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9 - 용의 숨결이 닿는 강 (3)
우우우우-!!
커다란 규모의 강을 모두 덮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거북이.
워낙 육중한 몸을 지닌 탓에 얼핏 보면 고래처럼 보이기도 하고, 등껍질을 둘러싼 나무들 때문에 하나의 ‘섬’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을 아스피도켈론이라고 소개한 이 거북이는, 매우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되는데.’
녀석이 내뱉은 말부터가 그렇다.
위대한 존재의 맹약자, 안전하게 이동시켜드린다…
왠지 모르게 날 기다려왔다는 듯한 말투와 눈빛이다.
꼭 내가 뭔가 해결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 대해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스릉-
난데없는 괴수의 등장에, 스승님께서 무기를 꺼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제가 오해했나 봐요. 재현, 여기서 잠깐 기다…”
“자, 잠시만요, 스승님!”
나는 다급히 스승님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암살자 계열인 그녀의 특성상, 어지간한 괴수들은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처치된다.
아마 3초만 늦었으면…
저 거북이는 벌써 사체가 돼서 강에 둥둥 떠다녔을 거다.
스승님은 내 만류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러나요?”
“아무래도 제 룬과 관련이 있는 괴수 같아서요. 제가 맡아볼게요.”
“재현의 룬이요?”
“네. 잠시만요.”
나는 천천히 아스피도켈론을 향해 다가갔다.
녀석은 어느새 육지 근처까지 몸을 움직인 상태였고,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익숙한 정보창들이 날 반겼다.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고대 환수가 마력을 뿜어냅니다. 위대한 존재에게 몸을 의탁한 아스피도켈론은, 특수 상황에 의해 자유의 몸이 된 상태입니다. 충성도는 여전하지만, 조건을 만족한다면 그와 계약을 맺을 수도 있습니다.]
[‘용언이 맺은 약속’ 룬과 ‘잊혀진 용기사의 긍지’ 룬이 고대 환수와 감응합니다. 숨겨진 특수 조건을 모두 만족해, ‘아스피도켈론’과의 계약이 가능해집니다. 이 계약은 통솔 수치와 룬 레벨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두 개의 전설룬이 또다시 특수 상황과 직면하며 감응했다.
일전에 본드와 계약 파기 및 재계약을 할 때 나타났던 정보창.
그와 비슷한 형태의 정보창이었다.
이에 나는 고민하지 않고 [계약의 손길] 스킬을 사용했다.
그 이유는 이 괴수가 원래 내 능력으로는 계약할 수 없는 수준 높은 계약자라는 점, 그리고 계약 성사가 돼야 녀석과의 의사소통이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언어] 룬으로 괴수들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녀석들의 말을 똑같이 뱉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계약에 성공합니다! ‘용언이 맺은 약속’ 룬의 계약 대상 목록에, ‘아스피도켈론(물/특수)’이 추가됩니다. 비정상적인 계약으로, 계약자의 능력이 일부분 제한됩니다.]
[현재 계약 괴수 목록(2/3)]
[고대의 지고한 존재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놀라운 계약 결과는 때때로 룬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를 급격히 상승시킵니다.]
[‘용언이 맺은 약속’ 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룬의 성향으로 통솔을 4 획득합니다.]
계약이 성사됐음을 알리는 정보창들이 잇따라 나오고, 이내 눈부신 빛이 나와 아스피도켈론을 감싸기 시작했다.
서로가 계약 관계로 연결됐음을 알려주는 신호.
그를 방증하듯, 아스피도켈론은 기다란 고개를 내밀며 내게 조아리는 자세를 취했다.
-신, 아스피도켈론. 위대한 존재의 맹약자께 다시 인사드립니다.
그 말에 나는 되물었다.
‘혹시 맹약자가 용기사를 말하는 거야?’
-인간들에게 주로 알려진 이름은 그렇습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내가 던전의 버프를 받고, 처음 보는 고대 괴수와 단번에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내가 가진 두 개의 전설 룬이 용과 관련된 룬들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어 궁금했던 점들을 연달아 물었다.
‘그럼 여긴 용… 아니, 위대한 존재가 사는 곳이야?’
-아닙니다. 이곳은 위대한 존재의 옛 수하들이 사는 터전입니다.
‘수하들의 터전….’
-그렇습니다. 위대한 존재의 영역은 이 터전의 끝자락, 강과 뭍의 경계로부터 갈 수 있습니다. 저는 위대한 존재의 손님들을, 그곳의 숨겨진 워프 게이트까지 수송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제야 처음 이 녀석이 했던 말이 이해가 갔다.
위대한 존재에게 안전하게 이동시켜드리겠다.
즉, 일반적인 던전 공략 경로를 무시하고, 단번에 던전 끝자락까지 수송해주겠다는 뜻이었다.
다만 그 장소는 보스 룸이 아닌, 이중 던전.
스승님께서 추론한 대로, 그녀가 찾은 이중 던전이 정말 ‘용과 관련된 던전’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잠깐 녀석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쯤.
우리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스승님이 내게 다가왔다.
“계약…한 건가요? 저 괴수와?”
스승님은 S급 홀더다.
최연소긴 해도, 그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을 S급 홀더.
때문에 단 몇 초 간에 이뤄진 현상만으로도, 그녀는 우리의 관계를 단번에 눈치챘다.
다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통 [조련 계약]이라고 하면 해당 괴수가 ‘마력 고갈’과 ‘쇠약’ 상태를 통해 빈사상태가 돼야 진행이 가능한데…
나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계약을 마쳐 버렸다.
심지어 그 대상이 스승님께서 이미 본 적 있는, ‘후공형 괴수’라고 알고 있던 고대 괴수.
마력의 깊이와 거대한 크기만 봐도 최소 A급 이상.
그런 녀석을 마치 친구 사귀듯 계약에 성공했으니, 그녀의 상식에선 이해가 안 갈 만도 했다.
“네. 저희를 아래까지 데려다 준다고 하네요.”
“아래라면… 보스 룸 말인가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스승님께서 찾은 이중 던전을 말하는 것 같아요.”
“……!”
스승님의 표정이 또 한 번 놀라움으로 가득 찬다.
<용의 숨결이 닿는 강>.
그녀는 이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최고 수준의 파티를 꾸렸었고, 고위 괴수들을 모두 처치해가며 공략을 마쳤었다.
그 성과 중 하나로 얻은 게 바로, 이번의 이중 던전.
그런데 그녀만이 찾았다고 생각했던 그 던전에, 사실 정식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모두가 후공형 괴수 혹은 던전 내 이스터에그와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거대 거북이, 아스피도켈론이었다.
‘저기 그… 아스피도켈론?’
-계약자께선 조금 더 편하게 부르셔도 좋습니다.
그런 대답이 돌아오자, 나는 살짝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럼 좀 기니까, 줄여서 아스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영광입니다.
[계약자에게 ‘아스’라는 이름을 선사했습니다. 이제 이 이름은 당신과 계약자의 계약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다리가 되어줄 것입니다.]
[대화와 소통을 통해, 서로가 만족할 이름을 정했습니다. 계약자 ‘아스’의 친밀도가 살짝 상승하고, 일부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나이스.
이번엔 제대로 먹혔다.
역시 위대한 존재를 섬기던 고대 괴수.
온몸이 뼈로 이루어진 어느 성격 나쁜 괴수하곤 포용력이 달랐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아까 하던 질문을 이어 했다.
‘아스. 여기 옆에 있는 여자 분도 함께 그 영역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혹시 방법이 있을까? 이분은 승마와 관련된 룬이 없어서.’
나는 계약자이기에, 특별히 관련 룬이 없어도 계약 괴수에 탑승이 가능하다.
하지만 스승님은 별개다.
전에 문가은이 내 본드에 탈 때 [승마] 룬을 보유하고 있던 것처럼, 관련 룬이 있어야 괴수를 타고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내 말에 아스가 기다란 고개를 돌려 잠시 스승님을 봤다.
그리곤 다시 날 보며 말했다.
-저 분 역시 위대한 존재의 손님입니다. 위대한 맹약의 증표를 들고 계시는 군요. 또한, 제게는 수송과 관련된 룬이 있기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분 모두, 안전하게 이동시켜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 듣자, 난 고개를 돌려 스승님을 봤다.
“저희 둘 다 타서 이동할 수 있다네요.”
“그게 정말…인가요?”
“네. 수송 관련 룬이 있다고 해서, 승마 룬이 없어도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수송 룬….”
“스승님도 보셨다시피, 이 녀석 움직이는 속도가 엄청 빨라서… 아마 타고 가면 금방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내 말에 스승님이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이미 공략이 끝난 던전이기에 스승님을 따르면 깔끔하게 움직일 수 있긴 하지만…
사실 갈 수만 있다면, 정석 공략 경로를 무시하고 바로 이동하는 게 더 좋긴 하다.
던전 내 괴수를 상대한다는 건, 난이도가 어떻든 피로가 쌓이는 일.
포션을 많이 챙겨왔어도 쉽게 지칠 수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이 던전이 아닌, 끝자락의 이중 던전.
동선을 최소화한다면 당연히 이득이었다.
‘새로운 괴수들하고 못 싸워보는 게 아깝긴 한데.’
그거야 나중에 스승님께 말해, 언제든 다시 이 던전에 오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난 보유 룬도 49개라서, 새로 룬을 획득하기도 힘들었다.
파밧- 팟-
탁! 타닥!
빠르게 결정을 마친 우리는 곧바로 몸을 움직여, 아스의 등껍질까지 도약했다.
멀리서 보기엔 거대한 숲처럼 보이던 녀석의 등껍질.
실제로 가까이 와 보니, 정말 등껍질 위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신기해요. 여긴 정말 섬 같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거대 거북이의 특이한 등껍질에 우리가 감탄하고 있을 무렵.
아스는 이동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내게 말했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손잡이를 꽉 잡으십시오.
…손잡이가 어딘데?
그걸 물어볼 틈도 없었다.
아스피도켈론은 준비를 마친 후, 이내 엄청난 속도를 내며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