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6 - 클랜 창설 (5)
“오랜만이에요, 재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고, 아름다운 미소가 입가에 내려앉는다.
나는 그걸 보며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미소는 어디에서도 잘 찾을 수 없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공식석상에선 워낙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을 만날 때도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차갑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유독 내 앞에서만.
이렇듯 웃는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다.
‘웃으면 이렇게 예쁘신데….’
물론 평소에도 아름답기는 하다.
다만 미소를 보이시니, 차갑기만 하던 평소의 기세가 사르르 녹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눈 속에 핀 꽃.
이보다 더 그녀를 완벽히 설명할 단어가 있을까.
[설중매화]라는 주력룬이 누구보다 잘 어울린다.
마치 설원 속에서 아름답게 핀 꽃처럼, 홀로 고고하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거의 몇 달만에 보는 듯한 내 스승님, 유은설이었다.
“음… 너무 오랜만이라 인사도 안 받아주는 건가요?”
“아…!”
다시 떨어지는 그녀의 입과 장난처럼 들려오는 핀잔.
그제야 나는 스승님께 대답도 안 하고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
“딴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나요?”
“아뇨, 그냥….”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스승님 웃는 게 너무 예쁘셔서… 그래서 그냥, 자주 웃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라도 변명을 할까 하다가 그냥 솔직히 말했다.
어차피 스승님이라면…
그 정도 거짓말은 곧바로 알아챌 것 같아서.
“…네?”
하지만 스승님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내 말에 곧장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셨다.
시선은 흔들리고 몸짓은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속으로 내 머리통을 때리듯 날 꾸짖었다.
‘아오,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그냥 대충 핑계나 댈 걸.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스승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지 걱정됐다.
“흠흠. 이번엔 러시아 쪽 갔다 왔다고 하셨죠?”
그래서 재빨리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스승님은 나와 <초월자의 방: 카날레스>를 공략한 이후로 국내외 곳곳을 돌아다니셨다.
목적은 딱 하나.
자신의 룬을 다각도로 성장시킬 방향을 찾기 위해.
이미 특정 분야에서 정점의 실력에 있고, S급 홀더에 다다르며 명예 또한 모두 얻었는데도… 그녀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했다.
그녀가 국내 홀더들에게 무수한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러한 초심과 열정 때문 아닐까.
어쨌든 스승님은 이번엔 러시아 쪽을 잠시 갔다가 오늘 귀국하셨다.
“아… 네. 큰 소득은 없었지만요.”
잠시 당황하셨던 스승님은 금세 안색을 되찾았다.
평소의 차가운 듯한 분위기가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이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재현은 제가 없는 동안 꽤 큼지막한 일들을 벌였던데요?”
…왠지 모르게, 상당히 어색해 보이는 미소다.
혹시 아까 내 말 때문에 웃으시는 건가?
‘…과대망상도 이 정도면 병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허튼 생각을 치워버렸다.
“네. 그것 때문에 요즘 골머리 좀 앓았죠.”
“그런 것치곤 클랜원들이 화려하던데요? 저랑 오래 활동했던 동료들도 데려갔던데.”
“운이 좋았습니다.”
물론 마냥 운만 좋았던 건 아니다.
신규 클랜은 정규 클랜에 비해 모든 점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하기에, 조건과 대우를 좀 파격적으로 내걸긴 했다.
실력 있는 무소속 홀더들이 확실히 넘어올 수 있는 유인을 만든 것.
덕분에 우려가 쏟아지는 클랜임에도 다수의 실력자들이 입단을 확정했었다.
…그중에서도 임현이나 정선영 같은 초고급 인력들이 들어온 건, 정말로 운이 좋은 케이스지만 말이다.
“그럼 클랜원 모집은 다 끝난 건가요?”
스승님이 묘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에 난 긴장을 삼키며 조심스레 답했다.
“한 명 더… 영입하고 싶은 분이 있긴 한데요.”
“있긴 한데…?”
“그분이 들어오실지 모르겠어요. 워낙 대단한 분이라.”
살짝 웃음을 흘리며 말하자 스승님도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돌려 말하지만 서로 그 대상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자타공인 암살자 계열의 정점.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S급 홀더….
유은설.
눈앞의 그녀가, 이번 클랜원 영입의 마지막 퍼즐이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금세 그녀의 입이 떨어진다.
“저도 생각은 있어요.”
“저, 정말이세요?”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되물었다.
빙빙 돌리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 것도 그런데, 그 내용이 긍정의 신호라는 점이 더 놀랍다.
국내 3대 클랜에도 딱 한 명씩만 있는 S급 홀더.
그런 존재가 새로 만들어질 클랜에 와준다면…
그 위상은 지금과 비교도 안 되게 커질 수 있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스승님은 오른손을 들며 손가락 하나를 폈다.
“조건이요?”
“네. 입단 계약이나 연봉 같은 건 크게 상관없어요. 그건 얼마든 재현이 원하는 대로 해도 좋아요. 단지… 궁극스킬.”
“궁극스킬?”
“재현이 일전에 말했던 궁극스킬 말이에요. 울펜서 공략 도중에 미완성으로 찾아냈다던 스킬. 그 스킬의 완성을 같이 연구하고, 그 후엔 저한테도 가르쳐줬으면 해요.”
“…아!”
<울펜서> 공략 도중 수없이 많은 위르겐을 쓰러뜨리며,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로 만들어냈던 궁극스킬.
[매화검법] 룬, [낙화의 미학].
적 무리를 파고들어간 후, 빠르게 모든 적을 긁고 나오는 스킬.
물리 공격 스킬 중에선 꽤 드문 편인…
상당히 강력한 성능의 광역기였다.
아직 5번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완성된 스킬은 아니지만, 완성된다면 암살자 계열 힘을 다룰 때 주력으로 쓸 수 있을 만한 능력이다.
던전 공략을 마쳤을 때 스승님께 이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걸 계속 기억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이번엔 재현이 날 가르치는 거예요. 어때요?”
그리고 작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흔드는 스승님.
아까 괜한 말을 꺼내서일까?
오늘의 그녀에게선 평소답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는 뭔가 홀리듯이 대답하고 말았다.
“…콜.”
궁극스킬 하나로 S급 암살자 계열을 영입한다?
이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거래였다.
* * *
-S급 홀더 유은설, 드디어 무소속 벗어나 클랜 입단!
-유은설, 도재현의 품으로… 스승과 제자의 만남.
-S급 홀더에, A급 베테랑들이 수두룩. 대형 클랜 부럽지 않다!
-황금세대가 모두 모였다! 2학년 클랜원들을 주목하라.
…
…
스승님의 신규 클랜 입단 소식은 빠르게 퍼지며 기사화됐다.
그동안 솔플만을 지향해온 암살자 계열의 정점이 클랜에, 그것도 이제 막 새로 만들어지는 클랜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꽤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랜 시간 솔플로 활약해온 베테랑 클랜원들.
황금세대로 불리는 2학년 학생들과 다양한 유망주들….
기대되는 자원들이 상당히 많았다.
아무리 신규 클랜이라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 완성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 클랜을 향한 기대감도 곳곳에서 고조됐다.
“그럼 바로 내일부터 창설을 선포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겠습니다.”
“편의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협회장님.”
“하하. 별 말씀을 다하는군요. 도움받은 걸로 치면 협회가 훨씬 더 많죠.”
계획 단계였던 클랜 창설이 구체화 단계로 접어들었다.
모집한 클랜원 명단과 일반인 직원 선발, 내부 부서 설정, 단기 운영 계획 등…
아주 기초적인 단계의 클랜 구성을 마무리했고, 아카데미 및 홀더 협회와의 관련 미팅을 모두 마쳤다.
준비는 끝났고, 선포만 하면 되는 상황.
실행에 옮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특히 나보다 더 오랫동안 이를 준비해 온 탁원호 교수 덕분에, 우리 클랜의 창설은 상당히 빠르고 간결하게 진행됐다.
-도재현, 클랜 창설! 이름은 <이블 헌터>…
-드디어 베일 벗은 <이블 헌터>, 어떤 행보 걸을까?
-각 클랜 스카우터들, 입 모아 “역대급 신규 클랜.”
…
…
클랜 명칭은 <이블 헌터>로 정해졌다.
직역하자면 ‘악을 처단하는 사냥꾼’이라는 뜻인데, 클랜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안티 빌런>의 기치를 잇고 또 루덴아크 학파를 쫓는 우리 클랜의 첫 번째 목표를 담은 이름이기도 했다.
‘…사실은 룬 사냥꾼 때문에 붙인 거긴 하지만.’
숨겨진 뜻도 있다.
내 주력룬인 [룬 사냥꾼]의 ‘사냥꾼’을 중심으로 만든 이름이라는 것.
[룬 사냥꾼]은 아직 세간에 드러나지 않은 룬이기에, 아무도 이 의미에 대해선 모르긴 하지만… 그동안의 사건들을 모두 겪은 후, 내 힘으로 직접 만든 클랜이라는 점에서 꽤 의미 있는 이름이었다.
“운 좋게 클랜 타워도 빨리 구했고.”
<이블 헌터>의 클랜 타워는 아카데미 근처에 있는 한 빌딩을 중심으로 완성됐다.
원래라면 부지를 구하고 내부를 만드는 데에 엄청난 시간이 소요됐겠지만, 마침 근처에 클랜 타워로 개조 중이던 부지와 빌딩이 있어 이를 구매하며 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
해당 건물을 소유하고 있던 클랜은 <용광검로>.
그들은 어째선지 이미 준공이 끝나가던 건물을, 우리 클랜에 매우 합리적인 가격으로 넘겼다.
-우리가 상당히 늦은 편이니, 이 정도는 해야 따라잡을 수 있겠지. 마음 같아선 건물 정도야 선물로 주고 싶지만,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도 있을 테니… 아무튼 이걸 기회로 우리가 친해졌으면 좋겠군.
우호 클랜 협정에서 처음 만난 송도혁.
그는 클랜 타워를 거래하며 그런 알쏭달쏭한 말을 던졌다.
뭐가 늦은 거고, 뭘 따라잡는다는 걸까….
역시 S급 홀더들은 어딘가 하나씩 괴팍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용괌검로>의 호의 덕에, 우리 클랜은 상당히 웅장하고 화려한 클랜 타워를 빠르게 얻을 수 있었다.
“진짜… 클랜을 만든 거구나, 내가.”
앞에 서서 마주한 커다란 빌딩.
일명 EH타워라 불리는…
‘우리 클랜’의 클랜 타워.
이를 눈에 담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난다.
모두가 의심하고, 나조차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순간.
그게 마침내 현실이 된 것이다.
<이블 헌터>.
나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 창설해낸 클랜.
나는 오늘부터 이 클랜의 마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