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3 - 바라텐의 전사들 (5)
바라텐 진영 근거지 중앙.
무수히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천막 안.
‘바라텐의 전사들’이라 불리는 라이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테이블이 놓인 이 공간에 모인 전사들은 총 13명.
생각보다는 적은 숫자지만, 모인 이들이 모두 ‘S급 괴수’의 힘을 지닌 각성 라이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
나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며 주변을 살폈다.
무력의 아이콘인 늑대인간답게 녀석들은 난폭한 분위기를 풀풀 풍겨댔다.
날카로운 생김새와 우락부락한 근육.
테이블 위에 놓인 주먹은 당장이라도 모든 걸 박살낼 것 같다.
워낙 거친 기세가 온 천막 안을 맴돌고 있어, 나와 함께 자리한 대원들도 살짝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보고 있었다.
‘장비가 하나도 없네.’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녀석들은 어떠한 ‘장비’도 갖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기는 물론, 투구, 갑옷 신발 등…
몸을 보호하는 방어구가 단 하나도 없다.
심지어 의복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아서, 중요 부위를 가리는 천 하나만을 입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표현이 무색해지는 허름한 모습이지만, 어쩌면 그들에겐 당연한 이야기였다.
방어구는 애초에 내구 수치가 매우 높고 관련 방어룬도 갖춘 라이칸들에게 굳이 필수적이진 않을 거고, 무기 역시 격투술을 주로 사용하는 그들에겐 필요치 않다.
[끓어오르는 늑대의 힘] 룬에서도 알 수 있듯, 라이칸들은 격투술을 활용해야 능력에 보조를 받고 강해지는 괴수들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이 모든 걸 제작해줄 ‘대장장이’가 없다.
라이칸들은 기본적으로 호전적인 종족이다.
아무리 마력을 다루는 마법사 계열이 있다곤 해도, 그들 역시 결국은 전투 계열.
대장장이 같은 비주류 계열을 맡게 되면 나약한 겁쟁이 취급을 받는 게 라이칸의 현실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전사들의 회의를 시작하겠다.”
바라텐 진영의 리더, 톨 바라텐.
엔리히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자 탁-!
하고 탁자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린다.
주변에 앉아있던 라이칸들 중 가운데쯤에 앉은 녀석이었다.
“톨. 회의에 앞서 이의 있소.”
‘톨’은 톨 바라텐인 엔리히텐을 지칭하는 호칭.
그는 다른 라이칸들과 달리 하오체를 쓰며 편하게 이야기한다.
하텐이나 제이텐이 극존칭을 할 땐 몰랐는데, 같은 전사들 사이에선 딱딱한 상명하복의 분위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데없이 시작하자마자 들어오는 이의 제기에…
엔리히텐이 살짝 이마를 찡그렸다.
“…뭐지?”
“거룩한 전사들의 회의에 인간들이 끼는 것 말이오. 저들이 과연 우리 전사들과 같은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드오.”
“저들에 대해선 이미 설명을 마쳤을 텐데.”
“전쟁을 함께 치르는 것과 전략을 함께 짜는 건 다르오. 저들이 그만한 능력을 갖췄는지, 충분한 힘을 지녔는지 증명해야 하오. 이건 신뢰의 증표와는 별개의 문제일 거요.”
…전략 짜는 능력을 갖췄냐고?
아니, 누가 봐도 너네보단 머리 잘 굴리겠구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진정하고 말을 꺼냈다.
“엔리히텐. 얘기가 다 잘 된 것 아니었습니까?”
“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깜짝이야.”
…이 새끼는 말로 하면 되지.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하지만 이의 제기를 한 라이칸이 소리를 지르자 순식간에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다른 전사들은 언제든 들고 일어날 기세로 으르렁거렸고, 내 뒤에 있던 대원들도 굳은 얼굴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나는 손을 들어 그런 대원들을 진정시킨 후, 해당 라이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이름이 뭡니까?”
“…쉴르텐이다.”
“그, 쉴르텐 씨? 뭔가 크게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나는 체내에서 마력을 끌어올려 천천히 손끝까지 닿게 했다.
내 몸에서 마력이 일렁이자, 그 기척을 눈치챈 라이칸들이 곧바로 반응한다.
심지어 엔리히텐도 깜짝 놀라 날 말리려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내 손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쾅-!
거칠게 탁자를 내려치는 손바닥.
처음 쉴르텐이 탁자를 쳤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하고 응축된 힘으로 내려친다.
특수 제작된 탁자에 금이 가고, 일어서려던 라이칸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건 단순히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멈춘 게 아니다.
실제로 그들의 몸이, 내가 뿜어낸 마력을 통해 정지했다.
“무, 무슨….”
“몸이…!!”
[잊혀진 용기사의 긍지] 특수효과.
첫 마력 발현 시에 ‘드래곤 피어’를 적용시켜, 마력을 마주한 대상을 모두 ‘위축’시키는 효과.
‘위축’은 기본적으로 상대의 능력치를 잠시 저하시키는 상태이상이지만, 내 룬 레벨과 높은 정신 수치에 비례해 약간의 ‘마비’ 효과까지 추가됐다.
덕분에 라이칸들은 마비 효과와 그에 따른 당황스러움으로 몸을 잠시 멈춘 것이었다.
나는 그 상태에서 쉴르텐에게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우린 부탁과 초청을 받아서 이 회의에 참석한 거지, 무슨 명령 같은 걸 받아서 온 게 아니야. 당신이 그렇게 호통치며 말했던 톨의 손님이라고. 부하가 아니라.”
엔리히텐에게 힐끗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쉴르텐을 본다.
“보니까 엔리히텐이 제대로 설명을 못한 모양인데, 그러면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이의를 제기했어야지. 정식으로 회의 참석을 부탁받은 손님을 앞에 두고, 이제 와서 맘에 안 든다고 대놓고 씹어대면 도와주러 온 우리가 뭐가 됩니까. 예?”
“…….”
대화엔 대화로.
힘엔 힘으로.
적당히 강압적인 기세를 앞세워 몰아세우자, 쉴르텐은 뭔가 말할 듯 이를 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꽤 분해 보이는 표정.
아마 논리로도 기세로도 자신이 밀렸다는 걸, 본인도 잘 아는 모양이다.
“…미안하다, 도재현. 아무래도 내가 전사들을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한 것 같군. 제이텐이 신뢰의 증표를 건넨 것만으로 납득이 됐으리라 생각했는데, 힘에 대한 신뢰는 또 별개의 문제인 모양이다.”
대강 분위기가 정리되자, 엔리히텐이 먼저 사과를 건네왔다.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들며 그에 답했다.
“괜찮습니다. 대충 이해는 가니까요. 혹시 저희가 듀크를 잡은 것도 전사들에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 하지만….”
씁쓸한 얼굴로 전사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엔리히텐.
그리고 뭔가 찝찝한 표정으로 제각각 앉아있는 전사들.
그 묘한 분위기를 보자마자 나는 깨달았다.
‘이 새끼들, 안 믿고 있구나.’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타나 전쟁에 합류하겠다는 이들.
그리고 전사들의 입장에선 나약한 존재로 남아있을 인간이라는 존재.
그런 이들이 전사인 각성 라이칸을, 그것도 칼라크 진영의 핵심 인원이었다던 ‘듀크’를 쉽사리 척살했다는 걸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도, 아마 ‘제이텐과 하텐이 빈사상태로 만들어 놓은 걸 겨우 힘겹게 잡았을 거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겠지.
게다가 [신뢰의 증표] 역시 아직 각성하지 못한 제이텐이 건넸기에, 미숙한 전사가 쉽게 건넸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 속내들이 그려지자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갔다.
톨 바라텐의 제안이니까 따르긴 따르는데, 자신들이 아니꼽다 생각한 부분에선 참지 못한 것.
‘나 참.’
속으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리곤 마음을 다잡았다.
좀 병신 같긴 해도, 뭐 어쩌겠는가.
원활한 던전 공략을 위해선, 이 늑대들을 납득시키고 확실한 신뢰를 얻은 채 전쟁에 들어가는 게 좋았다.
안 그럼 정말 대원들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도승민 홀더.”
“예, 공대장님.”
“그거 가져오세요.”
그거.
눈치라곤 손톱만큼도 찾기 힘든 도승민이지만, 이런 상황에선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마법 가방을 챙겨와 아이템 몇 개를 꺼냈다.
영롱한 색으로 빛나는 수정구.
<파문 공격대>의 던전 공략 영상이 담긴 [기록 수정구]였다.
탁-.
나는 테이블에 꺼낸 [기록 수정구]들을 전사들에게 하나둘 건네며 말했다.
“우리 공격대가 칼라크 진영의 라이칸과 위르겐들을 사냥했던 기록입니다. 직접 확인하시죠.”
유독 내 활약이 많이 담겨 있어 좀 부끄럽긴 해도, 어쨌든 저 기록은 무엇보다 확실한 증명이다.
반신반의한 채 기록을 살피던 라이칸들도…
금세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얼굴을 지었다.
“이럴 수가…!”
“위르겐 다섯 마리를 혼자, 그것도 순식간에…?”
“인간들이 이렇게 강할 수 있다니….”
심지어 이 영상은 엔리히텐도 본 적이 없기에, 그 역시 깜짝 놀란 얼굴로 기록을 지켜봤다.
바라텐의 전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우리의 전투 영상을 보고 있는 모습은, 뭔가 굉장히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제 다들 납득하셨습니까?”
가장 먼저 대답한 건 쉴르텐이었다.
“그, 그렇소. 내가 강한 전사에게 실례를 범했군. 사과하오.”
이 새끼, 바로 하오체로 바뀌네.
어쨌든 쉴르텐의 사과를 시작으로, 다른 전사들도 분위기가 완전히 누그러졌다.
이미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 자체는 [신뢰의 증표]로 사라졌던 상황.
여기에 더해 무력까지 입증을 했으니, 전사들이 우릴 더 이상 배척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에 만족하며, 엔리히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많이 늦어졌지만 회의를 다시 시작하죠, 엔리히텐. 저한테 아주 좋은 작전 하나가 있거든요.”
“작전? 그게 무슨….”
그리고 난데없이 꺼낸 작전 제안에, 의문스러운 얼굴을 하는 엔리히텐.
나는 웃으며 그의 몸 주변을 봤다.
아무런 방어구도 없는 그의 텅 빈 옷차림.
그리고 이번 공략에 앞서…
거금을 들여 최유민과 이현호에게 부탁했던 제작 장비들.
그게 바로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