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구역 - 버려진 연구소 (5)
“어차피 … … 한 거 아닙니까?”
“상관은 없다. … … 이니까.”
최아린은 희미한 의식 속에 눈을 떴다.
뚝뚝 끊긴 대화가 머릿속에 들어왔지만, 깨질 것 같은 두통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뭐지?’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앞을 본다.
눈앞엔 웬 검은색 제복을 입은 남자 둘이 서 있었다.
“그럼 예정대로 제물로 쓰면 되겠군요.”
“그래. 보유 마력이 뛰어난 년이라, 이탈을 마친 학파장님의 힘에 크게 도움이 될 거다.”
흐릿한 시야에 초점이 잡히고…
귀에 들리는 소리도 선명해진다.
이제야 저들이 나누는 대화를 완전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을 천천히 곱씹을 때쯤, 최아린은 떠올렸다.
‘나, 납치됐었지.’
…그녀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을 말이다.
마력석 직거래를 위해 나왔다가 특수한 힘에 기절당하고, 이후 어딘가로 납치됐었다.
꽤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것 같은데…
눈을 뜨고 보니 지금의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아차, 아퀼렌 님. 혹시 사후 처리는…”
“…맘대로 해라. 그건 네 몫이니.”
“헤헤, 감사합니다.”
하지만 납치된 그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두 남자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다시 3구역으로 넘어가십니까?”
“음. 학파장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니까. 너도 일을 마치는 대로 넘어와라. 이제 이 연구소의 워프 게이트도 슬슬 폐쇄해야 해. 쓸 데가 별로 없어.”
“알겠습… 음?”
헙-.
자신도 모르게 거친 숨이 삼켜진다.
비열한 얼굴로 굽신거리던 앞쪽의 남자가, 문득 최아린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 옆에서 지시를 내리던 남자의 눈도 이쪽을 향했다.
그녀를 납치한 가해자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흐흐. 제물이 깨어났군요. 마법을 세게 걸어서 그런지 유독 오래 걸렸습니다.”
“…또 듣기 싫은 비명이 들리겠군. 알아서 처리해라.”
“예, 아퀼렌 님.”
제물.
낯설기 짝이 없는 단어가 벌써 두 번째 들려온다.
그리고 똑똑한 최아린은, 그 말이 내포한 의미를 눈치챌 수 있었다.
‘납치한 사람들을 제물로 쓰는 거야.’
뭐에 쓰는 제물인지, 어떤 식의 제물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비정상적인 행위가 실제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 정돈 알 수 있었다.
연구소 안의 분위기와 남자들의 표정, 주변의 넘실거리는 마력.
이곳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지금의 이야기가 장난이 아니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도망쳐야 하는데.’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방법을 찾아본다.
하지만 전투 계열도 아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온몸이 깔끔하게 구속돼 있고, 쓸 만한 마도구는 모조리 뺏긴 것 같다.
“…….”
순간 두려움이 몸을 엄습해왔다.
이대로 허무하게 정체도 모르는 이들의 실험 대상이 되는 건, 눈물이 날 만큼 무서운 일이었다.
아무리 최아린이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라지만…
아직은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학생 홀더.
그녀가 견뎌내기엔, 지금 상황은 너무도 버거웠다.
“흐흐. 무서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넌 위대한 학파장님의 이탈에 큰 공로를 끼칠 제물이 되는 거니까….”
그러나 최아린의 희망을 짓밟듯, 검은 제복의 남자는 비열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절망이 뒤덮은 공간.
저항할 수 없는 상황.
그렇게 거친 손길이 최아린의 어깨에 닿으려던 순간.
“쇄도하라.”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다행히 늦지 않았다.
궁극스킬 [왜곡의 그림자]를 통해 좁혀진 거리.
최아린에게 다가가던 남자의 목에 [참회자의 검]을 꽂아넣어 꿰뚫은 후, 나는 빠르게 후속타를 이어갔다.
심장 부근으로 예상되는 등 뒤를 세 번 연속 베어낸다.
파생스킬 [연격]의 사용이다.
[연격]은 대부분의 전사 계열 홀더들이 사용하는 ‘기본스킬’과도 같은 파생스킬이지만, 지금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제는 [무술의 달인] 룬도 13레벨에 올랐고, 그 하위룬으로 편성된 [검]도 원래라면 20레벨에 가까웠을 숙련도를 보이는 상태.
룬의 숙련도가 올라간 만큼, 당연히 그 파생스킬의 파괴력도 급증한 것이다.
‘여기서 폭발까지 시키면 끝인데.’
[폭발하는 검의 기세]를 추가로 사용하면 확실히 끝장을 내겠지만, 바로 앞에 최아린이 있는 이상 그런 자극적인 능력을 쓸 순 없었다.
안 그래도 바로 앞에서 놈을 처치하느라, 피도 많이 튀고 잔인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상황이 상황인 터라 어쩔 수 없었다곤 해도, 그녀에게 꽤 부담이 갔을 광경이었다.
나는 그녀가 최대한 다치지 않도록 다른 방향으로 공격을 이어갔다.
“끄, 끄읅…!!”
무구교체술로 무기를 바꿔 너클을 손에 끼고, 놈의 뒤에서 앞으로 이동해 가슴을 가격한다.
목에서 터져나오는 피 끓는 소리.
그와 함께 강렬한 타격으로 놈이 뒤로 쭉 밀려났다.
사실상 전투력과 의지를 모두 잃은 상대에게 마무리 타격을 가한 것이었다.
‘포이즌 어택은 덤으로 줄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스킬로는 [맹독] 룬의 [포이즌 어택]을 선물했다.
나름 11레벨까지 오른 [맹독]의 파생스킬이기에, 어찌저찌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결국은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최아린 홀더.”
“네, 네?”
시간이 많지 않지만, 그녀의 안전한 구출을 위해 말을 건넨다.
이미 그녀를 묶고 있던 구속은 모두 푼 지 오래였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요. 지금 상황이 좀 급해서, 최아린 홀더가 직접 도망쳐야 해요. 혹시 나가는 쪽에 마력으로 남겨놓은 흔적들 보여요?”
최아린은 판단력이 좋은 홀더다.
납치당하고 봉변까지 당할 뻔한 상황이었지만, 내가 하는 말의 의미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끄덕끄덕-
그녀의 고갯짓이 보이자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흔적을 따라서 도망쳐요. 길은 다른 홀더가 터줄 거예요.”
이곳엔 루덴아크 학파원만 있던 게 아니다.
P구역 연구소에서 마주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형태의 키메라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량의 상대는…
오롯이 박지환 혼자 맡고 있었다.
“그럼, 조심히 가요!”
“자, 잠깐…”
탁, 탁-!
최아린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움직인다.
시간이 없었다.
박지환이 키메라들을 홀로 상대해줄 동안, 나는….
팟-!
카아앙-!!
“크윽….”
“도망칠 생각 마. 두 번은 안 놓쳐.”
[워프 게이트]로 도망치려던 방 안의 또 다른 남자.
루덴아크 학파의 일원을 잡아야 했으니까.
게다가 그냥 일원이 아니다.
인상착의를 보니, 이 자식은 박진우가 말했던 ‘아퀼렌’이라는 마법사가 분명했다.
부학파장 데이브와 함께 있었다던 루덴아크 간부였다.
“빌어먹을… 끝까지 방해를 하는구나, 도재현.”
“내 이름도 아네?”
“그럼 어떻게 모를까? 네놈 때문에 예정됐던 계획이 어그러지고 앞당겨지고 난리를 쳤는데!”
성질 있는 녀석이구나.
나는 분통을 터뜨리는 아퀼렌을 가볍게 무시하며, 녀석에게 더욱 깊숙이 검을 찔렀다.
평범한 공격은 아니다.
[엘리멘탈 마스터]를 활용해 담은 ‘물’의 속성.
거기에 아까의 남자를 쓰러뜨릴 때, 이미 속성을 여러 번 변환하며 스택을 4번이나 쌓아놨다.
즉, 지금의 찌르기는 ‘체인지 스트라이크’ 효과가 풀 스택으로 쌓인… 그리고 내가 가장 잘 다루는 물속성이 담긴 공격인 것.
검을 쓸 때의 나는, 스킬을 쓰지 않아도 강력한 일격을 먹일 수 있었다.
찌르르으-
캉- 카강-!!
그런데 아퀼렌의 방어는 생각보다 견고했다.
녀석의 몸 주변엔 검은색 마력으로 구성된 [마력 방어막]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 방어막이 마치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내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아니, 단순한 마력 방어막이 아니야.’
[마력 방어막]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내구력엔 한계가 있다.
이미 100을 넘어선 내 근력과 속력 수치.
그리고 [전사들의 강화술] 내에 있는 다양한 보조룬들.
어지간한 방어 능력으로도 쉽게 막아낼 수 없는 게 내 물리 공격이었다.
아퀼렌이 만들어낸 ‘검은색 방어막’은… 분명 기존의 마력 방어에 덧대 물리 방어까지 병행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눈치채도 늦었다. 크루이그의 블랙 쉴드를 어떻게 그리 쉽게 뚫은진 모르겠지만, 내 블랙 쉴드는 만만치 않을 거다.”
아퀼렌이 날 향해 으르렁거리며 말한다.
그걸 들으며 난 생각했다.
‘이 새끼, 지 정보를 술술 말해주네.’
아무래도 이 특이한 방어막의 정체는 [블랙 쉴드]라는 스킬 혹은 룬 효과인 모양이다.
그리고 아까의 크루이그라는 적을 상대할 때, 내가 어떻게 이 쉴드를 쉽게 뚫었는지 또한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왜곡의 그림자 효과 때문이구나.’
궁극스킬 [왜곡의 그림자]는 마치 순간이동하듯 적의 뒤를 점거하는 게 메인이지만, 그 외에도 두 가지의 추가 효과가 더 있다.
그건 해당 공간의 마력 배열을 망가뜨린리는 것과 다음 공격이 상대의 내구력을 100% 무시한다는 것.
전자의 효과 덕에 [블랙 쉴드]의 마력적인 방어를 무너뜨렸고, 후자의 효과로 물리 방어를 완전히 무시했기에… 크루이그라는 녀석은 반격의 기회도 없이 쓰러진 거였다.
캉-
카그그그-!!
[참회자의 검]이 힘 대 힘으로 부딪히며 갉아 먹히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에 곧장 뒤로 떨어지며 검을 뗐다.
이대로 계속 부딪혀도 절대 밀리진 않겠지만….
‘정면에서 마법을 맞을 수도 있어.’
마법사 계열들의 장점은 막강한 파괴력이다.
안 그래도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마력 공격을, 앞에서 정통으로 맞으면 아무리 방어 수단이 잘 갖춰진 나라고 해도 위험할 수 있었다.
‘일단 저 블랙 쉴드부터 어떻게 해야겠네.’
한 걸음 물러선 나는 어둠으로 일렁이는 마력의 방패를 바라봤다.
수준 높은 마력 방어와 물리 방어가 동시에 가능한 [블랙 쉴드].
일단 저 녀석을 어떻게 해야 승산이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왜곡의 그림자]는 사용했기에 한 방에 저 방어를 무너뜨릴 순 없는 상황.
‘그럼 구도를 만들어야지.’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린다.
아직 내겐 그 효과를 대체할 방법들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