 음식들과 어울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것도 고정관념인가?’

생각해 보니, 고급 한정식집을 가면 와인을 함께 파는 곳도 있었던 것 같다.

뭐든 조화를 잘 이루는 한식의 특성상…

의외로 와인하고도 합이 잘 맞을지 몰랐다.

그런 혼자만의 생각에 잠깐 빠져 있던 중.

문득 김채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슬그머니 그쪽 테이블로 이동하더니, 이내 테이블 아래 천에 가려져 있던 물건 하나를 꺼냈다.

“어?”

그건 나도 아주 아주 잘 아는 물건이었다.

익숙한 크기와 형태의 유리병.

질리도록 봐왔던 초록색 비쥬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술…

소주였다.

김채은은 이슬이 담긴 소주병을, 자신의 볼에 가볍게 대며 말했다.

“헤헤. 그럴 줄 알고 이것도 준비했지롱-”

“진짜 제대로 준비했구나?”

그동안 친구들과 술을 마셔본 적은 있어도, 신기하게 소주를 마셔본 적은 없었다.

그건 워낙 어렸을 때부터 큰돈을 만지게 되는 홀더들의 특성상, 비싼 양주들을 먼저 찾게 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소주와 김채은의 조합이라니.

뭔가 언밸런스하면서도 잘 맞는다.

…사실 그냥 김채은이 예뻐서, 뭐든 잘 어울리게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양식이나 일식 먹고 싶으면 말해. 부엌에 있으니까.”

“…그걸 다 준비한 거야?”

“응. 네가 오늘 뭘 먹고 싶을지 모르니까, 혹시 몰라서 대비해놨지.”

이건 좀 감동인데.

나는 머쓱한 마음에 볼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

“뭔가 내가 미안해지네.”

“앗. 갑자기 바꾼 일정에, 내가 만나자고 한 약속이잖아. 당연한 거지.”

김채은이 웃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곤 앞에 놓여 있던 서로의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재현아.”

아.

뭐 하려고 하는지 예상되는데.

김채은이 자신의 잔을, 또 볼에 대며 기어코 그 대사를 쳤다.

“이거 마시면 우리…”

“그거 금지.”

“아. 아, 왜애애- 나 이거 해보고 싶었단 말이야.”

“푸흡-”

역시 평소 안 하던 상대에게 장난을 치면, 돌아오는 반응이 매우 효율적이다.

나는 입가에 웃음을 잔뜩 머금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억울한 표정을 짓는 김채은의 술잔에 짠- 하고 술잔을 부딪쳤다.

“올 한해 나랑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 채은아. 메리 크리스마스.”

쑥스럽지만,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네본다.

갑작스럽게 이곳 세계에 떨어지고 난 후.

가장 먼저 친해지고, 가장 많이 함께했던 김채은.

아마 그녀가 없었다면, 이 낯선 세계에 적응한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런 특별한 자리를 빌려,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진짜 치사해.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김채은은 샐쭉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이내 웃으며 술잔을 마주 부딪쳤다.

“나도 고마워, 재현아. 메리 크리스마스.”

* * *

밤이 깊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술자리도 깊어졌다.

처음 분위기는 평소처럼 단란했다.

김채은이 준비한 식사를 즐기고, 늘 나누던 대화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그 와중에 술을 한 잔씩 기울이고….

마침 어제 <얼음 정원>에서 얻게 됐던 아이템들이 대부분 ‘얼음 관련’이었던 터라, 그녀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었다.

특별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평범한 홈 파티였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홈 파티는 드링크 파티가 되어갔다.

처음엔 소주를 마시며 분위기를 냈던 우리는, 직접 산 술들이 아깝다는 명목 아래 양주도 까기 시작했다.

한 병, 두 병, 세 병…

그 많은 술을 모두 마시진 못했지만, 종류별로 개장하며 다양하게도 마셨다.

그리고 도수 높은 술이 들어가면, 취하게 되는 건 당연지사.

간혹 마력 활용이 뛰어난 홀더들은 체내 알코올을 중화할 수 있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의 김채은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재현아, 나 졸려어.”

그 말 때문에, 장소도 벌써 김채은의 방으로 바뀌었다.

대략 10분 정도 침대에 누워있던 김채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며 또 이야기꽃을 피웠다.

…주로 주제는 내 이야기였다.

“ … … 내가 그래서어- 거기서 딱! 네가 나타났을 때 헙, 하고 놀란 거지. 헤헤. 그때 재현이 완전 멋있었는데. 이거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알지, 알지. 벌써 네 번째 하는 이야기야, 채은아.”

“앗. 그랬나? 헤헤.”

오늘 취하고 싶어서 작정했구나.

김채은이라면 분명 마력으로 알코올 중화가 가능할 텐데, 그런 낌새조차 보이질 않고 있으니….

“짠-?”

…문제는 그런 김채은이 꽤 귀엽다는 거다.

술에 취한 김채은은 빠져들 것 같은 매력을 보여줬다.

당장 나도 뭔가 홀리듯이 그녀와 술잔을 부딪치고 있으니, 말 다 한 셈이지.

게다가 많이 취하긴 했어도, 실수라고 부를 만한 특별한 주사가 없어 분위기가 망가지지 않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짠.”

“짜안- 헤헤.”

쉬라즈의 떫고 쌉싸름한 맛이 목을 넘어간다.

유독 과일 향이 진한 레드와인이라 그런지, 떫은맛 안에서도 달콤한 풍미가 느껴졌다.

김채은은 오늘 사 온 와인 중에서도 이게 제일 마음에 든 모양이다.

“뜨아아- 또 졸려어어.”

김채은이 잔을 테이블에 놓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지금 우리가 자리한 구조는 매우 특이했다.

음식과 와인들이 놓인 테이블을 김채은의 방안으로 들여놓고, 침대와 최대한 가까이에 놓았다.

그리고 침대를 의자 삼아 걸터앉은 채, 술을 마시는 중이다.

마시다가 편하게 눕고 싶다는 김채은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걸 바라보던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면 되잖아. 벌써 시간도 많이 지났어.”

“앗-”

그런데 그 말에 김채은이 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시계를 잠깐 보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날 바라봤다.

“자기 시른데에- 재현이랑 더 마시고 싶은데에….”

…이게 도대체 여우야 곰이야.

갑자기 심장이 막 아플 것 같은 기분인데.

내가 알던 김채은이 맞나 싶을 정도의 끼 부림이다.

나는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는 거야?”

“치. 나도 애들한테 다 들었거든? 재현이 너도 내 맘 누구보다 잘 알면서.”

사실 예견된 일이었다.

강주연과 문가은.

두 사람과 사귀게 됐는데, 그보다 더 깊은 교류를 나눴던 김채은과 친구로만 남을 리는 없었다.

아마 김채은은 꽤 전부터 날 좋아했었고, 나 역시 그녀를 좋아했다.

어쩌면 그 사실을 서로 눈치챘기에…

더 조심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스스슥-

문득 김채은이 몸을 움직여, 침대에 걸친 내 허벅지 위에 앉았다.

‘…….’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옷과 옷이 부딪혔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그대로 느껴졌고…

두 팔로는 내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약간은 촉촉해진 눈망울로 날 바라봤다.

“좋아해.”

“…아.”

때론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음에도, 그 말을 들으면 놀라게 될 때가 있다.

지금의 내가 그랬다.

“좋아해, 재현아.”

김채은의 수줍지만, 진심 어린 그 고백을 들었을 때.

나는 마치 숨이 멎은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지금의 그녀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예뻤다.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해서… 여기까지 오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나 봐.”

김채은이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게 다가온다.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그녀의 표현도 더 가까워졌다.

“그만큼… 늦은 만큼, 모든 걸 다 너한테 쏟고 싶어. 다… 다 주고 싶어.”

너도.

너도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어.

그 작은 말이 귓가에 속삭여진다.

나도 좋아한다고, 너만큼이나 오래 기다려왔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자신의 표현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채은이 내게 걸터앉은 그대로 입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쉬라즈의 달콤한 향이, 그녀와의 키스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탁-

침대와 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김채은과 입을 맞추던 자세 그대로 침대에 누워졌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입을 떼고, 숨을 몰아쉬는 김채은을 봤다.

“나도 좋아해, 채은아.”

순간 동그래지는 그녀의 눈이 보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던 건지, 어떤 마음으로 다가온 건지… 나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이 절대 쉽지 않았을 거란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아껴주고 싶었다.

그래서 더 소중하게 안고 싶었다.

그걸 위한 준비는 얼마나 더 오래 걸려도 부족하지 않았다.

나는 김채은이 놀라지 않게,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그녀에게 다시 키스했다.

창밖에 내리는 눈과 함께…

더욱 깊어지는 크리스마스의 밤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