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검엔 성검으로 (2)
주변엔 짙은 어둠이 깔려 있고, 스산한 기운이 넘실거린다.
피와 살, 뼈가 뒹굴거리는 궁전 안.
그 안 깊숙한 곳에선…
온갖 비명들이 뒤섞여 절망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악.
그곳엔 악이 있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범죄라고 일컬어지는 단순한 개념의 악이 아니다.
[어둠의 서약] 아래 생성되는 순수한 악.
그 성질이 너무도 순수해서 심지어 신성 계열로 여겨지는… 그 근원을 찾다 보면, 악마들과 악신까지 도달하는 악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삐걱거리는 왕좌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창백한 얼굴과 공허한 눈동자.
가느다란 팔다리와 길게 자란 손톱.
심지어 등에 자라난 기괴한 형태의 ‘날개’까지….
그건 이미 인간이라기보단, 악마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클클. 데이브.”
바로 옆.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 데이브를 부르는 한 마디.
그에 데이브가 깊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학파장님.”
“얼굴을… 보여라.”
“예.”
데이브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로브를 벗지 않았었다.
부하들은 물론, 계약 파트너인 황성연…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얼굴.
하지만 학파장의 한 마디에 그는 곧장 로브를 벗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클클. 여전히 못 생겼구나.”
그의 얼굴은 반쪽은 잔뜩 그을린 화상으로 가득했고, 반쪽은 마치 저주라도 걸린 듯 새까맣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간의 형체라고 보기 힘든 얼굴.
보는 것만으로 주변에 불쾌함이 퍼졌다.
그러나 학파장의 비아냥 섞인 농담에도, 데이브는 조금도 기분 상하지 않은 말투로 답했다.
“라프리온에서 보셨던 그대로일 겁니다.”
“마법으로 고칠 수 있었을 텐데.”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평생 잊지 않고 살고 싶었기에.”
그의 얼굴을 이렇게 만든 이들은…
이계였던 라프리온 대륙의 인간들.
루덴아크 학파를 척살한다는 인간들에 의해, 그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죽음의 위기에까지 다다랐었다.
평생 잊고 살지 않으려 노력했던 복수의 대상들.
하지만 시스템에 의해 차원 이동과 적응 및 이탈이 시작되며, 데이브에게 그런 과거의 복수 같은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돼버렸다.
학파장의 이탈화와 전 세계를 집어삼키기 위한 대계획.
그의 그림은 오히려, 더 큰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클클. 그래, 이계의 인간들이 우리의 땅에 들어왔다고.”
“예. 이미 간부들이 소유한 몇몇 구역을 공략한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당장 제 소유 영역인 죽음이 닿은 땅에도 도착했더군요.”
“인간 놈들은 여기나 저기나 어째 우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우리도 한땐 같은 인간이었는데 말이야.”
학파장의 얼굴은 상당히 젊은 인간의 것으로 보였지만, 정작 말투는 오랜 세월을 경험한 노인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애초에 그 몸은.
인간이었던 시절 학파장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계획은 어떻게 되느냐?”
학파장의 질문에 데이브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탈화가 끝난 학파원들을 모두 모아, 한 번에 이곳을 나갈 생각입니다. 그대로 인간들의 세계를 덮쳐 영역 구축을 새로 할 것입니다.”
“클클. 여긴 버리고?”
“예. 어차피 영역 자체가 이계로 넘어온 이상, 저희가 만들어낸 구역들은 밖에선 한낱 던전에 불과할 뿐입니다. 남아있어봤자 들어오는 인간들만 죽일 뿐 더 나아갈 수 있는 게 없죠.”
처음부터 던전 내에 머무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과감하게 버리고, 인간들의 근거지로 향한다.
데이브는 이런 핵심 계획을 설명 중이었다.
“인간들의 근거지를 장악하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장악하면 끝입니다. 녀석들은 나오는 족족 죽게 될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듣자, 학파장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데이브, 역시 넌 똑똑해. 괜히 부학파장이 아니란 말이지. 덜 떨어진 학파원 놈들과는 차원이 달라.”
“과찬이십니다.”
“그래, 여기 남은 인간들을 묶어둘 학파원은 있나?”
“학파원은 아니고, 이계의 인간들 중 계약을 맺은 파트너가 있습니다.”
“파트너?”
학파장의 물음에 데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성연이라는 자인데, 이미 제가 소유한 영역에서 군단을 이끌고 있을 겁니다.”
전 <빌런> 클랜의 부마스터, 황성연과의 계약은 드디어 끝을 맺었다.
데이브가 원했던 건 대계획이 완성되기까지의 전적인 도움.
실패로 돌아간 세부 계획도 많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인간들의 중심을 흔들고 방해 공작을 펼치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해 황성연이 원했던 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환경에서 최대한 많은 인간들을 죽이는 것.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것.
끝을 모르는 살육의 현장.
오직 그것만이 황성연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데이브는 처음부터 인간들에게 이곳 던전의 위치를 흘릴 생각이었다.
인간들이 직접 부대를 편성해 던전을 침공해오고, 이를 황성연이 막아내며 그의 희망사항 또한 해결하는 구조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인간들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던전을 찾아내긴 했지만, 계획에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현재 황성연은 언데드 군단을 이끌고, 침입한 인간들을 향해 진격하는 중이었다.
<죽음이 닿은 땅>의 함정과 미로를 모두 활용하며.
“충분히 시간을 끌어줄 겁니다.”
“역시 이계는 재밌어. 동족을 죽이고 싶어 안달 난 인간도 있다니.”
“본성이 악함을 부정하는 위선적인 존재들이죠.”
“클클클.”
학파장은 그 말을 끝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앙상한 외관인데, 큰 키 때문에 그 기괴함이 더욱 돋보였다.
“데이브. 악마의 권능은 언제쯤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학파장의 그 말에 데이브가 몸을 흠칫 했다.
악마의 권능.
그건 루덴아크 학파의 일원에게 있어, 가장 달콤하면서도 위험한 힘이었다.
“일주일…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에잉.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도 일주일이나 더 남다니.”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부족해서…”
“됐다. 갈 준비나 하자.”
진한 웃음을 흘리며 궁전 밖을 나서는 남자.
루덴아크 학파의 학파장.
플린클로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 *
강주연은 멍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환하게 빛나는 성검을 손에 든 채…
홀로 전장을 누비고 있는 남자, 도재현.
클랜 마스터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그는 최전선에서 거침없이 자신만의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사기 아니야?’
아무리 멋있고 잘난 그녀의 남자친구라지만, 이건 도무지 믿기 힘든 광경이다.
성검은 대체 어떻게 얻게 된 거며…
신성력은 또 왜 이렇게 잘 다루는 걸까.
도재현은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성력과 관련 스킬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며 주변 언데드들을 척살하고 다녔다.
그 이동 과정엔 당연히 계약자인 제이텐이 있었고, 지상의 움직임이 번거로워질 때면 티르본드를 소환하며 공중을 장악했다.
육지와 공중을 자유롭게 쏘다니는 성기사.
어이없지만 이게 지금의 도재현이었다.
“강주연 홀더, A지점에 라이트 메테오를!”
“네.”
그러나 그런 상황에도 전투 집중력을 잃진 않았다.
팀장 김아름의 말에, 강주연은 곧바로 준비해뒀던 [라이트 메테오] 마법을 시전했다.
4팀에게 배정된 듀라한 무리 사이로 그녀의 순도 높은 불꽃들이 떨어진다.
주력룬인 [수호하는 영원의 불꽃]도 이젠 벌써 16레벨.
A급 홀더의 주력룬 레벨 치곤 그리 높진 않지만, 전설급 룬이라는 점과 기존 룬이 진화하며 레벨 상승이 까다로워졌다는 걸 고려하면 확실히 빠른 성장이었다.
“전사 계열 전원, B지점을 방어해주세요! 문가은 홀더와 저는 C지점에 집중 사격합니다!”
김아름의 목소리가 주변 곳곳을 때린다.
김아름 또한 궁수 계열로서 팀장 자리를 덜컥 맡게 된 클랜원이지만, 베테랑 A급 홀더답게 합리적인 지시와 깔끔한 전술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블 헌터> 임시 사냥4팀.
이곳엔 유독 도재현과 가까운 이들이 몰려있다.
클랜 내 마법사 계열의 대표격인 강주연과 김채은, 그리고 요즘 들어 멀티 궁수 계열로 이름을 날리는 문가은까지….
현재 그의 연인 세 명이 모두 한 팀에 모였고, 심지어 도재현의 열렬한 팬인 암살자 계열 도승민도 4팀에 소속돼 있었다.
‘…더 잘해야 해.’
그래서인지 그 열의 또한 다른 팀보다 훨씬 강했다.
클랜 마스터와 친하다는 사실은 공적 측면에서 타 클랜원들에게 그리 좋게 비춰지지만은 않기에, 강주연을 포함한 관련 팀원들은 기대를 뛰어넘으려 더 노력했다.
그 결과가 지금.
상식 밖 존재인 도재현을 제외하면, 클랜 내에서 가장 많은 언데드를 쓰러뜨린 게 바로 4팀이었다.
“오케이! 남은 B지점 마무리는 전사 계열들이 처리합니다. 다들 수고 많으…”
그렇게 소규모 전투가 모두 끝이 난 후.
팀장 김아름이 마무리 오더를 내리며 팀을 정비하려던 찰나.
쿵-.
그 지형의 변화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마법사 계열 및 궁수 계열이 한데 모여있던 후방 지점.
이제 막 전사 계열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려던 클랜원들의 땅이… 그들이 서 있는 바닥이 엄청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쿵!
쿠구구궁-!!
그저 황폐한 평지로만 보였던 땅.
팀원들과 언데드들이 같이 밟고 있는데도, 전혀 별다른 이상 징후가 없던 땅.
갑작스러운 무너짐은 순식간이었다.
짙은 어둠과 엄청난 마력.
그리고 검은색으로 형상화한…
웬 커다란 손길과 함께.
그들이 서 있는 곳이 ‘무언가’로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다들 피해요…!!”
팀장 김아름의 절규 어린 고함 소리가 주변을 때린다.
속력 수치도 낮고, 보법류 룬도 없는 후방 인원들이 이런 상황에 즉각 대응하기란 쉽지 않은 일.
결국 후퇴 지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내, 끝을 모르는 추락이 이어졌다.
* * *
그리고.
[‘죽음이 닿은 미로’에 발을 디딥니다. 구역의 소유자가 만들어낸 특수 구역입니다. 구역을 작동시키는 마력의 결집 지점을 찾아야만 탈출할 수 있습니다.]
구역 내 또 다른 구역.
완전히 새로운 장소가 그들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