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9 - 바라텐의 전사들 (1)
전투가 끝났다.
칼라크 진영의 웨어울프는 물론, 다섯의 라이칸마저 모조리 사냥을 마치며 우리는 승리했다.
라이칸을 한 마리 정도 살려두는 건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A급에서도 상위 괴수인 녀석들을 살리는 건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굳이 칼라크 진영이 아니더라도….
“반갑습니다. 라이칸 여러분.”
…우리에겐 아직 대화할 라이칸들이 남아있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네 마리밖에 남지 않은 웨어울프.
그리고 바라텐 진영의 라이칸 둘.
그들은 환영한다는 내 제스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텐. 지금 저 인간, 우리에게 말을 건 거냐?
-그런 것 같은데요? 라이칸이라고 분명히 말했잖습니까.
-그럼 지금 저 인간이 우리의 언어도 알고, 부족 사정까지 잘 안다는 뜻이냐?
-예? 아니,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결론이 그렇게 됩니까. 정말 미친 수준의 확대해석이십니다. 하하. 그리고 전이된 이후로 이곳에서 인간을 본 건 처음이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말을 걸었는데, 정작 답은 안 오고 만담만 들려온다.
그럴 만도 했다.
[언어] 룬은 레벨이 낮을 땐 듣는 것 외에 의사소통이 안 된다.
따라서 지금의 나 역시 라이칸들의 언어를 쓸 수 없다.
그런데도 나는 한국어로 그들에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라이칸들이 고도로 발달된 언어와 [언어] 룬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알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여러분들의 말을 듣고 있는 게 맞습니다. 언어 룬을 보유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아까 전투 때 저희의 작전 지시를 듣고 나름대로 우릴 돕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도 언어 룬을 보유하고 있다는 추측을 했습니다.”
웃으면서 변명 같은 이야기를 하자, 바라텐 진영 라이칸들이 또 호들갑을 떨었다.
-제이텐 님! 우리가 언어에 능통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룬’이라는 단어를 쓴 걸 보니 분명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
-시끄럽다. 나도 듣고 있어.
몸집은 집채만 한 늑대인간들이 소란을 떨어대니 상당히 기괴하다.
‘크긴 진짜 크네.’
대략 3M쯤 될까?
워낙 거구의 몸을 지닌 라이칸들이라 가까이에선 고개를 올려야 보였다.
어쨌든 둘 중 상급자로 보이는, 제이텐이라고 불린 라이칸이 앞으로 나와 내게 말을 건넸다.
-반갑다. 나는 위대한 전사 바라텐의 후예, 제이텐이라고 한다. 우선, 우릴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인사를 전한다. 당신들의 목적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제이텐은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 번 치고 짧게 목례했다.
잘은 모르지만 그게 라이칸 혹은 바라텐 부족의 예절인 모양이다.
“큰 목적이 있어서 구한 건 아닙니다. 근데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는 문득 고개를 돌리며 뒤쪽을 봤다.
여전히 완전 무장을 한 공대원들이…
경악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월자의 방>이 나타나기 전까지 있을 수 없다고 여겨졌던, 심지어 초월자는 괴수로 취급받지 않기에 사실상 지금껏 없었던 초유의 사태.
인간과 괴수가 대화를 나눈다.
그 역설적인 일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아무리 경험 많은 홀더들이라고 해도 놀라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우리들의 언어로 말해주시겠습니까? 전 아직 룬 레벨이 낮아서 라이칸들의 언어를 쓰기가 어렵군요. 또 언어 룬이 없는 우리 대원들이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고요.”
나는 한국어로 얘기 중이고, 제이텐은 라이칸의 언어로 말하는 중.
[언어] 덕에 소통은 되지만 대원들은 못 알아듣고 있었다.
그런 내 부탁에 제이텐이 원래도 험악한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내가 그래야 할 이유는?
역시 거친 전투 민족의 자존심을 꺾는 건 쉽지 않은 건가.
나는 난감한 얼굴로 구실을 생각해봤다.
“그래도 저희가 나름 생명의 은인 아닙니까?”
탁-!
“그걸 내가 말하려 했다. 다른 인간들, 반갑다. 나는 위대한 전사 바라텐의 후예, 제이텐이라고 한다.”
…….
쉬웠다.
제이텐은 어깨를 두어 번 치며 공대원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매우 능숙한 한국어.
이에 공대원들의 표정에 또 한 번 놀라움이 서린다.
[언어] 룬을 고레벨까지 키우면, 생소한 언어를 한 번만 들어도 이렇듯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위대한 전사 바라텐의 후예, 하텐입니다! 그나저나 이 언어는 신기하군요. 발음 군데군데에 각진 곳이 많습니다. 하하.”
하텐이라는 라이칸까지 소개를 마쳤다.
둘은 은빛 갈기를 지닌 A급 라이칸으로 비슷한 생김새였지만, 자세히 보면 제이텐의 몸집이 더 크고 기세도 강렬했다.
거기에 갈기 색깔도 얕은 붉은색이 더해져 있다.
‘승급 직전인 건가?’
갈기의 색깔이 달라진다는 건 A급을 넘어서 S급 라이칸이 된다는 뜻.
제이텐은 하텐의 상급자이면서, 곧 승급을 앞둔 라이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대장님, 이게 대체 무슨….”
잠깐 제이텐의 풍채를 구경하고 있자…
뒤쪽에선 몇몇 대원들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비록 우리가 시작부터 ‘바라텐 진영’에 대한 이해와 ‘라이칸스로프의 협력’ 등을 인지하고 참전하긴 했지만, 이건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일이긴 하다.
라이칸들이 난데없이 한국어를 하는 상황이라니.
나도 관련 정보가 없었다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선 대화를 나눠보죠. 말이 통하니까.”
이럴 땐 직접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이다.
나는 가볍게 대원들을 안심시킨 뒤 다시 앞을 봤다.
“반갑습니다. 전 파문 공격대의 공대장, 홀더 도재현이라고 합니다.”
탁-
제이텐의 손을 맞잡으며 악수한다.
거칠고 까슬까슬한 그의 손에서 어마어마한 근력이 느껴졌다.
확실히 평범한 A급 괴수는 아니었다.
“공격대? 홀더?”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지겠네요.”
조금 더 편안한 대화를 위해, 잠시 자리를 옮긴다.
라이칸들은 의외로 몸만 쓰는 녀석들이 아니었다.
* * *
라이칸들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건설적이었다.
이들은 ‘초월자’ 드래곤들처럼 깊이 있는 정보를 가진 건 아니지만, 시스템의 영향을 받고 그 존재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괴수가 룬 홀더가 된 형태라고 해야 할까?
특히 정보의 개방 측면에서 허용된 부분이 많아, 어떤 면에선 초월자들과의 대화보다 도움이 됐다.
“오호! 그럼 당신들은 이계에서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 인간들인 거군요?”
“바로 그거죠! 통칭 룬 홀더, 룬을 가진 인간들이란 뜻이다 이 말입니다.”
뒤편에선 도승민과 하텐이 신나게 이야기 중이었다.
두 사람…
아니, 한 인간과 한 늑대인간은 마치 오래 전부터 친구였던 것처럼 편하게 대화했다.
도승민이 우리 대원 중에서도 유독 친화력이 높은 녀석이라 그런지, 아직은 경계 대상일 게 분명한 늑대인간과도 순식간에 친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저 친구도 친화력이 꽤 좋나 보네요.”
“하텐이 좀 유별난 면이 있다.”
제이텐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좀 시끄럽긴 해도 나쁜 광경은 아니다.
어쨌든 도승민이 허물없이 대화의 물꼬를 트면서, 대원들과 라이칸 사이의 보이지 않던 간격이 조금씩 좁혀졌기 때문.
특히 괴수로만 여겼던 이들이 ‘시스템’, ‘룬’, ‘스킬’과 같은 핵심 단어들을 턱턱 내뱉으니 다들 관심을 가지며 대화에 참여하곤 했다.
나는 다시 제이텐 쪽으로 고개를 돌려 아까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당신들은 라이칸 내에서도 바라텐이라는 부족의 후예이고, 오래 전 빼앗겼던 도시를 되찾기 위해 지금 클라크 부족과 전쟁 중이라는 거죠?”
“그렇다. 방금 싸웠던 라이칸들은 그 더러운 클라크의 척후부대지.”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그 경계선과 같은 지역.
당연히 척후부대가 정찰을 돌면서 영역을 넘어오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전투가 발생하기도 한다.
아까 듀크를 비롯한 클라크 진영 라이칸들이 과감하게 바라텐 진영으로 왔던 건 그런 이유였다.
이 도시는 원래 그들의 대륙인 라프리온에도 있던 곳.
도시가 통째로 현 지구로 전이된 것이었다.
도시를 빼앗긴 이유, 과정 등에 대해선 제이텐도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시스템에 의해 소거됐겠지.’
많은 정보가 개방됐다곤 하지만, 여전히 소거된 기억들은 있었다.
특히 듀크를 사냥한 내 모습에 감탄하며 ‘용기사의 전설’ 이야기도 잠깐 나왔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물었을 땐 “그 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다.”며 형식적인 답변만을 했다.
기억나지 않는 걸 답답해할 법도 한데, 마치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태도.
아마 그마저도 시스템에 의해 잠식당했을 확률이 컸다.
‘어쨌든 중요한 건 대원들을 납득시켰다는 거지.’
난 잠시 공격대 대원들을 둘러봤다.
각기 사담을 나누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와 제이텐의 대화 혹은 도승민과 하텐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
그만큼 이 특별한 공략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정보’들을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대원들도 슬슬 파악했을 거다.
이 던전의 공략 조건이…
결국은 바라텐 진영을 도와 칼라크 진영을 무너뜨리는 결과라는 것.
그 가설의 결정적인 입증은, 제이텐이 건넨 한 아이템 덕분이었다.
<아이템 정보>
◎이름: 신뢰의 증표
…
…
◎세부정보
: 라이칸 부족, 바라텐의 전사들이 동료에게 건네는 믿음의 증표. 바라텐 부족은 이 증표를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며, 이 증표를 건넨 이들에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톨 바라텐’을 비롯한 몇몇 전사들만이 가질 수 있는 증표다.
별다른 특수효과도, 내재된 스킬도 없지만…
특이한 세부정보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아이템.
즉, 시스템마저 인정한 것이다.
바라텐 부족을 도와 전쟁에 참여하는 게, 이 던전의 공략 방향일 것이라고.
애초에 입구부터 ‘바라텐 진영’으로 들어오는데, 다른 방향을 생각하는 것도 사실 웃기긴 했다.
나는 [신뢰의 증표]를 가볍게 손으로 감싸쥐며 제이텐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한번 가보죠. 톨 바라텐이라는 당신들의 리더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