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4 - 여우를 탄 문가은 (2)
며칠 전, 아쓰타 신궁.
문가은은 전속 무녀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무희의 공터’라는 곳에 와 있었다.
무희의 공터는 신궁 내 전속 무녀들의 각종 교육 및 수련 등을 위해 마련된 공간.
원래라면 타국의 홀더인 문가은이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만, 오늘부터 그녀의 단기 스승이 돼 줄 아키바 미유가 이곳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한 선임 무녀였기에 입장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늘 제가 가은 님께 가르쳐드릴 건 ‘강신술’이라는 겁니다.”
문가은과 함께 공터 안으로 들어온 아키바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녀의 손엔 커다란 장궁이 쥐어져 있었고, 옆에 마련된 테이블엔 영물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물건들과 특이 형태 옷들이 놓여 있었다.
그걸 번갈아 보던 문가은이 되물었다.
“강신술이요?”
“네. 사실 재현 님께 부탁을 받은 후로, 어떻게 가은 님을 훈련시켜드려야 할 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어쨌든 가은 님은 저와 마찬가지로 B급 홀더이고, 무려 문정혁 홀더님께 교육을 받은 홀더 아니십니까? 때문에 평범한 궁술 훈련을 하는 건, 가은 님에게도 그다지 유의미한 시간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음….”
그런 아키바의 설명에 문가은도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실력과 교육력이 비례하지 않는다곤 해도 문정혁은 한국 최고의 궁수 계열 중 한 명.
그런 홀더를 아버지로 둔 문가은에게 어설픈 궁술 훈련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정석적인 성장에 또 다른 정석을 얹는다고 해서 쉽게 융화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래서 아키바는 단순히 궁술만을 가르치는 게 아닌, 특별한 요소를 추가해 교육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장 도중 벽에 막힌 문가은을 리프레쉬해 줄 무언가.
요컨대 지금의 훈련 방향을 환기시켜줄 만한, 궁수 계열로서의 어떠한 새로운 길.
그게 바로 아키바가 오랜 시간 단련해온, ‘무녀의 힘’이었다.
“강신술은 일본 무녀 홀더들이 주로 사용하는, 일종의 신성 계열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뉘는데, 저희 같은 직접전투 계열이 다루는 강신술은 대부분 신체강화 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 잠깐만요.”
멍하니 설명을 듣던 문가은이 손을 들었다.
순간 이해가 가지 않는 말들을 들었기 때문.
“지금 저한테 새로운 룬을 익히게 해준다는 거예요?”
강신술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무속 신앙 쪽의 특수한 힘이지만, 홀더 계에서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저주’나 ‘축복’처럼, 신의 힘을 잠시 빌려 사용하는 특수한 힘.
신성 계열의 능력에 해당하게 되는 것.
즉, 지금 아키바의 말은 문가은에게 없던 새 룬을 익히게 해준다는 말로 들려왔다.
“정확히는 가은 님의 재능을 확인하는 겁니다.”
“재능 확인?”
“그렇습니다. 혹시 가은 님께서는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재능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네, 당연히 알죠.”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재능.
전자는 홀더로 각성할 때 시작부터 얻는 모든 룬의 힘을 일컬었고, 후자는 각성 이후 홀더가 성장을 통해 얻어가는 능력들을 말했다.
[빙결]로 시작한 김채은이 [얼어붙은 전장]을 얻게 된 경우가 ‘후천적 재능’의 대표적인 케이스.
조금 더 보편적으로 들어가면, [마력제어] 등의 공통룬이나 [플로리안 주문]과 같은 주문법 룬들도 여기에 속했다.
각국에서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초보 홀더들을 교육하는 목적 또한, 이렇듯 숨겨진 후천적 재능을 개화시키기 위함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부분의 홀더들은 후천적 재능을 찾기보단, 선천적 재능을 더 키우는 데에 노력합니다. 그 이유는 가은 님도 잘 아실 겁니다.”
그 말에 문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불확실한 재능을 무작정 찾는 것도 비효율적이고, 또 찾는다 해도 선천적 재능보다 뒤처진 성능일 수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멀티 홀더가 희귀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로열>의 성나연처럼 처음부터 두 재능을 타고난 멀티 홀더들도 있지만, 보통은 후천적 재능을 발견하며 이를 보조격으로 키우는 경우가 대다수다.
재능이 있어도 발견하지 못하거나, 혹은 효율을 생각해 아예 시도 자체를 안 해버리니…
당연히 여러 룬을 사용하는 홀더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 반면, 셀 수도 없이 많은 룬을 보유하고 또 그 룬들에 모두 특별한 재능이 있는 멀티 홀더도 존재한다.
도재현.
A급 홀더이자, 아직 아카데미에 소속된 학생 홀더.
그가 최연소 S급이 기대되는 역대급 유망주로 불리며, 국내 홀더 계의 희망으로 떠오른 건… 괜한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어쨌든 강신술은 이러한 후천적 재능의 개화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룬입니다. 몇몇 아이템과 특수한 조건을 필요로 하긴 하지만, 획득할 수만 있다면 분명 전력에 큰 도움이 되죠. 저는 이를 통해 가은 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즉, 아키바의 이번 교육은 일종의 ‘특수 강의’였다.
관련 지식과 아이템을 동원해 조건을 만족한 후, 새로운 힘을 개화시키는 것.
그게 이번 교육의 목적이다.
물론,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문가은이 <마력제어의 기초> 시간에선 [마력제어]를 획득했지만, <부산물 채취>에선 아무런 룬도 획득하지 못한 것처럼…
해당 분야에 재능이 있어야만 룬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교육이다.
궁수 계열인 문가은은 능력치 중 ‘신성’ 수치를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쓰질 않는데,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이 생긴다면 확실히 전투 보조에 힘이 실릴 것 같았다.
“알겠어요. 해볼게요.”
“좋습니다. 그럼 일단….”
아키바가 테이블에 놓여 있던 물건들 중, 곱게 접어져 있는 옷더미를 꺼냈다.
“가은 님. 이걸 입으시겠습니까?”
총 세 개의 옷.
하나는 상체를 단정하게 가리는 하얀색 웃옷이었고, 다른 하나는 붉은색으로 가득 찬 치마, 마지막은 이들을 모두 덮는 겉옷이었다.
지금 아키바가 입고 있는 옷과 거의 똑같은 형태의 의복.
일본에선 ‘하카마’라고도 불리는 무녀복이었다.
문가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이를 받아들었다.
교육을 하기에 앞서, 이 옷은 왜 입으라는 걸까.
“이게 뭔데요?”
“신성력이 담긴 무녀복입니다. 오늘 제가 가르칠 무녀의 힘은, 사용자의 의복에 따라서 그 감응도가 크게 달라집니다. 따라서 이걸 입으셔야 가은 님의 재능을 더 효과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성력이 담긴 무녀복.
즉, 아이템이란 뜻이다.
정보를 확인하니 정말 신성 수치가 조금씩 붙어있는 레어급 아이템이었다.
심지어 ‘강신술과의 호환성이 좋다’는 특수효과까지 붙어 있었다.
아키바의 말처럼, 착용하면 분명 교육에 도움이 될 아이템.
다만….
“이거, 좀 짧네요?”
무녀복의 치마 길이가 정석적이지 않았다.
기다랗게 늘어져 발목까지 가린 아키바의 무녀복과는 달리, 문가은의 무녀복은 짧게 수선되어 허벅지 위까지 올라오게 돼 있었다.
문가은이 입으면 그녀의 길고 예쁜 다리가 강조될 법한 의상.
어떤 면에선 패션을 강조한 것도 같은 옷이었다.
그러자 순간 아키바가 헛기침을 한다.
“크, 크흠. 하, 한국식에 맞춰 개량했습니다. 무녀복엔 신성력만 담겨있으면 되고, 아무래도 가은 님께서 일본 전통 의상을 입을 필요까진 없으니까요.”
한국식에 맞춘 개량?
…굳이?
게다가 지금껏 흔들림 없이 설명을 이어가던 아키바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말까지 더듬으니 괜히 더 이상하다.
왠지 짚이는 바가 있던 문가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키바 씨.”
“…예?”
“나 오늘 무녀 교육 받는 거, 재현이도 알아요?”
멈칫-.
아키바의 몸이 순간 굳는다.
그 잠깐의 움직임에 문가은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특수 제작된 무녀복의 주문자가 누구인지.
“아, 알고는 계시지만 무녀복과 재현 님은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일단 이 무녀복은 여성이 입는 옷이고, 또 재현님께선 남자 홀더시니까… 어, 그러니까….”
…이 여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아키바에게서 이런 당황한 모습이 나오니 신기했다.
문가은은 헛웃음을 지으며 무녀복을 손에 쥐었다.
“어쨌든 알겠어요. 입고 올게요. 어디서 갈아 입으면 돼요?”
그에 아키바가 순간 민망한 얼굴을 지었다.
거짓말이 들통난 걸 자기도 안 모양이다.
그리고 공터 한쪽에 자리한 탈의실을 가리켰다.
“저 안에서 갈아입고 오시면 됩니다.”
“네. 그럼 조금만 기다려요.”
“저… 가은님?”
“네?”
문득 그녀에게 쭈뼛쭈뼛 다가온 아키바가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호위를 위해 입구 쪽에 서 있는 성나연이 들리지 않도록, 가까이 와 속삭였다.
“그… 재현 님께서 꼭 비밀로 해달라고….”
“푸훗. 알았다니까요.”
이젠 아예 숨기지도 않는구나.
문가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탈의실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리고 세 걸음, 네 걸음이 지나…
아키바가 거의 보이지 않을 때쯤.
그녀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확 달아올랐다.
‘…바, 바보가 진짜.’
아키바의 앞에선 여유로운 척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민망한 건 문가은이었다.
무녀복인지 코스프레 의상인지 분간이 안 간다.
그 정도로 손에 든 옷은 특이하고 짧았다.
뭔가 알아선 안 될…
은밀한 도재현의 취향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워, 원하면 말을 하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슴은 괜히 두근거렸다.
평소엔 장난만 치던 남자친구가…
뒤에선 은근히 자신의 이런 모습을 기대했었다니.
예상치 못한 점에, 괜히 기쁘고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살 좀만 뺄까?’
벌써 무녀복을 입고 도재현과 만나는 광경이 그려지는 머릿속.
그에 다이어트부터 생각하는 문가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