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9 - 본가 (1)
심플하게 꾸며진 방 안.
김채은은 핸드폰을 꼭 쥔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기다리는 문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둘… 셋.”
부우웅-
딱 3초 만에 답장이 온다.
김채은은 손 안에 꼭 잡고 있던 핸드폰을 서둘러 확인했다.
[재현이] 나도 보고싶어. 아침은 먹었어?
“헤헤.”
그걸 보자마자, 김채은은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
이름만 봐도 설레는데, 답장 내용을 보면 더 행복해진다.
한때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남자.
이제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딱 하나 뿐인 남자친구.
도재현과의 아침 문자였다.
[나] 응응. 먹었어요. 재현이는?
[재현이] 나도 먹었지. 나 지금 연무장이야.
[나] 아침부터?
[재현이] 엉. 요즘 연습할 게 좀 많아서.
“부지런해애-.”
김채은이 또 한 번 헤실헤실 웃었다.
사실 뭘 하고 있었어도 칭찬했을 그녀였지만, 도재현의 성실함은 이미 홀더 계에도 잘 알려져 있다.
역대급으로 손꼽히는 재능과 그에 안주하지 않는 노력.
꾸준한 훈련과 끊임없는 연습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건, 영웅 만들기 좋아하는 기자들이 진작부터 전해왔던 이야기였다.
“인기가 너무 많아도 문제라니까.”
김채은은 자신의 남자친구를 떠올렸다.
현 홀더 계에 떠오른 최고의 인기 홀더.
이를 뽑으라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도재현이다.
국내 3대 클랜을 비롯해 수많은 클랜들이 벌써부터 그의 영입을 원하고, 협회나 아카데미에서도 러브콜을 보낸다.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은 매일처럼 쉬지 않고 들어왔다.
단체들은 그와의 프로젝트를 원하고, 개인은 그와의 친분을 원하곤 했다.
“일반인들도 좋아하는 것 같고.”
잘 생긴 외모 때문인지, 도재현은 일반인에게도 관심도가 높았다.
포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관련 기사가 수백 개가 나오고, 어디서 찍었는지 모를 사진들도 넷상을 떠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꽤 많은 회원수를 기록하는, ‘도재현의 팬클럽’도 생겨나 있었다.
“헷. 나도 가입해있지.”
김채은은 당연히 가입해 있었다.
등급은 무려 최우수회원.
다른 이들은 쉽게 구할 수 없는 도재현의 레어 사진들을 몇 개 풀며, 단숨에 등급 업이 돼 버렸다.
팬클럽 내에 최우수회원은 회장을 포함해 총 5명뿐이라는데, 단기간에 정예 멤버 안에 들어간 그녀였다.
어쨌든 도재현은 이렇듯 홀더들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요즘 데이트할 때 자꾸 변장을 하는 이유였다.
“대단해-.”
곱씹어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남자친구다.
국내 최대 유망주로 평가받으며 그 잠재력을 인정받았고, 실제로 현역 홀더들 사이에선 이미 순위권에 들어갈 만한 압도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
<안티 빌런>이라는 써클을 직접 운영할 땐 단단한 리더쉽을 보여줬고, <빌런> 소탕 작전에선 홀로 괴수들을 막아내며 영웅적인 면모까지 보여줬다.
이 정도면 사실, 인기가 없는 게 더 어려운 행보긴 했다.
“그리고… 그, 그것도 잘… 꺄아-”
그의 행적을 되짚으며 혼잣말을 하던 김채은이…
순간 부끄러운 듯.
베개에 자신의 얼굴을 거침없이 파묻었다.
도재현에겐,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장점이 하나 더 있었다.
…벌써 한 달이 다 돼 가는 일.
하지만 김채은은 그날의 기억을 단 하루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눈이 오던 크리스마스의 달콤했던 기억.
부끄럽지만, 또 아름다웠던 둘만의 교류.
막상 그땐 정신이 없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고 나니 실감이 됐었다.
그 날 함께 보냈던 밤이 열렬했다는 게.
그리고, 그걸로 정말 그의 여자가 됐다는 게.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
아직 강주연과 문가은에게도 부끄러워 말하지 못한…
김채은 홀로 간직한 비밀이었다.
“채은아, 슬슬 준비하렴. 가자.”
“느, 네, 넷?!”
똑똑- 하는 노크와 함께 들리는 아빠의 목소리.
그에 김채은은 깜짝 놀라 답했다.
민망한 상상이 그대로 허공에 흐트러진다.
마치 뭔가 몰래 훔쳐보다 걸리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하하. 뭘 그렇게 놀라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금방 갈게요!”
“그래. 아빤 거실에 있을게. 천천히 나와라.”
오늘은 아빠와 밖에 나가는 날.
이는 오랜만에 나가서 외식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것도 있지만, 그간 미뤄왔던 ‘검술 교육’을 위해 연무장을 가는 것이기도 했다.
빌런 안도권에게 죽을 뻔했던 날 이후.
김채은은 아빠에게 검을 가르쳐 달라고 했었다.
[유수검법] 정도의 고위 무공은 아니더라도, 호신술 정도로 검을 쓸 수 있도록…
근접전에 너무 약한, 마법사 계열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아쉽게도 그동안은 배울 시간이 없었다.
교수직에 이어 계열장까지 맡게 된 아빠는 매일매일이 바빴고, 김채은 역시 정식 스승이 된 정선영에게 마법을 배우느라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시간이 생겼다.
혼란스럽던 사건들이 끝이 났고, 방학도 시작됐다.
아빠도 자신도 모두 여유가 있었다.
게다가 최근 들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검] 룬의 획득 방법’.
송현아 홀더가 찾아냈다는 이 방법을, 김채은 또한 해보고 싶었다.
사실 이를 위해 연무장에 가는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아!”
문득 김채은이 손뼉을 쳤다.
천천히 오늘 일정을 생각하고 있자니, 순간 떠오른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문을 살짝 열며, 거실의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우리 오늘 어디로 가요?”
“연무장 말이니?”
“네.”
“프라임 연무장으로 가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리곤 다시 침대로 돌아와 핸드폰을 만진다.
작성하는 문자 내용은 뻔했다.
[나] 재현아, 지금 어디 연무장이야?
[재현이] 여기? 맨날 오는 데지, 뭐.
[나] 프라임?
[재현이] 응.
곧장 돌아온 답장에 김채은이 웃었다.
“헤헤. 됐다.”
운이 좋다.
오늘은 뭔가 되는 날이다.
아빠와 검술 공부를 하러 나가려 했는데, 우연치 않게 그곳에 재현이가 있다니.
가는 김에 그의 얼굴을 또 볼 수 있겠다.
아침부터 설렜던 기분에, 날개가 달린 느낌이었다.
“오늘 뭐 입지?”
김채은의 시선이 옷장과 거울로 향한다.
…사실 도복을 입어야 하긴 했다.
어쨌든 오늘 외출은 훈련이 목적이니까.
하지만 연무장에 가서 갈아입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보이는 모습을 예쁘게 꾸미고 싶었다.
“아, 맞다. 애들한테도 말해줘야지.”
화장대 앞에서 고민하던 김채은은, 문득 생각난 점에 핸드폰을 들었다.
김채은, 강주연, 문가은.
세 명의 여자들이 모인 단톡방.
서로의 일정과 계획을 겹치지 않게 공유하던 방인데…
어쩐지 셋의 동시 연애가 시작된 후 더 활성화됐다.
도재현을 만나게 되거나 각자 데이트 계획을 짤 때, 서로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톡방이었다.
오늘 김채은이 도재현을 만나는 건 원래 일정에 없던 일.
친구들에게도 이걸 알려줘야 했다.
[나] 나 오늘 재현이 만나!
[가은이] 엥? 어디서? 오늘 재현이 훈련한다던데.
마침 문가은이 톡을 읽고 있었는지, 곧장 답장이 왔다.
김채은은 배시시 웃으며 다시 답했다.
[나] 헤헤. 같은 연무장 갈 것 같아. 나도 오늘 아빠랑 훈련 가거든. 점심 같이 먹을 수도 있으니까, 다들 알아둬!
[가은이] 오케잉. 아라써-!!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걸까.
세 여자는 같은 남자를 좋아하며 만나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연애를 모두 응원해줬다.
처음 톡방이 만들어질 때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던, 매우 긍정적인 관계였다.
‘애들 만나면 그날 일도 알려줘야겠다.’
김채은은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모든 걸 공유하기로 했고, 또 자신이 이쪽 측면에선 선배이기도 하니까.
살짝 민망하긴 해도…
그녀는 친구들에게 그날 일을 알려주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조언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훈훈하게 핸드폰 화면을 끄려던 때.
부우웅-
다시 한번 톡방의 알림이 울렸다.
“뭐지?”
곧바로 알림을 확인했다.
[주연이] 나도 다음 주에, 재현이랑 계획 하나 있어.
아깐 답장이 없던 강주연이었다.
이제 톡을 보고, 마침 본 김에 자신의 일정도 공유하려는 모양이었다.
김채은은 가볍게 그에 대해 물었다.
[나] 뭔데?
[주연이] 나… 재현이 집 가보려고. 재현이랑 같이.
[나] 어? 진짜? 그럼 나랑 볼 수도 있겠다. 우리집은 바로 옆집이잖아.
그렇게 답장을 보낸 김채은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주연이가 재현이 집 와본 적 없었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된 지도 거의 한달이 돼 가는데…
혼자 사는 남자친구 집에 가본 적이 없는 걸까?
그것도 그 남자가, 요리를 매우 좋아하고 잘하는데?
이상할 것까진 없지만, 기억이 잘 안 나서 헷갈렸다.
그리고 그때.
잠시 망설이듯 답장이 없던 톡방에…
강주연이 다시 문자를 남겼다.
그건 정말.
김채은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폭탄발언이었다.
[주연이] 그게 아니라, 재현이 부모님 집… 같이 가기로 했어. 재현이가 방학에 한번 내려간대서..
“…네?”
김채은이 순간 눈을 비비적거렸다.
잘못 봤나?
어딜 간다고?
재현이의 부모님 집.
그러니까.
지금 시골에 살고 계신다는.
자신도 말로만 듣고 한 번도 뵌 적 없는.
…어머님과 아버님의 집?
“이, 이 불여우가…!”
얼음이 녹듯 몽글몽글하던 김채은의 마음이…
다시 한번 활활 불타올랐다.
요즘 들어 잠잠하게 있던 강주연.
그녀가 또 한 번, 쥐도 새도 모르게 부뚜막에 오르고 있었다.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제일 먼저 뵙는다니.
이건 진짜 반칙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