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구역 - 죽음이 닿은 땅 (1)
루덴아크 학파의 근거지 던전 초입.
홀더 협회를 비롯해 국내 주요 클랜들이 모두 모여, 일종의 베이스캠프를 구성한 입구 지역.
많은 홀더들이 경계선을 구축하고 있기에, 실력이 부족한 홀더들이나 비전투 계열 홀더들도 던전 안으로 들어와 캠프에 자리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이번 납치 피해자들의 가족들 중 홀더의 자격이 있는 이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와 피해자들의 구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엔 최아린의 언니인 최유민과 절친인 송현아, 박윤서도 함께였다.
“아린아!”
“최아린…!!”
“언니! 얘들아! 으아아앙-!!”
눈물에 겨운 상봉이 이뤄진다.
네 사람은 모두 눈물을 쏟아내며 서로를 꽉 껴안았다.
벌써 사흘 가까이 실종됐고, 실종은 결국 납치로 판명났었다.
심지어 납치의 주도 대상은 ‘악의 무리’라고 여겨지는 루덴아크 학파.
만에 하나 잘못됐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그녀들의 불안감과 걱정은 아마 최고조에 달해 있었을 것이다.
우려가 깊던 만큼 더욱 벅찬 재회였다.
“다행이다, 그치?”
옆에 있던 김채은도 살짝 눈물을 닦아내며 말한다.
그녀 또한 최유민과 연이 있고 동기였기에, 최아린의 신변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잡아줬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
“헤헤. 나침반이 있었어서 정말 다행이야.”
“맞아. 나침반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야. 최아린 홀더가 천재적인 연금술사라 가능했지.”
최아린의 [원격 마력 나침반]은 단순히 납치 피해자들의 위치를 찾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루덴아크 학파의 근거지를 찾아내고, 해당 던전에 입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인간들은 루덴아크 학파에게 선공을 뺏기지 않고, 역으로 던전에 침입해 먼저 그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벌써 다섯 구역이나 정리했으니까.’
당장 <이블 헌터>가 완전한 공략에 성공한 <버려진 연구소>.
제1구역으로 설정된 이곳의 파괴부터 시작해, 국내 주요 클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감행한 구역들.
제2구역부터 제5구역까지, 총 5개의 구역이 정리됐다.
납치 피해자들의 구출부터 적들의 섬멸까지를 동시에 진행한 연합군의 전략적 움직임이었다.
“마스터.”
문득 뒤쪽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블 헌터> 내 임시 기획팀장을 맡은 한상진이다.
그는 이번 사냥팀 활동엔 참여하지 않았지만, 베이스캠프에 머무르며 협회 및 각 클랜들과의 대외 활동을 홀로 도맡고 있었다.
한상진이 보고서 한 장을 손에 든 채 내게 말했다.
“제1구역으로 선정된 버려진 연구소는 완전 공략 판정을 받았습니다. S급 홀더인 박지환 홀더께서 공로를 모두 양도하시면서, 온전히 이블 헌터 클랜의 공로로 등록됐습니다.”
그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급한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하셨네요.”
“저희 클랜의 첫 번째 공식 활동이니까요. 다른 클랜들이 협조한다고 해도, 엄연히 던전 공략의 메인 클랜은 저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성적인 부분에선 또 이성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게 클랜 업무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납치 피해자들은 어떻게 됐나요?”
“최아린 홀더를 포함해 총 21명의 피해자의 전원 구출에 성공했습니다. 다만….”
씁쓸해지는 한상진의 표정에 직감했다.
“정상은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가장 먼저 구출된 최아린 홀더를 제외하면, 20명의 홀더들이 전원 탈력 상태로 기절해 있습니다. 연합 본부에선 이들이 루덴아크 학파장의 ‘이탈화’ 제물로 희생됐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탈화….”
박지환의 말에 따르면, 인간처럼 던전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적응자들을 ‘이탈자’라고 한다.
내가 아까의 연구소에서 상대했던 아퀼렌이 그러했고, 이 부학파장이라고 불리는 데이브 역시 이탈자였다.
루덴아크 학파의 계획은 이러한 이탈자를 계속해서 양성하는 것.
시간대를 조금 더 좁히면, ‘학파장’이라는 존재를 이탈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학파장은 평범한 존재가 아니지.’
격이 높은 존재일수록 이탈화엔 많은 비용이 드는 모양이다.
그를 위해 필요했던 게 제물이 된 인간들.
죽은 제물과 산 제물이 모두 필요하다.
최아린을 제외한 납치 피해자들은 그러한 ‘산 제물’이 되어 특수 마법에 당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모두 목숨은 부지하고 있지만, 언제 정신과 기력을 되찾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탈자들의 행적에 대해선 더 밝혀진 게 있습니까?”
이탈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던전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거다.
단순히 던전의 입구와 출구에서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원한다면 지금도 현계로 나갈 수 있다.
들어올 땐 분명 입구를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지만, 던전 내에서 밖을 나갈 땐 ‘아무 지점’에서나 던전과 현계를 오갈 수 있는 것.
이는 이미 <울펜서>에서 도망칠 때 확인이 됐던 사실이다.
따라서 데이브나 황성연, 혹은 또 다른 루덴아크 내 이탈자들…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야 했다.
그들이 어느 순간 던전 밖을 나가 현계를 침공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다만, 부학파장 데이브의 소유 영역으로 추측되는 구역이 하나 있습니다.”
“……!”
로브의 남자, 부학파장 데이브.
그와 관련된 단서가 나오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한상진은 곧장 [공유 제작 지도]를 꺼내 내게 보여줬다.
지도에서 왼쪽 아래쪽에 그려진 X자.
<용광검로> 클랜이 공략했다던 제4구역의 바로 위에 자리한 지점이었다.
“제6구역이라고 명명된 곳입니다. 구역 이름은 죽음이 닿은 땅. 특수 아이템으로 나온 일지에 해당 구역의 정보와 데이브의 이름이 단서로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제6구역, <죽음이 닿은 땅>.
이름만 들어도 불길한 기운이 풀풀 풍기는 듯한 구역.
연합 본부의 추측처럼 정말 이 구역이 데이브의 소유 영역인지까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새로운 구역의 정보와 관련 단서가 나온 이상 탐색은 해야만 했다.
한상진이 처음 말했던 대로…
이번 던전의 메인 공략 클랜은 우리 <이블 헌터>의 몫이니까.
“그럼 공략 일정은 조금 이따 정식 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하죠. 고생하셨습니다, 한상진 홀더. 잠시 쉬고 계시죠.”
“알겠습니다. 아, 참.”
한상진이 깜빡 했다는 듯 말을 덧붙인다.
“이번 던전의 정식 명칭은 ‘이탈자의 방’으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구역 별 명칭이 아닌, 던전의 총 명칭.
<이탈자의 방>.
홀더 계를 위협하고 인간을 실험 재료처럼 쓰는 간악한 이탈자들.
그들이 모두 몰려있는 던전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적절한 네이밍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죠.”
“예, 마스터.”
* * *
제6구역 <죽음이 닿은 땅>의 공략일은 내일로 정해졌다.
조금 더 여유로운 상황 속에 완벽하게 정비를 마치고 가고 싶었지만, 이미 우리가 <이탈자의 방>에 선전포고를 한 상태라 최대한 시간을 아끼는 게 좋았다.
어쩌다 보니 클랜의 첫 활동 규모가 엄청 커져버렸다.
“자, 이거.”
최유민이 오색으로 칠해진 보따리 하나를 내게 건넸다.
마법 가방의 형태로 아공간을 구성한 보따리.
그 안엔 제작 장비들이 들어있었다.
“이게…”
“전에 재현이 네가 부탁했던 계약자 전용 장비. 발명품에 가까운 장비들이라 좀 어렵긴 했는데, 이현호랑 같이 작업해서 생각보다 빨리 만들 수 있었어.”
계약자 전용 장비.
일전에 내가 클랜원으로 영입한 최유민과 이현호에게 공동 의뢰로 맡겼던 장비.
세간에 마땅한 결과물이 없는 품목이기도 했고, 수요가 없어 대장장이 계열 홀더들도 거의 연구하지 않는 종류의 장비였다.
그래도 대장장이 쪽에서 최고의 재능을 지닌 최유민과 이현호가 힘을 합친다면,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맡겼던 의뢰.
“이걸 언제 다 만든 거야?”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다.
평범한 장비도 아니고, 기존에 있던 장비도 아니니까.
하지만 장비가 완성된 속도는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내가 깜짝 놀라 묻자 최유민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린이 잡혀갔을 때부터.”
“뭐?”
“너랑 클랜원들은 아린이 구하려고 목숨 걸고 던전으로 들어가는데… 난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래서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지.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
그 이유를 들으니 새삼 더 놀라게 된다.
동생이 납치당한 상황에서, 도움이 되고 싶어 장비를 제작하다니.
보통 정신력으론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런 게 비전투 계열 클랜원들에게 바라는 이상적인 구도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점들도 클랜원들의 열정이 닿아야만 가능한 결과니까.
“고마워. 덕분에 내일 공략에 크게 도움되겠다.”
“…진짜?”
“응. 그동안 전용 장비가 없어서 애들이 부상을 좀 많이 입었거든.”
계약자와의 협력 전투를 주력으로 삼는 내게, 전용 장비는 꼭 필요한 것 중 하나였다.
아무리 내구 수치가 높고 방어 룬이 잘 세팅됐다곤 해도, 어쨌든 강한 공격을 당하면 마모되는 게 신체다.
안장이나 투구, 전용 갑옷 등…
최유민과 이현호의 합작품은 계약자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방어 관련 장비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아마 아스보다는, 주로 티르본드와 제이텐의 주력 장비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장비들이 담긴 보따리를 들고 활짝 웃고 있을 때.
말에 뜸을 들이던 최유민이…
순간 내 쪽으로 다가와 볼에 입을 맞췄다.
“이건 선물. 아린이 다치지 않게, 빨리 구해줘서 고마워.”
…지금 뭘 당한 거지?
순간 벙쪘던 나는 당혹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야, 야. 나…”
“힛. 알아, 너 여친 있는 거. 그러니까 선물! 나 갈게! 내일 잘 갔다 와!!”
하지만 최유민은 장난끼 가득한 웃음을 짓고는, 이내 손을 흔들며 내게서 도망쳤다.
뭔가가 폭풍처럼 지나간 기분이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자리에.
멍하니 홀로 남은 나는….
“…아무도 안 봤겠지?”
빠르게 주변을 살피며 증거를 인멸했다.
내 잘못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들키면 좆된다.
혹시라도 누군가 본다면 너무 억울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우리 클랜은 제1구역을 공략했던 대로, 5팀이 모두 모여 이동을 마쳤다.
제3구역의 경계선.
루덴아크 학파가 보유한 또 다른 영역.
[‘죽음이 닿은 땅’에 발을 디딥니다. 음습한 기운과 떠도는 원혼들이 살갗을 타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능력치 중 일부가 무작위로 대폭 하락합니다.]
[‘명경지수’ 룬의 특별한 힘이 대상의 맑은 정신을 유지하게 합니다. 어떠한 저주나 상태 이상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제6구역, <죽음이 닿은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