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9 - 실마리 (3)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버려진 연구소’에 발을 디딥니다. 음습한 기운과 떠도는 원혼들이 살갗을 타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능력치 중 일부가 무작위로 대폭 하락합니다.]
[‘명경지수’ 룬의 특별한 힘이 대상의 맑은 정신을 유지하게 합니다. 어떠한 저주나 상태 이상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들어오자마자 화려한 정보창들이 눈앞을 반긴다.
입장부터 무작위로 능력치 하나를 감소시키는 디버프.
나는 [명경지수] 룬으로 미리 방지했기에 정확한 수치를 몰랐지만, ‘대폭 하락’이라는 표현이 적힌 걸 보면 만만한 수준은 아닌 듯 보였다.
게다가 일전 <울펜서>에서의 <바라텐 진영>에 이어, 또다시 고유 명칭 하나가 나왔다.
<버려진 연구소>.
이 던전의 이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던전 내에 있는 특정 구역일 수도 있는 이름.
뭐가 됐든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딘 곳이, 결코 평범한 던전은 아님을 말해줬다.
게다가.
[던전의 ‘적응자’들이 이미 정비를 마친 던전입니다! 일반적인 던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적응자들로부터 허가받지 않은 자들은 던전 내 모든 대상의 적이 됩니다!]
그동안 던전 공략을 해오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불길한 형태의 정보창까지 앞을 가렸다.
불길함은 3초도 되지 않아 현실이 됐다.
“마스터! 적의 공격입니다!”
탐색에 능한 궁수 계열 클랜원 한 명이 소리친다.
그와 동시에.
쿠그그그-
쉬이이이-!!
불길이 치솟은 커다란 바위가 우리를 덮쳤다.
보이는 그대로가 맞다면 저건 불속성 마법, 그중에서도 메테오 류의 마법이다.
자잘한 불 바위를 여러 개 투하하는 [라이트 메테오]가 아닌, 거대한 크기와 이글거리는 불길의 [파워 메테오].
불속성 공격마법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마법이었다.
게다가 [파워 메테오]의 불꽃은 특이하게도…
지독하게 캄캄한 검은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마법을 시전한 이가 평범하지 않음을 알려주는 현상이었다.
“젠장, 다들…!!”
“……!!”
콰,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마력량과 빠른 속도의 투하.
마치 미리 기다리고 준비한 듯한 그 공격에…
광역 방어를 펼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한곳에 모여 있던 클랜원들은 각자 알아서 방어하거나 회피를 시도해야만 했다.
“크읍….”
“방패를…!!”
다행히 우리 클랜은 전원이 출중한 실력을 갖춘 소수 정예.
반응이 전혀 느리지 않았고, 이후 대처도 깔끔했다.
개중엔 방패를 들고 직접 메테오를 막아내는 클랜원도 있었다.
덕분에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한 방 먹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던전의 입구부터 준비된 마력 공격이 날아들다니.
아무리 적응자의 던전이라지만 너무 불리한 구도였다.
<초월자의 방: 플러비우스> 때도 입구에서부터 괴수가 나타나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괴수였고 이렇듯 정확히 우리를 겨냥하고 날아드는 공격은 아니었다.
즉, 지금 우리에게 [파워 메테오]를 날린 놈들은 처음부터 우릴 적으로 생각하고 공격을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마스터, 저기!”
처음 공격을 탐지한 클랜원이 또다시 손을 가리켰다.
시야 바로 정면에 보이는 곳.
허허벌판처럼 보이던 작은 언덕.
그 위에서…
우르르르-!
하는 굉음과 함께, 웬 말 형태의 괴수들 무리가 떼거지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물량에 클랜원들도 모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켄타우로스?”
“아닙니다! 상체 위가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만티코어인가? 하지만 날개가 없는데…!!”
“젠장- 정보가 없는 키메라 같습니다.”
말의 다리를 지닌 채 달려오고, 상체 키가 상당히 커서 당연히 B급 괴수 켄타우로스인 줄 알았는데… 거리가 가까워지니 그와 다른 형상이 정확하게 보였다.
하체는 말, 상체는 사자.
날개는 없고 꼬리는 정상이라, A급 괴수 만티코어도 아니다.
오히려 기동성과 위협성에선 앞선 두 괴수를 뛰어넘는 듯한 움직임.
완전히 처음 보는 형태의 괴수였다.
‘…어느 정도로 강한 거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베어 문다.
키메라 형태의 괴수들은 그동안 다른 던전에서도 종종 나오곤 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달려드는 녀석들은 전혀 정보가 없는 키메라다.
아마 루덴아크 학파에서 ‘제작’했을 확률이 높은 괴수.
당연히 그에 대한 특징도, 능력도, 심지어 등급조차 산정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선 직접 부딪혀보며 실력을 확인해야만 했다.
“부마스터, 지휘를!”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스승님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미 내가 최전선에 뛰어들 걸 예상하고 있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유은설의 강점은 단순히 S급 홀더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대형 클랜이 아닌 무소속 홀더로 지내오며 공격대 및 파티 경험이 상당히 많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지휘를 맡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클랜 마스터인 나와 함께 전투한 경험이 많아, 나에 대해서조차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
그 모든 강점들을 동시에 보유한 게 유은설이다.
때문에 그녀는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남은 클랜원들을 지휘했다.
그녀를 클랜원으로 영입하고 부마스터로 임명한 건… 어쩌면 <이블 헌터>를 만들고 난 후, 최고의 선택일지도 몰랐다.
‘가자, 제이텐.’
-기다렸습니다, 주인님.
나는 그대로 [계약의 부름]을 통해 제이텐을 불러왔다.
평소라면 티르본드를 불러왔겠지만, 지금은 적들이 단번에 몰려오는 상황에 전장은 육지.
돌격류 룬을 보유한 제이텐이 훨씬 효과적인 선택이었다.
아우우우-!!
쿠, 구구구-!!
제이텐의 울음소리와 함께 [늑대의 질주]가 펼쳐진다.
녀석은 가진 바 모든 속력을 동원해 엄청난 속도로 던전 안을 질주했다.
적들 또한 돌격류 룬을 보유하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제이텐의 돌격은 뒤늦게 출발한 불리함을 완전히 이겨내고 있었다.
구구구구-!!
순식간에 적들과의 거리가 좁혀진다.
그들과 맞닥뜨리기 직전의 순간.
내 손엔 이미 [와이번 스피어]가 들려있었다.
‘액셀 피어싱.’
전매특허 선제 타격기가 키메라 무리에게 작렬한다.
비록 내가 직접 [천하제일 경주마]를 쓴 건 아니지만, ‘탈것’이 스스로 돌격을 사용해 이미 가속도가 붙은 상황.
[액셀 피어싱]은 돌격의 진행 중이라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까, 가가가-!!
파아아앗-!!
크허허헝-!!!
마력이 담긴 창끝이 적들의 가죽을 갈라낸다.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와 강렬한 파공음.
그리고…
사방에 튀기는 적들의 피와 살.
우리와 맞닥뜨린 적들의 무리가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
제이텐의 돌격과 내 [액셀 피어싱].
이 콤보가 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곤 해도, 이렇듯 적들이 쉽게 쓰러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난 직감했다.
‘이 새끼들, 약하다.’
물론 그렇다고 C급 이하의 괴수들인 건 아니다.
정보가 없어 우려했던 바에 비해 약하다는 거지, 놈들은 최소 B급~A급 정도의 마력과 기세를 갖추고 있는 괴수들이었다.
<울펜서> 공략 때로 치면 위르겐들보다 조금 약한 정도.
그렇다면 뒤에 있는 클랜원들의 협력으로 충분히 이겨낼 전력이었다.
‘제이텐.’
-알겠습니다.
제이텐은 내가 생각한 바를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늑대인간이지만 전투 센스가 상당히 뛰어난 녀석이다.
무작정 둘이서 뛰어들어온 지금 상황에선, 우리 둘로 적들을 휩쓸 순 없단 걸 제이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이텐의 돌격이 끝나는 시점에…
그대로 녀석의 몸을 박차고 뛰어올라 하늘로 도약했다.
[계약자 ‘제이텐’이 ‘계약의 법칙’ 룬의 파생스킬, ‘긴급탈출’을 사용했습니다.]
거의 수백 마리에 가까운 키메라.
그들이 모조리 우릴 향해 달려들던 상황.
나는 거기서 하늘로 날아오르며 달아났고, 제이텐은 [긴급탈출] 스킬을 사용하며 아예 던전에서 사라졌다.
서로의 의도를 파악하고 만들어낸 호흡.
처음부터 우린 녀석들을 상대할 계획이 없었던 거다.
그리고.
‘계약의 부름.’
다시 한번.
잠자고 있던 또 다른 계약자를 불러온다.
두 계약자를 한꺼번에 불러들이는 일.
이는 원래라면 내 통솔 능력치 상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강동욱 교수 및 협회로부터 대여받은 [융화의 질서] 덕분에 이런 기행이 가능해졌다.
적어도 난 계약과 관련된 행동에 있어…
거의 모든 제약이 사라진 상태였다.
-오랜만이다, 주인.
‘그러게. 진짜 오랜만이네.’
불러들인 계약자는 티르본드.
애초에 하늘 위로 도약했으니, 떨어지지 않으려면 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나는 공중에서 깔끔하게 티르본드의 등 위로 착지했다.
그리고 곧바로 마법 가방에서 신호탄 하나를 꺼내 하늘 위로 쏘아올렸다.
<지금의 적들은 충분히 막을 만하다.>
뒤에 있는 클랜원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신호탄.
사실상 이 작업을 위해서 아까 그토록 무모하게 적진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앞을 내다보며…
비행을 시작한 티르본드에게 물었다.
‘뭘 해야 할 진 알지?’
-인간.
‘그래. 괴수들 틈에 섞인 인간을 찾아야 해.’
평소엔 마력석에 미친 놈 같아도 전투에 있어선 무서운 판단력을 보이는 티르본드.
녀석과 내 시선이 동시에 닿는 곳은 하나.
던전 입장 때 [파워 메테오]를 시전한 마법사.
어쩌면 루덴아크 학파의 일원일 수 있는 적.
놈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