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5 - 고해성사 (1)
“데이브 님.”
어둠이 짙게 깔린 방.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로브에 감싼 남자를 불렀다.
루덴아크 학파의 부학파장, 데이브와 그 수하인 아퀼렌.
그들은 던전 <울펜서>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오며 다시 은거지를 구축한 상태였다.
“예상대로였습니다.”
“…안젤라 말이냐?”
“그렇습니다. 도재현과 파문 공격대에게 붙잡혔고, 그대로 현세로 끌려와 한국 홀더 협회에 호송됐다고 합니다.”
연락이 끊긴 순간부터 당연했던 수순.
까가강-
하지만 소중한 학파원 한 명을 잃었다는 사실에, 데이브는 쥐고 있던 램프를 부숴뜨렸다.
아니, 사실은 소중한 학파원이라서가 아니었다.
도재현.
그 빌어먹을 애송이에게 또 당했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어서였다.
“처리는?”
“깔끔하게 진행했습니다. 트리거만 건드리면 돼서 원격으로도 간단했습니다. 이제 안젤라는 아무런 인지능력이 없는 백치가 됐을 겁니다.”
“그래.”
다만 이쪽에서도 단순하게 스파이를 파견한 건 아니었다.
언제든 안젤라를 버림패로 쓸 수 있는 장치는 마련해뒀었다.
정작 그녀는 그 사실을 몰랐겠지만.
“황성연은 뭘 하고 있지?”
“지정받은 방에 가만히 있습니다. 가끔씩 제물로 데려온 이들을 살해하긴 합니다만…”
“그건 괜찮다. 어차피 생체와 사체를 나눠서 제물로 써야 하니까.”
살육에 미쳐 앞뒤 안 가리고 인간을 죽이는 황성연이었지만, 데이브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단순한 면이 그를 활용하기 좋았다.
마검의 진정한 소유주.
그 위험한 존재를 다루는 건, 아무리 데이브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니까.
목적성이 있는 협력이 오히려 더 편했다.
“아퀼렌. 계획을 더 앞당긴다.”
“더… 말입니까?”
“그래. 슬슬 홀더들을 제물로 데려와라.”
“……!!”
충격적인 말에 아퀼렌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가까스로 그 명령에 반문하진 않을 수 있었다.
데이브는 명령에 토 다는 걸 제일 싫어하는 상사였다.
“알겠…습니다.”
단번에 급상승한 난이도와 위험도.
들키면 모든 게 끝장날 수도 있는 계획.
그러나 아퀼렌은 조용히 그 명령에 따랐다.
그게 루덴아크 학파의 방식이었다.
* * *
-<파문 공격대> 내 대활약! 문가은의 다음 행보는?
-홀더 임현의 극찬, “문가은은 우리 팀의 핵심이었다.”
-벌써 A급 홀더 승급 심사? 아빠를 뛰어넘으려는 딸…
-서울아카의 2학년 세대, 그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클랜에 경사가 났습니다.”
<로열> 클랜 내 간부 개인실.
문정혁은 웃음이 떠나지 않는 흐뭇한 얼굴로 기사들을 챙겨보고 있었다.
몇몇 기사는 조회수를 끌기 위해 자극적으로 적혀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딸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 기사들이었다.
“나, 참. 아주 입이 귀에 걸렸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소파 위에 평범하게 앉아있지만, 그 주변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과 옆자리에 있는 커다란 대검은… 결코 평범한 기세가 아니었다.
그러자 문정혁은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그러는 매형은 안 기쁘십니까?”
남자의 이름은 황건욱.
문정혁의 매형이자 직속 상관.
국내에 총 5명밖에 없다는 S급 홀더.
그리고 국내 3대 클랜 <로열>을 이끄는 클랜 마스터였다.
“당연히 기쁘지. 하나밖에 없는 우리 조카가 혼자 힘으로 클랜 이름을 드높였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월급만 가져가는 도둑놈들이랑 다르게 말이야.”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합니까.”
다소 과격한 표현을 쓰는 황건욱.
그러나 그만큼 이번에 문가은이 펼친 활약은 대단했다.
<파문 공격대>의 성공적인 던전 공략 이후, 적응자에 관한 정보, 루덴아크 학파, 도재현의 S급 도전 등 다양한 이슈들이 떠올랐지만… 역시 대중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건 ‘홀더’들이다.
어떤 홀더가 크게 활약했는가.
어떤 루키가 새로 탄생했는가.
임시 공격대가 창설되고 공략을 시작할 때마다, 대중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부분은 언제나 공대원들의 활약 정도였다.
-궁수 계열의 틀을 깨다! 문가은이 보여준 ‘기마궁수’의 가능성.
-세계 최초로 늑대인간 조련에 성공한 문가은, 각국 조련 계열 홀더들의 러브콜 쏟아져…
-문가은의 진짜 능력은 강신술? 발키리의 힘이란 대체 뭘까.
그중 가장 주목을 받는 홀더 중 한 명이 바로 문가은이었다.
조련 계열 룬을 통해 멀티 홀더로 발돋움한 것도 모자라, 아예 조련 대상을 A급 괴수 라이칸으로 삼는 모습을 보여줬다.
거기에 공격대 대원들을 위기에서 구출해내는 대활약을 펼치기까지.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니…
<로열> 클랜 내에선 난리가 났다.
마스터인 황건욱에게 자녀가 없어, 클랜 내에서 유일한 공주님으로 자라왔던 말괄량이.
그런 문가은이 어느새 어엿한 한 명의 홀더 몫을, 아니 몇 명의 몫을 넘치게 해내며 클랜 이름을 드높였다.
당연히 클랜원들의 환호가 쏟아질 수밖에.
심지어 마케팅 부서에선 아예 각 잡고 이를 써먹는 중이었다.
“마스터를 뵙습니다.”
화기애애하던 방 안에, 대화 주제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문가은.
<울펜서> 공략과 클랜 업무, 그리고 아카데미 개강까지 겹쳐 최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그녀였다.
황건욱은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를 안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우리 조카, 얼굴 보기 힘드네?”
“치- 다 클랜을 위해서 몸소 발로 뛰고 있으니까 그렇죠. 마스터는 잘 모르겠지만, 저 클랜 경력만 무려 2년차인 베테랑 홀더라구요.”
“하하. 그걸 내가 왜 모르겠니.”
황건욱은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손가락을 튕겨 비서를 불렀다.
그러자 비서가 웬 기다란 상자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누가 봐도 아이템을 담고 있는 듯한…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 상자였다.
“이게 뭐예요?”
“열어봐라. 선물이다.”
딸깍-
의아한 얼굴로 상자를 여는 문가은.
이내 그녀의 시야에 독특한 고대 문양이 여러 개 새겨진 활 하나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건 문가은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천근활].
제주도 설화가 담겼다고 알려진 강궁으로, 오래 전부터 <로열>에서 보관하고 있던 전설급 아이템.
당연히 궁수 계열들에겐 꿈에 그리던 활로 여겨지는 아이템이었다.
“고모부!!”
“어이쿠-”
문가은이 기쁜 마음을 주체 못하며 격식도 내다버리고 황건욱을 안았다.
그 모습에 황건욱도, 문정혁도 흐뭇하게 웃었다.
이 아이템을 그녀가 얼마나 갖고 싶어했는지 둘 모두 잘 알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졸업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우리 조카가 워낙 일을 잘 해서 말이지. 이번 공략에서 안 다치고, 크게 활약해준 상이다. 대여 아니고 완전지급이니까 걱정 말고.”
사실 이번 <울펜서> 공략에서 활약한 건 문가은뿐만은 아니다.
박진우나 김채은, 도승민 등 다양한 방면에서 굵직한 활약을 한 홀더들이 있고, 문가은 역시 그러한 신예 홀더들 중 한 명이었다.
다만 그녀는 성나연과 함께 클랜을 대표해 참여한 홀더.
<로열>의 이름을 걸고 가서, 뒤처지지 않고 크게 활약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특히 라이벌격 클랜인 <불의 심판>의 강주연에게 늘 한 발짝 밀린다는 평가를 받았던 문가은이, 이번 공략으로 비로소 비슷한 성과와 실력을 보여줬다는 점이 의의가 컸다.
“아, 그리고 혹시 도재현 그 친구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 저번 기자회견 이후로 통 소식이 없던데.”
“재현이요?”
고모부에게서 의외의 이름이 들리자 문가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곤 이내 간단히 답했다.
“아카데미 다니죠. 저처럼. 아직 학생이잖아요.”
각 클랜들의 쏟아지는 러브콜과 선물들.
언론사들의 인터뷰 요청과 많은 홀더들의 대련 요청.
심지어는 이론만이라도 좋으니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까지….
<울펜서> 공략 이후 엄청난 관심이 집중됐지만, 도재현은 그 모든 걸 다 거부하고 조용히 아카데미에 다니는 중이었다.
학생은 수업을 들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그러나 더 이상 그를 학생으로 보지 않는 국내 홀더 계 입장에선, 황당하면서도 아쉬움 가득한 행보였다.
“학생… 그렇긴 하지. 어지간한 교수보다 뛰어난 학생이지만 말이야.”
황건욱은 묘하게 웃음을 흘리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무튼 도재현 홀더가 뭔가 새로 하려는 게 있으면, 고모부한테도 꼭 좀 알려줘라.”
“새로 하려는 거요?”
“그래. 그 친구가 지금 태풍의 눈이잖냐.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나도 열심히 배워야지.”
“네에?”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건네는 황건욱.
하지만 그는 또 보자는 말을 건네며, 어깨를 두드리곤 밖으로 나갔다.
문가은은 알쏭달쏭한 얼굴로 문정혁을 봤다.
“아빠. 고모부 뭔 소리 하는 거야?”
“나야 모르지. 클랜 마스터가 하는 생각인데. 워낙 계획이 많으신 분이잖아.”
뻔뻔한 대답에 문가은이 입을 삐죽였다.
“치- 아빠는 뭐 아는 게 없어.”
그 대답에 문정혁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활을 가리켰다.
“그래도 아빠가 그 천근활 잘 쓰는 법은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거 아빠가 쓸까?”
“절-대 안 돼! 절대!”
“하하하.”
이미 자신의 물건이라는 듯 [천근활]을 꼭 감싸쥔 문가은.
그 모습에 문정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참 신기하면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항상 어리고 지켜줘야만 할 줄 알았던 딸.
엄마를 잃고 마음의 문을 닫았던 줄 알았던 딸.
그런 딸이 잘 자라나주어 어느새 어엿한 홀더이자 클랜원이 됐다.
심지어 그 실력도 출중해서 아빠를 따라잡으려 하고 있고, 거기에 스스로 낸 성과로 클랜 내 전설급 아이템까지 쟁취해냈다.
정말…
정말 너무나 대견스럽고, 기특했다.
이런 딸이 원하는 거라면.
이런 딸이 아빠에게 바라는 거라면…
그 종류가 무엇이든, 다 이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게 딸을 향한 문정혁의 진심이었다.
“아빠, 나 할 말 있어.”
그런 그의 진심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마침 딸이 말문을 열었다.
“그래, 뭐든지 말해봐라. 아빠가 다 들어줄게.”
단호한 얼굴로 대답하는 문정혁.
지금이라면 정말 뭐든지 다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 재현이랑 사귀어.”
그런데 딸에게서 나온 말은 의아했다.
재현이랑 사귄다니.
재현이가 자신이 아는 그 재현이라면…
밝혀도 이미 한참 전에 밝혔던 사실 아닌가.
뜬금없는 재고백에 문정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안다. 아빠도. 네가 저번에 말했잖니.”
“그땐 소개팅 나가기 싫어서 거짓말 한 거였어. 미안해, 아빠. 그치만 지금은 진짜로 만나고 있어. 진지하게, 누구보다 좋아하는 마음으로.”
“…뭐라고?”
순간적으로 말뜻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게 다 거짓말이었다고?
언제부터?
아니, 어디까지?
그걸 인식하기도 전에 딸의 말이 곧장 이어졌다.
“그리고 재현이 나 말고 사귀는 애 두 명 더 있어. 나도 허락한 내용이야. 한 명은 아빠도 아는 애야.”
그리고 그건.
아까의 말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의 폭탄발언이었다.
“…뭐라고?!”
딸이 원하는 거라면.
딸이 아빠에게 바라는 거라면….
그 생각들이 문정혁의 머릿속에서 길을 잃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