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2 - 선배님, 팬이에요 (3)
느지막한 아침, 아카데미 연무장.
나는 어제 스승님께서 부탁하신 ‘선배의 인사말’을 위해 시험장에 와 있었다.
그리고 단상 위에 올라선 후, 순간 눈을 의심했다.
‘쟤들이 왜 같이 있지?’
익숙한 얼굴의 여자들이, 앞쪽 중앙 자리에 한데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박윤서, 최아린, 송현아.
두 명은 내 친구들의 동생이었고, 남은 한 명은 최근 홀더 계를 뜨겁게 달군 신입생이었다.
세 사람은 공교롭게도, 원작에서 또한 극의 새 페이즈를 열어가는 핵심 인물들.
현 1학년의 중심이 되어갈 이들이 눈앞에 있었다.
‘접점이 없지 않나?’
그런 세 사람이 함께 모여있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원래라면 셋은 각기 다른 에피소드로 다뤄진다.
박윤서는 <빌런>에 납치되며 주인공이자 오빠인 박진우와의 에피소드로, 최아린은 천재 연금술사로서 특수 계열 내에서 주목받는 인재로.
그리고 원래 ‘송현’이었던 송현아는, 여주인공 강주연을 목표로 삼아 점차 성장해가는 에피소드로.
세 사람은 모두 각자만의 스토리가 있고, 그 과정이 특별히 겹치지도 않기에 서로 친해질 일도 없었다.
특히 송현아는 다른 이들과 쉽게 친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박진우에 버금가는 노력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홀더지만… 그런 내적 요소만큼이나, 가문의 명예와 개인의 교양 등 외적 요소 또한 매우 중시하는 인물.
스스로 품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인물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송현아가 서민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는 최아린, 그리고 대외적으로 평범한 인물인 박윤서와 함께 있다는 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단 집중하자.’
하지만 놀란 건 놀란 거고, 일은 일이다.
스승님인 탁원호 교수가 부탁한 일을 사소한 변수로 망칠 순 없었다.
게다가 그간 원작과 달라진 흐름을 워낙 많이 봐왔기에, 이젠 이 정도 변수론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후배님들.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이크에 가볍게 입을 댄다.
조용한 연무장 안엔, 셀 수도 없인 많은 홀더들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단순히 신입생이나 감독관들만 있는 건 아니다.
아카데미 직원들부터 시작해, 국내 클랜들의 여러 스카우트 팀, 혹은 구경을 위해 찾아온 동기나 선배들도 있었다.
입학시험의 마지막인 ‘대련 시험’은, 신입생들의 실력을 파악하고 가진 바 능력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시험이기에 꽤 규모가 큰 이벤트다.
특히 외부 인사들의 경우, 입학식 같은 형식적인 이벤트보다 오히려 이러한 실전적 시험들의 참관을 선호했다.
“저는 현재 암살자 계열 2학년에 재학 중인, 홀더 도재현이라고 합니다.”
와아아아-!!
짝짝짝짝-
짤막한 소개가 끝남과 동시에,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신입생들의 설문 결과에 따른 연설이라더니, 확실히 내 인기가 압도적이긴 했다.
‘아오, 민망해.’
그러나 나는 아직 이런 인기가 낯설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국내 최고의 유망주 홀더.
최연소 S급이 기대되는 멀티 홀더.
서울 홀더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학생 홀더….
날 향한 수식어들이 이렇게나 많다.
거기에 많은 이들이 보내는 환호와 찬사.
앞으로 홀더 계를 이끌어갈 거란 기대.
그에 부응하듯, 어느새 국내에서 손꼽힐 유명인이 돼 있는 내 모습까지….
이게 홀더가 된 지 고작 1년 만의 일인데, 익숙해지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
물론, 그런 유명세가 꼭 나쁜 건 아니다.
어쨌든 이는 날 한 발짝 앞서가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흐릿한 목표 의식에 힘을 불어넣어줄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마냥 좋은 것도 아니야.’
대중의 관심이 한 사람에게 쏠린다는 건,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에 반발하듯 싫어하는 사람도 생기기 때문.
그들은 아마 잠잠히 때를 기다리다가…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날 물어뜯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영웅이 추락하는 순간을 누구보다 즐기겠지.
그런 식으로 언론과 안티들의 먹잇감이 되는 건.
내 쪽에서 사양이었다.
“후배님들께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사실 고민을 많이 했어요. 너무 정석적인 얘기만 하자니 재미가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가벼운 이야기를 하자니 후배님들께 도움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어쨌든 그런 유명세에 힘입어 ‘선배의 인사말’을 하면, 신입생들의 관심까지 쏠릴 수 있다.
안 그래도 밖에서 난리인데, 안에선 더욱 심해질 지도 모른다.
나는 굳이 그런 피곤함을 겪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까 그 관심을 조금이라도 분산시키자!
이번 인사말에 임하는 태도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당연히 내 스피치에도 의도된 부분들이 많았다.
“근데 또 오늘이 입학시험이고, 조금 있으면 후배님들의 대련 시험이 진행되잖아요? 그래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제가 신입생이던 시절, 대련 시험 칠 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해요.”
어젯밤부터 생각해온 주제를 천천히 꺼낸다.
1시간 넘게 곰곰이 생각했었다.
벌써부터 쏟아지는 신입생 후배들의 뜨거운 관심.
이를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방법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에요. 제 인생 최대 라이벌 홀더인, 박진우를 만난 게.”
그 관심의 방향을, 다른 이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진우야. 오늘도 고맙고 미안해.’
너도 카밀라 꼬실 때 나 팔았으니까, 나도 한 번 쓸게.
* * *
박윤서는 작년 여름.
방학이 끝나갈 때쯤 홀더로 각성했다.
그녀는 오빠와 달리 선천적 재능을 타고났다.
주력 에픽룬인 [서늘한 암습]을 비롯해, 적절한 공통룬 세팅, 꽤 높은 능력치들을 부여받았었다.
덕분에 각성하고 1년이 채 안 됐는데도, 그녀는 탄탄대로가 예정돼 있었다.
암살자 계열에 나타난 또 하나의 인재.
그게 신입생인 그녀의 수식어였다.
-암살자 계열 내 유일한 S급 홀더, 유은설!
-유은설은 정말 도재현 말고 제자를 안 받을까?
-멀티 홀더 도재현, 암살자 능력은 어느 정도…?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시선이, 암살자 계열 톱을 달리는 두 사람에게 쏠리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유은설과 도재현.
두 사람의 콤비는 홀더 계에서도 이미 유명했다.
사제지간을 뛰어넘어, 마치 동료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환상의 호흡.
같은 길을 걷는 이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도재현… 선배님.’
그리고 박윤서의 시선은, 점차 제자 쪽인 도재현에게로 쏠렸다.
이유야 많았다.
일단 그가 잘 생긴 남자 선배라는 점, 한 발 앞서간 같은 계열 홀더로서 배울 게 많다는 점, 그리고 지금껏 쭉 보여온 영웅적인 행보….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있는 그대로 그에게 눈길이 갔다는 것이다.
박윤서는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팬’이 됐다.
-오빠. 도재현 선배님은 어떤 분이셔?
-오우! 쉬에엣. 너 지금 오빠 친구한테 징그럽게 선배님이 뭐냐, 선배님이.
-아니, 그럼 선배님이라 하지 뭐라 해.
-…훈련 방해하지 말고 알아서 생각해 와.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던 오빠와의 대화에선 건져낼 게 없었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잔뜩 해대서 도움이 안 됐다.
그래서 박윤서는 차근차근 도재현에 대해 알아갔다.
기사에도 나오는 굵직한 정보부터, 아주 사소한 정보까지.
직접 발로 뛰며 찾아내고, 조금씩 그를 배워갔다.
그렇게 찾아온 서울 홀더 아카데미였고, 그렇게 얻어낸 ‘팬카페 우수회원 등급’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만의 아이돌인 도재현이, 앞에서 인사말을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 … … 그렇게 진우는 전사 계열에선 따라올 학생이 없는 실력자가 됐죠. 또, 공격형 전사 계열중엔… … ”
박윤서는 멍한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시간이 꽤 지나도록 듣고 있지만, 여전히 상황 파악이 잘 안 된다.
뭔가, 뭔가 이상한 인사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 훈련광 얘기가 왜 나와…?’
아카데미의 영웅, 도재현의 인사말이다.
분명 지금까지 그의 화려한 업적이나 독보적이었던 던전 공략, 아카데미 내 눈부신 활약 등 그와관련된 재밌는 일화들을 들을 거라 기대했는데…
어째서인지 그의 입에선.
자신의 오빠, 박진우에 대한 이야기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론, 아예 연관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 … … 이처럼 서로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라이벌의 존재는, 홀더가 실력을 향상시킴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진우와 제가 나란히 F급에서 여기까지 성장해온 것만 보더라도 말이죠. … … ”
도재현은 흥미로운 대련 이야기에 자신의 경험을 덧대 풀어내며, ‘라이벌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비슷한 실력의 친구가, 때론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는 교훈적인 내용.
어떻게 보면 ‘대련 시험 직전 스피치’로 가장 적합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윤서는 억울했다.
‘이 도움 안 되는 오빠가…! 우리 선배님 얘기 돌려줘!!’
그녀는 단지 도재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이었다.
도재현이 그간 펼쳐왔던 놀라운 업적들이나, 혹은 자신의 계열 및 멀티 홀더 재능에 관한 이야기들.
독특하고 재밌는 주제는 얼마든지 많았다.
그 많은 이야기들 중, 자신의 오빠가 들러붙는 이야기는 계획에 없었다.
-박진우를 아냐고요? 내가 아는 라이벌 중에 최고였어요.
…와 같은.
그런 쓸데없는 요약본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 없이 흘러만 갔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선배의 인사말은 끝이 나 있었다.
“ … …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2학년 도재현이었습니다.”
짝짝짝짝-
와, 와아아-!!
짝짝짝-
그런 박윤서의 팬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변 동기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명 스피치다, 역시 도재현이다, 아카데미 학생대표답다.
그런 칭찬들이 쏟아졌지만…
반응의 주를 이룬 내용은, 역시 핵심 주제였던 박진우에 대한 이야기였다.
“와, 박진우 선배님이 그 정도였어?”
“도재현 선배님 유일한 라이벌이라잖아. 그럼 말 다 했지.”
“빌런 소탕 작전의 숨은 공신, 뭐 그런 건가.”
“야야, 말해 뭐해. 그거잖아, 그거. 언성 히어로.”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들.
그에 박윤서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아니야. 우리 오빠 그런 사람 아니라고. 그냥 검에 미친 훈련광이라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