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1 - 선배님, 팬이에요 (2)
“아린아, 빨리. 빨리 가자니까.”
단발머리를 꽁지처럼 뒤로 묶은 여자가, 포니테일 머리를 한 여자의 팔을 붙잡으며 재촉했다.
묶음 머리라는 점에서 두 여자는 닮은 면이 있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상반됐다.
재촉하는 여자는 웃는 얼굴에 밝은 기운이 가득한데, 팔을 붙잡힌 여자의 얼굴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빨리 간다고 점수 잘 나오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빨리 가.”
여자의 이름은 최아린.
대장장이 계열 2학년, 최유민의 동생이자… 올해 신입생으로 입학하는 1학년 학생.
특수 계열 중에서도 희귀하다는 연금술사 계열 홀더였다.
그리고 옆에서 그녀를 붙잡는 여자의 이름은 박윤서.
2학년 황금세대의 주역 중 한 명인 박진우의 동생.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번 학기에 입학하는, 암살자 계열 신입생 홀더였다.
최아린의 뚱한 대답에, 박윤서는 재차 그녀를 설득했다.
“임시 등급 측정 빨리 끝내면, 연무장에도 빨리 갈 수 있잖아. 대련 시험 보는곳.”
“어차피 대련 시험 순서 랜덤이야.”
“아잇, 진짜. 순서가 문제가 아니라니까.”
박윤서가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그에 최아린이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그럼 뭐가 문젠데?”
“-대련 시험 직전에 도재현 선배님이 오시는 게 문제지. 선배의 인사말. 그게 오늘 제일 중요한 이벤트니까.”
질문에 대답한 건 박윤서가 아니었다.
문득 뒤쪽에서 들려오는, 부드럽고 고혹적인 목소리.
자연스레 두 사람의 고개가 돌려졌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최아린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광신도 한 명 더 납셨네.”
“또 교양 없이 말 한다.”
“교양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송현아.
셋 중 가장 많은 인지도를 보유하고 있을 홀더.
송씨 가문의 자제이자, S급 홀더 송도혁의 동생.
그리고 최근 [검] 룬 획득방법을 공개하며, 현 홀더 계를 가장 뜨겁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녀는 아직 각성한 지 세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아, 다른 신입생들에 비해 늦게 홀더가 된 편이다.
하지만 송씨 가문의 뛰어난 검법과 일반인일 때부터 쌓아온 검술 실력, 결정적으로 [검] 룬을 획득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노력’을 통해…
앞서 나가던 다른 신입생들을 거의 따라잡은 상태.
그 수준은 압도적이어서, 벌써부터 수석이 확정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서울 홀더 아카데미, 신입생 입학 시작. 황금기수인 선배들 넘을 수 있을까?
-국내 유망주랭킹 4위 홀더 박진우의 동생, 박윤서. 이번 학기 신입생으로 입학해…
-연금술사 계열에 희망이 뜬다! 기대주 최아린의 성적은?
아카데미의 대변혁이 일어나고, 새 학기.
큼지막한 사건들이 지난 후이기에 언론에서도 관심이 뜨거웠다.
그 중심에 있는 세 사람.
서로 틱틱대며 말하곤 있지만, 사실 그녀들은 이번 아카데미 기수 중 가장 주목받는 신입생들이었다.
수석이 논의되는 송현아는 말할 것도 없었고, 박진우의 동생으로 관심이 쏠린 박윤서, 희귀 계열인데도 역대급 재능을 보이고 있는 최아린….
신입생 계열별 TOP6를 꼽으면, 자연히 세 자리를 차지하는 그녀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한데 모여 친분을 다지는 이유.
그건 재밌게도, ‘도재현’이라는 공통적 관심사 때문이었다.
“그러는 최아린, 너도 선배님 따라 다니잖아.”
“난 그 사람이 고객이라 그렇지.”
송현아의 날카로운 질문에, 최아린이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최아린과 박윤서는 도재현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박윤서는 자신의 오빠가 도재현의 가장 가까운 절친이었고, 최아린은 언니 최유민을 통한 부속 계약으로 도재현에게 포션을 팔았었다.
하지만 거래 과정이 간접적으로 진행됐고, 또 도재현이 너무 바쁜 일정을 보내는 홀더였기에…
두 사람 모두 그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송현아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고객님인데 한 번도 못 봐서, 어떻게든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열성팬처럼.”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처먹을까?”
“또 교양 없이 말하네.”
“…그놈의 교양, 교양.”
최아린이 진절머리 난다는 듯 말했다.
아카데미 입학 지원기간 때 알게 되고 친해진 사이였지만, 송현아의 저 화법은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설전이 끝나면 어느새 자신은 교양 없는 인물이 돼 있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물론, 최아린도 도재현이 궁금했던 순간은 있었다.
그가 최유민-최아린 자매와 처음 계약을 맺었을 때.
도대체 자신들의 뭘 믿고 이런 거액을 투자하는지 궁금했고, 또 그 덕분에 능력의 성취가 있었기에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후 도재현이 너무 바빠지고, 최아린과의 계약도 불필요했는지 소홀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관계도 멀어졌다.
그리고 최아린 역시 별다른 생각이 없어졌다.
그냥 평범한, 아니 조금 고마운 비즈니스 파트너.
그게 도재현에 대한 감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최아린이 아무리 이걸 설명해도, 자신의 동기들은 믿어줄 생각을 안 했다.
“괜찮아, 아린아. 순수한 팬심은 전혀 나쁜 게 아니야. 게다가 한국에서 제일 인기 많은 홀더잖아. 나도 오빠 친구의 팬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니까.”
옆에 있던 박윤서가 다가와, 최아린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러자 최아린이 억울함 가득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몇 번 말해!”
“흔한 입덕부정기네.”
대화가 통하질 않는다.
최아린이 괜히 그녀들을 광신도라 부르는 게 아니다.
이들과 같이 있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도재현의 열렬한 팬으로 탈바꿈 돼있는 걸 목도할 수 있었다.
최아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맘대로 생각해. 그리고 제발, 팬으로만 남길 바랄게. 다른 선은 넘지 말고.”
“무슨 뜻이야?”
의미심장한 말에 송현아가 되묻자, 최아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언니한테 듣기론, 그 사람 옆에 예쁜 선배들 엄청 많다고 들었거든. 아,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실력이랑 명성도 넘사라고 했던가? 아무튼 아카데미 내에선 유명하대. 그 산 다 넘으려면 한 세월이니까, 웬만하면 팬으로만 남아있는 게 좋을 거야.”
한방 먹였다는 생각 때문인지, 최아린은 신나서 이야기를 쏟아냈다.
“…….”
그리고 이번엔, 송현아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 * *
아카데미 내 연무장.
입학시험 능력 측정이 모두 끝나고, 대련 시험이 이어질 장소.
또한 대련 시험에 앞서, 간단한 행사도 이뤄지는 장소.
이번 행사는 정말 간소하게 진행된다.
아직 시험 단계인 데다가 정식 입학식도 아니기에, 재단 이사장이나 각 계열 교수들도 참여하지 않았다.
아카데미 운영을 전담하는 탁원호 교수와 ‘학생 선배 대표’의 인사말, 그리고 대련 시험 감독관의 지시 사항 등만이 전해지는…
대외적으론 정말 가벼운 행사였다.
‘…후. 진정해, 송현아. 교양 있게.’
그러나 송현아에게 있어선, 그 어떤 행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벤트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열렬히 쫓아왔던 롤 모델.
미각성 상태였던 자신이 홀더를 꿈꿀 수 있게 해준 사람.
아무것도 아닌 관계에서 이제는 자신의 선배님이 된 홀더….
도재현, 그와 처음으로 마주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송현아는 사실상 오늘.
이 행사를 위해 입학시험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아야, 여기!”
이미 앞쪽에 가장 좋은 자리를 잡아 놓은 박윤서가 그녀를 불렀다.
옆엔 여전히 뚱한 표정의 최아린도 함께였다.
저번 입학지원서 작성 때 우연치 않게 닿았던 연인데, 어느새 셋은 뭉쳐 다니는 친구들이 되어있었다.
셋은 아카데미 외부에서도 기대주로 묶는 그룹이었다.
‘최아린도 금방 바뀌겠지.’
도재현에 대해 삐딱한 최아린의 태도가 살짝 마음에 안 들긴 해도, 어차피 바뀌는 건 시간 문제였다.
송현아가 지금껏 그런 식으로 입덕시킨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언제 시작한대?”
“10분 뒤에. 도재현 선배님이 첫 번째 순서래.”
송현아는 박윤서의 옆자리에 와 앉았다.
자리는 앞쪽에서도 정확히 중앙.
연설하는 이의 얼굴이 가장 잘 보이는, 최고의 명당이었다.
그에 그녀는 작은 감탄을 흘렸다.
“진짜… 교양 있는 자리로 잡았네.”
“히히. 그치?”
“응. 대박이야.”
“보람이 있구만! 아, 참. 현아야-”
박윤서가 잠깐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가까이 와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 카페 올라온 사진 봤어? 선배님 땀 흘리고 있는 훈련 사진이던데.”
“…뭐?”
송현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카페.
도재현의 팬카페를 뜻하는 말이다.
박윤서는 그 카페의 우수회원 등급을 보유하고 있었고, 친구인 송현아 또한 우수회원인 줄로 알고 있었다.
“못 봤구나. 완전 대박이야… 재현SS라는 분이 올렸는데, 화질 진-짜 좋아.”
“재현SS… 최우수회원 제일 빨리 단 그 사람?”
“응. 그분 원래 사진은 잘 안 올리는데, 한 번씩 올릴 때마다 퀄 장난 아니더라.”
도재현의 팬카페엔 최우수회원 등급이 총 5명이다.
이는 팬카페 회장을 포함한 숫자였고, 그중 ‘재현SS’라는 닉네임은 가입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최우수회원에 등극한 회원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나머지 세 명의 최우수회원도 사실상 카페의 원년멤버로, 카페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등급 조건을 만족한 이들이었다.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지.’
송현아는 멍하니 생각했다.
원래 최우수회원은 달기 정말 어렵다.
충분히 어렵도록 조건이 설정돼 있다.
당장 절친 박진우의 동생이라는 박윤서조차 우수회원에 머물고 있는데, 그보다 윗등급을 얻으려면 얼만큼의 고급 정보와 사진 등을 풀어야만 가능한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최단기 최우수회원에 등극한 ‘재현SS’를 포함해, 알 수 없는 남은 세 명의 최우수회원들.
이들은 대체 도재현과 어떤 관계이길래, 이토록 빠른 등업이 가능한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런 다른 생각도 잠시.
“헐. 온다. 선배님 온다…!!”
박윤서의 말에 송현아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연무장 중앙에 자리한 작은 단상.
그 위로…
말끔한 정장 차림의 선배님이, 천천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