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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사기 룬을 얻었다 (203)화 (203/353)

Chapter 203 - 두 중년과 연무장

서울의 한 연무장.

<프라임 연무장>이라는 이름으로 영업 중인 이곳은, 동작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사립 연무장이다.

시설도 매우 깔끔하고 사설 교관들도 준비되어 있는 곳이라, 학생 홀더들은 이곳을 일종의 학원처럼 여기며 자주 찾곤 했다.

서울 홀더 아카데미 소속 전임 교수.

이제는 전사 계열의 계열장까지 맡게 된 교수, 김명현 역시 소싯적에 이곳을 자주 찾았었다.

약간의 치기와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던 젊은 날.

이곳에서 검을 연마하고, 끊임없이 수련하며 실력을 키웠었다.

특히 자신만의 검법인 [유수검법]을 만들어내고, 친우인 탁원호의 [파상검법]과 견주며 대련을 하곤 했던 날들.

다시 생각해 봐도, 그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가정을 갖게 되고, 아빠가 되면서 많은 게 달라졌지만…

그때의 열정만큼은.

아직 잊지 않고 있는 김명현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옆에서 검을 닦고 있던 탁원호가 물었다.

김명현은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 옛날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 생각?”

“예. 탁 교수와 이 연무장에서 검법을 만들던 날 말이죠.”

[파상검법]과 [유수검법]을 만들던 그때의 기억.

그야말로 오래된, 젊은 날의 흔적이었다.

그 말에 탁원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지쳤었나? 웬일로 감상에 젖었군.”

김명현 교수.

그는 최근의 아카데미에서, 누가 뭐래도 가장 바쁘던 교수였다.

‘빌런 소탕 작전’의 총괄을 맡아 책임자 역할을 했던 그는, 작전이 끝난 후에도 쉴 수 없었다.

워낙 규모가 큰 작전이었기에 보고서 작성을 거의 논문 수준으로 마쳤었고, 정부 및 협회에서 진행한 관련 세부 조사에도 시간을 들여 협조했었다.

사건이 있었던 지 두 달이 넘게 지났는데도, 새해가 다가온 지금까지 조사에 임했었다.

그만큼 <빌런> 클랜이 그간 국내에 끼친 영향력, 또 이를 무너뜨린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줬다.

특히 최근엔 전사 계열 각 교수들과 탁원호의 강력한 추천으로 아카데미 전사 계열장으로 취임하면서…

바쁜 일정에 직함 하나가 더 얹어진 그였다.

“그러는 탁 교수는 훨씬 더 바빴지 않습니까.”

탁원호는 한 술 더 떴다.

그는 이번 사건을 통해 명실상부 아카데미 운영진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작전동안 다른 탁씨 가문 후계자들의 무능이 드러나고, 심지어 개중엔 <빌런>과 간접적으로 내통한 후계자도 있음이 밝혀지면서…

후계자들이 알아서, 모조리 나가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탁원호는 재단 이사장 탁윤재가 인정하는, 그리고 외부에서도 모두 수긍하는 아카데미 운영진의 중심축이 되었다.

가문을 잇는 데에 있어선 시기상조지만, 최소한 아카데미에서만큼은 권력을 모두 잡은 그였다.

그로 인해 서울 홀더 아카데미는 드디어 변혁의 길을 걷고 있고, 덕분에 탁원호는 최근 쉴 새 없이 바빴었다.

“흠흠. 그래도 이렇게나마 쉴 수 있어 다행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방학 때도 꼼짝없이 아카데미에 묶여 있을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아카데미 일들을 모두 마무리하고, 연초가 돼서야 휴식기를 가지게 됐다.

그 휴식의 장소는 연무장.

탁원호와 김명현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며 대화하는 걸 좋아했다.

근황을 얘기할 때도 몸을 움직이고, 잡담을 할 때도 손이 쉬지 않았다.

쉴 때도 수련을 하면서 쉬자!

그건 아주 오래전.

두 사람이 자신들만의 검법을 만들 때부터 생긴 일종의 루틴이자 슬로건이었다.

이들이 얼마나 검에 미쳐 있는 사람들인지를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그 자는 찾았습니까?”

그렇게 연무장에서 준비를 마치고, 한창 서로의 검술을 펼치던 도중.

김명현이 문득 말을 꺼냈다.

그에 탁원호는 잠시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그 자.

돌려서 말하지만, 누굴 이야기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직.”

“…못 찾을 수도 있겠군요.”

“원래 그런 자였잖나. 지금도… 예전에도.”

그 자의 이름은 황성연.

‘광화문 집단 살인 사건’을 일으킨 최악의 범죄자이자, 최근 아카데미를 습격한 <빌런> 클랜의 부마스터였다.

“…….”

황성연은…

김명현과 탁원호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건 단순히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는 아득해진 과거.

20년도 더 된 시간의 흔적 속…

함께 검을 쥐고 수학했던 네 명의 청년들.

황성연은 그 추억 속 멤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한 명은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모험을 떠났고, 다른 한 명인 황성연은 범죄자가 되어 버렸지만….

그때 그들이 함께 검을 공부했다는 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

뭔가 덧붙이려던 김명현이…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삼켰다.

슥- 스슥-

그리곤 조용히 다시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탁원호도 조용히 그를 따라 검을 휘둘렀다.

한동안, 꽤 오래.

침묵 속에 검만이 움직였다.

“이번 전사 계열 신입생에, 재밌는 친구가 하나 들어올 것 같더군.”

그러던 중.

탁원호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그 주제는 김명현도 아는 내용이었다.

“송도혁 홀더의 동생 말입니까?”

“음. 송현아. 아니, 이젠 송현아 홀더라고 불러야겠지.”

국내 양대산맥의 검술명가인 송씨 가문의 직계 후계자.

<용광검로> 클랜 마스터, 송도혁의 여동생.

송현아가 서울 홀더 아카데미의 신입생으로 입학한다는 것.

바로 오늘 떴던 추측성 기사였는데, 벌써부터 홀더계 전반에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었다.

김명현은 그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몇 달 전까지 일반인 아니었습니까?”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새 각성을 한 모양이야. 듣기로는 용광검로 클랜에서 곧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는데, 무슨 내용일지 궁금하더군.”

“오호….”

슥- 스슥-

이번엔 김명현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곧게 움직이며 파괴력을 선보이던 탁원호의 검법과는 정반대의 움직임이었다.

“어쨌든 송현아 홀더가 들어오면, 넌 또 바빠지겠군. 불의 심판과 로열에 이어, 이번엔 용광검로의 금지옥엽이, 그것도 전사 계열에 들어왔으니… 애 좀 먹겠어.”

뚝-.

하지만 그 말엔.

검을 휘두르던 김명현의 움직임이 자연스레 멈췄다.

그리고 이내 어이없다는 듯, 탁원호를 보며 물었다.

“왜 저만 바빠집니까? 탁 교수는요.”

“난 도재현이 있는 2학년을 가르칠 거다.”

뻔뻔한 탁원호의 말에, 김명현의 표정이 억울함으로 물든다.

“아니, 그런 게 어딨습니까. 교수 된 이후로 항상 같은 학년 맡았잖습니까.”

“이젠 갈라질 때도 됐지. 그리고 제자 가는 길에 스승도 가야 하지 않겠나.”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그 속뜻을 김명현은 잘 알고 있었다.

이번 학기에 뭣 빠지게 일했으니, 다음 학기엔 도재현 가르치면서 재미 좀 보겠다.

그걸 돌려 말하고 있는 탁원호였다.

“그럼 저도 2학년 강의 맡겠습니다. 도재현 스승, 그거 제가 먼저 했습니다.”

“농담도 잘 하는군. 계열장 교수가 안 가르치면, 대체 누가 신입생을 가르치나?”

“이러려고 계열장 맡겼습니까?”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군.”

그때부터 김명현의 지적이 이어졌다.

바로 계열장 맡길 때부터 알아봤다, 이거 완전 운영진의 횡포 아니냐, 나도 2학년 가르치고 싶다, 역시 검술명가는 송씨 가문이다….

영양가 없는 말들이 이어지고, 탁원호는 웃으며 이를 무시했다.

유치하지만, 이게 두 중년의 친우가 치는 장난이었다.

부웅- 부웅!

슥- 스스스-

그렇게 가벼운 검술과 자유로운 대화가 나눠질 때쯤.

문득 김명현이 탁원호에게 물었다.

“탁 교수, 근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계열장 사퇴는 거절하지.”

“그런 거 아닙니다.”

그에 탁원호가 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뭔데 그러나.”

“제 딸내미 있잖습니까.”

“김채은?”

“예.”

김명현이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요즘 들어 딸이 자꾸 웃습니다.”

“웃는다고?”

“예. 밥 먹을 때도 그렇고, 집에서 쉴 때도 그렇고. 심지어 최근엔 제가 여유가 생겨, 가벼운 호신술로 검을 가르치는데… 검을 휘두르다가도 막 웃습니다.”

“…….”

김명현은 원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밖에 잘 하지 않는다.

이젠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을, 정말 끔찍이도 아끼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친구, 탁원호이기에 이런 말도 꺼낼 수 있었다.

김명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자기 방을 들어갈 땐 이게 더 심합니다.”

“…방?”

“예. 부끄러운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방에 들어가기 전엔 자꾸 그런 표정을 짓고, 들어갔다 나오면 자꾸 웃습니다.”

“…….”

“왜 이러는 걸까요? 뭔가 짚이는 게 있습니까? 탁 교수도 홀더는 아니지만, 일반인 딸이 있잖아요”

김명현의 그 질문에, 탁원호는 순간 멈칫했다.

짚이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연말의 아카데미.

일거리에 파묻혀 있을 무렵…

잠깐 바람을 쐬러 근처 거리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탁원호는 김채은을 봤었다.

정확히는, 도재현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는 김채은을.

‘…….’

두 사람 모두 마스크와 후드를 썼지만, 그들을 오래 봐온 탁원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명은 오랜 친구의 하나뿐인 딸에, 한 명은 자신의 유일한 제자인데…

사실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그래서 탁원호는 두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로 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김채은의 새 행동들은 아마 그런 연인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그리고 딸을 끔찍이 아끼는 김명현이 이를 알게 되면…

어쩐지 그 조용한 성격이, 파도처럼 돌변할 것만 같았다.

비록 자신이 파상을 다루는 검법을 쓰긴 하지만, 너무도 거친 파도는 피해가는 게 상책이었다.

“…탁 교수, 뭔가 아는 눈친데요?”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군.”

“20년도 넘은 친구 눈을 속이려 합니까? 아는 걸 말해보십쇼.”

“수련이나 더 해야겠군. 요즘 일만 해서 그런가, 제자한테 따라잡힐 기세야.”

탁원호는 이를 악물고 모른 체하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비밀이 지켜지는.

평화로운 연무장 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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