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8 - 뜨거운 승전보 (3)
“빌어먹으으을…!!”
탁한 기운이 낀 고함이 터져나온다.
목소리의 주인은 로브의 남자.
루덴아크 학파의 부학파장인 데이브였다.
그는 너덜너덜해진 로브 끝을 꽉 쥐며 자신의 허벅지를 몇 번이나 내리쳤다.
주변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그마저도 도망치는 중이라, 안타깝게도 화풀이할 곳이 자신의 몸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 새낀 정체가 뭐야!!”
또다시 데이브의 분노가 폭발한다.
갈 길이 바쁜 자신들의 앞을 막은 홀더.
아니, 막은 걸로도 모자라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던 녀석.
박진우.
새롭게 ‘구도자’의 힘을 각성한 그의 활약 때문에, 데이브와 수하 아퀼렌은 적에게 별다른 피해도 주지 못하고 해당 구역에서 도망쳐왔다.
“진정하시죠, 데이브 님.”
“어떻게 진정을 하지? 우리 루덴아크가, 고작 인간 한 명 때문에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는데!”
“…상황이 어쩔 수 없었잖습니까.”
최대한 차분하게 데이브를 설득하는 아퀼렌.
사실 그의 말이 맞긴 했다.
아무리 박진우가 각성이란 걸 해봤자 결국 데이브보단 약하기에, 원래라면 그들이 도망칠 정도로 목숨이 위험하진 않다.
하지만 한 번의 방어 성공을 기점으로…
바라텐 진영의 기세가 되살아난 게 문제였다.
인간 영웅들을 앞세워 최전방을 막아내고, 용기를 얻은 늑대들은 반격에 나선다.
칼라크 진영의 늑대들은 그 거침없는 공격에 하나둘 쓰러져갔고, 바라텐 진영은 기어코 수적 우위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유리했던 상황이 불리해지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데이브와 아퀼렌이 강력한 힘을 지닌 마법사라곤 해도, 어디까지나 마법사다.
앞선을 버텨줄 병력이 없다면 얼마든 위험해질 수 있었다.
“빌어먹을. 도재현을 잡으려고 했더니, 웬 인간 하나에 붙들려서….”
원래 그들의 목표는 도재현이었다.
박진우가 지키고 있던 지역을 가볍게 밟고 지나가, 도재현의 정면 구역에 도달해 추가 공격을 가하는 것.
황성연이 먼저 그와 싸우러 정면 구역으로 떠났었으니, 측면 구역을 뚫어 도착한다면 포위하듯 그를 압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 생각지도 않은 인간에게 가로막혀 도망치는 신세가 됐으니….
데이브로선 믿기 힘들 정도로 어이없는 현실이었다.
“아무래도 저희가 도재현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의 공격대를 너무 간과한 것 같습니다. 저희가 있던 구역뿐만 아니라, 다른 구역에서도 여기저기 패전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아퀼렌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도재현과 <파문 공격대>는 이번 전투를 완전히 이끌고 있었다.
한쪽 구역에선 ‘불의 여신’이라 칭송받는 파괴적인 마법사 계열 홀더가 활약했고, 다른 한쪽엔 웬 늑대를 탄 여자가 활을 쏘고 다닌다는 소문도 맴돌았다.
그리고 그들이 직접 겪은 박진우 구역과 원래 목표였던 도재현 구역까지.
급습이 이뤄졌던 모든 곳에.
그의 공격대가 없는 곳이 없었다.
어쩌면 이번 침투 작전의 실책은…
목표물의 주변 인물을 너무 무시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안젤라는 여전히 연락 없나?”
데이브가 이를 까득거리며 묻자, 아퀼렌이 수정구를 꺼냈다.
멀리 떨어진 그녀에게서 신호가 올 때 빛나는 아이템이었다.
“급습이 펼쳐진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발각된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했던 애를 기어코 찾아내다니.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었군.”
스파이였던 안젤라까지 색출당했다.
이건 꽤 큰 타격이었다.
그녀는 미국 아카데미에 입학시키면서까지 공들여 키운 스파이였고, 또 루덴아크 내에서도 제작에 특출난 능력을 보이던 수하였기에 아쉬움이 더욱 컸다.
도재현, 도재현, 도재현.
그 빌어먹을 이름은 어딜 가든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빌런> 때만 해도 그저 거슬리는 정도였더 그는, 이제 명실상부 루덴아크의 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게 안일하게 생각하지 말라 하지 않았나. 도재현은 그렇게 무시할 상대가 아니라고.”
그런데 옆에서, 핀잔을 주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얼굴을 덮는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
손에 쥐어진 검붉은 색의 마검.
황성연이었다.
“그러는 황성연 님도 똑같은 신세 아닙니까.”
답하는 데이브의 말에 까득거리는 소리가 함께 묻어나온다.
홀로 정면 구역으로 쳐들어갔다가 도망쳐온 신세.
도재현의 ‘싸움 회피 전략’을 생각지 못하고 무시한 건 황성연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다대일 전투로 구도가 바뀌어버린 상황 속에서, 황성연 역시 할 수 있는 건 전장을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원래라면 능글맞은 말투로 그런 그를 놀렸을 데이브지만, 지금은 전과 같은 여유가 없었다.
황성연은 표정 변화 없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서로 같은 신세군. 그래서, 다음 계획은 있나?”
“…….”
그에 데이브는 말없이 아퀼렌을 바라봤다.
자신의 상사가 뭘 원하는지 단번에 알아챈 아퀼렌은, 마법 가방 안에서 작은 보석 하나를 꺼냈다.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화려한 크리스탈.
이 아이템은 사실상 이번 던전에 왔던 가장 큰 이유였다.
“손상된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원래 그 덜떨어진 늑대들을 빼내려고 안배한 아이템인데, 단 한 마리도 이탈시키지 못했으니.”
데이브는 크리스탈을 넘겨받으며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땅에 손을 짚으며 마력을 집중한다.
던전에 들어올 때의 계획은 간단했다.
칼라크 진영을 도와 <파문 공격대>와 바라텐 진영을 쓸어버리는 것.
그리고 승리한 칼라크의 늑대들을, ‘이탈자’로 만들어 던전 밖으로 빼내는 것.
그게 계획의 전부였고, 결국 실패했다.
성공했다면 현세에 커다란 혼란과 공습을 불러왔을 계획이 실패했으니, 남은 건 이대로 던전을 나가 차선책을 펼치는 것뿐이었다.
비록 던전에서 나가려면, 들어왔던 입구를 다시 찾아가거나 던전을 공략해야만 하지만…
데이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던전을 한 번 탈출했던 ‘이탈자’니까.
“아퀼렌, 나가자마자 계획을 실행한다. 크리스탈의 여유분으로 학파장님의 이탈을 앞당길 거다.”
“예, 데이브 님!”
우렁찬 대답과 함께 이탈 마법을 보조하는 아퀼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황성연은…
피로 물든 마검을 손에 쥐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계획은 있나 보군.”
대실패로 돌아간 듯한 던전 침투와 늑대들의 이탈.
그럼에도.
루덴아크 학파에겐 차선책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 * *
“축배를 들어라…!!”
“승리다! 대승이다!!”
“바라텐을 위하여! 톨을 위하여!”
“전우인 인간들을 위하여!!”
신난 늑대들의 환호성이 터지고 승전보가 여기저기 울린다.
대승.
바라텐 역사에 유례없을 대승으로 전투가 끝났다.
새벽에 일어났던 급습과 압도적인 숫자 차이.
그 외 여러모로 불리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기적이라고 봐도 될 정도의 승리였다.
“도재현, 괜찮나?”
쏟아지는 자축 속에서, 엔리히텐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나는 [드래곤 브레스]로 전투를 거의 마무리 지은 이후, 모든 마력과 체력을 다 쓰고 지쳐 바닥에 뻗어있었다.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어서, 누운 채로 그에게 답했다.
“일어나진 못하겠군요. 몸은 괜찮습니다.”
“괜찮다, 그대로 있어. 그대는 그럴 자격이 있다.”
“엔리히텐, 혹시 황성연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까 저랑 싸우던 인간 말입니다.”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을 묻자…
엔리히텐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미안하다. 그대에게 매우 중요한 적인 것 같았지만, 놓치고 말았다. 워낙 특이한 능력과 강한 힘을 보유한 탓에 억지로라도 붙드는 게 쉽지 않았다.”
“아….”
그 대답엔 나 역시 아쉬움을 삼켰다.
황성연은 S급 홀더의 능력치 및 룬 세팅, 그리고 사기급 아이템인 마검 [다인 슬라이프]를 보유한 남자.
유일한 적수였던 내가 전투에서 빠진 이상, 그를 붙잡아두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돈 예상했지만, 역시나 놓쳐버리니 살짝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쩔 수 없죠. 마크를 안 한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했는데 못 잡은 거니까. 그럼 칼라크 진영은 어떻게 됐습니까?”
황성연과 루덴아크 학파.
인간들과 홀더 계가 앞으로 풀어가야 할 커다란 숙제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건 전쟁의 승리다.
이번엔 엔리히텐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완전한 대승이다. 칼라크 녀석들의 부대 중 총11개 부대가 전멸했고, 12명의 각성 전사가 사망했다. 비록 톨 칼라크인 블레이크와 몇몇 부대가 살아서 울펜서로 도망치긴 했지만, 놈들은 보급로도 끊긴 상황. 이대로 전진하면 전쟁은 우리 바라텐의 승리다.”
기적에 가까운 대승리.
물론 바라텐 진영 라이칸들도 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심지어 우리 <파문 공격대>에도 사상자가 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결국 우리가 승리해냈다는 것이다.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본다.
분명 새벽을 가득 채웠던 꽉 찬 보름달은 사라지고…
어느새 하늘에선 동이 트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엔리히텐.”
“그대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하하. 제 억지스러운 작전도 다 들어주셨잖습니까. 엔리히텐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라이칸 전사들의 신뢰를 얻게 된 건 내 능력도 있었지만, 엔리히텐이 날 믿고 밀어붙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마 그가 아니었다면 이번 던전 공략은 상당히 어려웠겠지.
그에 전하는 감사인사에, 엔리히텐은 싱겁게 웃었다.
“별말을 다하는군. 좀 쉬어라. 이따 보지.”
거칠게 나고 자란 늑대 전사답게.
역시나 인간다운 인사는 없었다.
하지만 그 무미건조한 말에 오히려 승리가 더 실감났다.
이겼다.
씨바, 진짜 이겼다.
여전히 흙투성이인 바닥에서 뒹굴며…
나는 그 승리를 온전히 만끽했다.
그리고-.
[환상의 호흡! 깊은 신뢰가 쌓인 당신과 당신의 계약자는, 이제 서로가 같은 전투에서 활약할 때 더 빛을 발합니다. 용언으로 맺어낸 약속의 이해도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용언이 맺은 약속’ 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 ]
[룬의 성향으로 통솔을 10 획득합니다.]
[계약자들을 옭아매고 있던 속박의 고리가 마침내 풀립니다. 당신은 이제 온전한 자격을 갖춘, 두 계약자의 주인입니다. (*통솔 수치가 부족해 두 계약자를 동시 소환하는 건 여전히 불가합니다.)]
[계약자 ‘티르본드(본 드래곤)’의 ‘마력지배’ 룬과 ‘저주받은 용언’ 룬의 제한이 풀립니다.]
[계약자 ‘아스(아스피도켈론)’의 ‘마력지배’ 룬과 ‘용맹의 뿔피리’ 룬의 제한이 풀립니다.]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결투에서의 높은 기여도로 인해 승리가 인정됩니다. 룬 사냥꾼의 신묘한 힘으로, 상대방의 룬 하나를 복제할 수 있습니다. 복제할 룬을 선택해주세요.]
[중복되는 룬입니다! … … 해당 룬의 파생스킬만을 복제할 수 있습니다.]
[파생스킬 ‘주황색 버프하울링’이 새로이 추가됩니다.]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 … ]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 … ]
…
…
승리를 자축해줄 정보창들이 우수수 올라왔다.
그 어마어마한 양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공략 다 끝난 것도 아닌데.’
정말 고생 끝에 낙 하나는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