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져도 잘 산다 (2)
구도자의 힘이란 대체 뭘까.
그 정확한 정의에 대해선 박지환도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능력 자체가 룬의 형태를 띤 이상 이계의 차원이 넘어오며 시스템이 규정한 힘이고, 박지환 역시 홀더로 각성하며 그 능력을 얻게 된 것뿐이니까.
다만, 중요한 건.
‘구도자의 힘’엔 저마다 어떠한 목적이 있다는 것.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길을 쫓느냐에 따라 힘의 성질이 달라지고, 그 힘을 찾는 과정은 때론 구도자가 걷는 길의 표지판이 돼주기도 한다.
‘…….’
그리고 박지환이 보유한 룬은 [윤리의 구도자].
통념적으로 절대선이라 여겨지는 ‘빛속성’의 관점에서, 어둠속성 및 악성향의 힘을 처단하는 데에 특화된 힘.
그동안 그가 루덴아크 학파를 꾸준히 쫓아오고 그들의 실체를 파헤쳤던 이유는, 이렇듯 보유한 룬 자체가 그들의 반대 방향에 있는 능력이고…
또 그 영향으로 박지환 스스로도 정의를 이끌어 윤리를 수호하는 데에 신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들, 너만의 길을 찾아라.’
그리고 이는 박지환이 박진우에게 달리 특별한 조언을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들이 구도자의 힘을 각성했다는 건 진작에 들었지만, 애초에 구도자들은 각기 자신이 추구하는 길의 방향이 다르기에 가진 바 능력도 성장 방향도 모두 제각각이다.
힘의 성향 자체는 유전일지 몰라도…
힘의 성질은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길.
데스 나이트들이 우글거리는 전방에 그를 홀로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스- 스스스-
끼이이이-!!
그리고 첫 마력 공격에 이어 또 한 번.
어마어마한 양의 검은색 마력이 모여든다.
사냥 5팀의 후방을 점거한 리치 무리들이 아까와 같은 거대 광역 마법을 펼쳐내려는 것.
이번엔 급습이 아닌 만큼 사냥 5팀도 가만히 당하지 않겠지만, S급 괴수 리치들이 동시에 모여 만들어내는 공격은 그 위험도가 너무 높았다.
애초에 한 명만 상대하기도 벅찬 S급 괴수가, 부대로 모여있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흡….”
고위 홀더의 방어와 보호가 필수적인 상황.
박지환은 미리 꺼내뒀던 한 손의 방패를 앞에 세웠다.
그리곤 강하게 마력을 집중시키며, 언령을 읊조렸다.
“빛의 방패 아래 모여들라.”
[윤리의 구도자] 룬의 궁극스킬, [모럴 디펜스].
궁극스킬 중에선 상당히 드문 편에 속하는 ‘방어 계열 스킬’이 그의 앞에 펼쳐진다.
[모럴 디펜스]는 평소엔 그저 범위가 넓은 마력 방어막에 그치는 스킬이지만, 어둠속성 및 악성향이 담긴 공격을 상대할 땐 막강한 방어력을 선보이는 궁극스킬이다.
벽에서 벽까지 커버하는 범위.
전방을 모두 덮어내는 마력과…
그물처럼 촘촘하게 이어지는 방패.
그건 마치 존재하는 모든 공격을 막아낼 법한, 단단한 광역 마력 방어 스킬이었다.
팟- 파아아-!!
쿠, 콰아아앙-!!
리치들의 불속성 마력 공격과 [모럴 디펜스]가 부딪히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아무리 리치들이 강하다곤 해도, S급 홀더의 준비된 방어를 뚫는 건 쉽지 않은 일.
강렬한 마력 공격들이 곳곳에서 사냥 5팀의 후방을 노려댔지만, 박지환의 철벽 같은 방어는 단 하나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카그그그-!!
구으으으-!!
하지만 언데드 부대도 금세 해결 방법을 찾아냈다.
마력 공격이 통하지 않으면 물리 공격을 쏟겠다는 건지, 리치 부대 근처에 있던 듀라한들이 도끼를 들며 사냥 5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리치 놈들은 머리도 잘 돌아가네.”
박지환은 헛웃음을 지으며 움직일 준비를 했다.
데스 나이트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지만, 듀라한 역시 위협적인 실력을 갖춘 괴수.
놈들에게 방어선을 뚫리면 5팀이 얼마든 위험해질 수 있었다.
캉-!!
카가강-!!
그런데 박지환의 앞으로…
웬 금발 여성 한 명이 방패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듀라한들의 공격을 여유롭게 막아내며, 박지환을 향해 외쳤다.
“여긴 우리가 막는다, 아버님!”
“…아버님?”
난생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를 되뇌이는 박지환.
“아, 진우 아빠라길래… 한국 말, 서투르다!”
그에 앞을 막아선 여자, 카밀라가 다급히 덧붙였다.
친구의 아빠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몰라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꺼낸 그녀였다.
게다가 호칭이야 어찌 됐든 당장 밀려오는 괴수들을 막아야 하는 상황.
그녀는 박지환을 향해 재차 소리쳤다.
“듀라한, 우리가 막는다!”
“그, 그래. 그렇게 해라!”
박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듯 소리쳤다.
사실 이게 효율적인 방식이긴 하다.
사냥 5팀에도 분명히 앞선을 설 수 있는 전사 계열들이 있고, 박지환 자신은 듀라한보다 강한 리치들을 막아야 하는 고위 홀더니까.
다만, 너무 갑작스러운 카밀라의 등장과…
더 갑작스러운 그녀의 호칭에 놀랐을 뿐이었다.
박지환은 금세 정신을 차리곤, 무기를 들며 리치들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그리곤 홀로 조용히 생각했다.
‘흠흠. 정말 저런 며느리가 있으면 좋긴 하겠네.’
아버님이라니.
낯선 단어지만, 썩 기분이 나쁘지 않다.
내심 점 찍어둔 인물이 말을 꺼내니 더욱 그렇다.
혼란스러운 전투에서 먼저 방패를 들고 뛰어가는 홀더.
바보 같은 아들놈을 딱 휘어잡아줄 만한 당찬 여자.
박지환은 그런 카밀라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 * *
[‘어둠의 서약’을 맺은 악인을 교화했습니다. 신성한 세드닐렌의 자비가 검에 닿아 있습니다. 성검 ‘켈빌리드의 진정한 회개’의 성능이 올라갑니다.]
성검의 성장했음을 알리는 정보창이 또 나온다.
하지만 반가운 소식에도 내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아오, 이 빌어먹을 언데드 놈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
아무리 언데드들을 사냥하고 전진을 하는데도, 도무지 미로의 끝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빨리 흩어진 클랜원들을 찾아 뭉쳐야 하는데, 뭉치긴커녕 나 혼자 미로에 갇혀 미아가 될 신세였다.
게다가.
-주인님, 또 같은 곳입니다.
날 태우고 이동하던 제이텐이 나지막히 말한다.
그리고 코를 킁킁대며 주변을 살피는 중인 녀석.
라이칸들은 기본적으로 늑대를 원형으로 삼는 괴수고, 그에 따라 당연히 후각도 크게 발달해 있다.
그 때문인지 녀석은 이 썩은내 나는 미로 속에서도, 같은 위치의 냄새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나 역시 그 정돈 눈치채고 있었다.
언데드들을 사냥하면서 시각적으로 계속해서 같은 구역에 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고, 실제로 [야만왕의 후예] 하위룬인 [먹잇감 탐색]을 통해서도 현 구역의 자연 마력 배열이 동일하다는 게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제이텐과 나는 계속 같은 곳을 맴돌고 있다.
“근데 언데드들은 왜 자꾸 나타나는 거지?”
그게 문제였다.
분명 같은 구간을 반복해서 돌고 있는데, 언데드 괴수들은 쉬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리젠’이라도 되는 것처럼.
처음에 미로를 헤맨다는 걸 곧장 눈치채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구어어어-!!
카각- 카가각-!!
그런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시야를 가득 채우는 언데드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이 모이는 장소는 제이텐의 발 앞.
미로 안의 구정물이 고여 있는 곳.
사용하는 룬은 [엘리멘탈 마스터]였다.
“뉴 웨이브.”
구정물이 거대한 파도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에 구역 안을 모두 덮어 버리는 파도.
강을 이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물이 언데드들을 덮쳤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 살포시 성검을 밀어넣으며, 스킬 하나를 더 얹는다.
“체인 라이트닝.”
인위적으로 일으킨 거대한 홍수에 연결되듯 꼽히는 번개.
[침투하는 뇌기]의 파생스킬 [체인 라이트닝] 획득 때부터 자주 사용해온 스킬 콤보였다.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언데드들은, 쉴 틈도 없이 몰려온 번개의 마력에 정신을 못 차렸다.
“이젠 마력과 신성력 배합도 꽤 자유로운 것 같고.”
나는 스킬 사용 한 번에 신성력이 쭉 빠지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광기의 신앙심] 룬을 얻은 이후로 마력 공격에 신성력을 추가로 담는 것 또한 꽤나 자유로워졌다.
마력 공격에 별 타격이 없을 것 같은 언데드들이…
모조리 감전된 것처럼 큰 충격을 입은 게 그 증거.
신성 감응도를 높여주는 보조 룬과 성검까지 있다 보니, 이쯤 되면 언데드 사냥이 기존 괴수 사냥보다 훨씬 쉬울 정도였다.
-길만 찾으면 될 텐데요.
정말 가볍게 언데드들을 쓸어버린 후.
내 답답한 심정을 아는 듯 제이텐이 먼저 말을 꺼냈다.
길.
어딘가에 막혀 있는 듯한 글 길만 찾으면 될 텐데, 그게 안 되니 문제였다.
아마 같은 공간을 계속 맴돈다는 건, 결국 특정 마력 현상에 의해 만들어진 함정이란 뜻인데….
“…마력?”
순간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번뜩이며 지나간다.
마력 현상.
이걸 왜 생각 안 하고 있었을까.
마력으로 구성된 함정이라면, 이에 대해 누구보다 조예가 깊은 멤버가 내게 있다.
아무리 내가 마력을 잘 다루고 탐색류 룬도 보유하고 있다지만, 그에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다고 여겨질 수준.
어쩌면 그라면…
이 특이 현상이 뭔지 파악해낼 수도 있었다.
“계약의 부름.”
이미 소환된 제이텐을 둔 채.
또 한 명의 계약자를 소환한다.
딱딱하고 황량한 바닥 위에…
고고하게 발을 딛으며 나타나는 한 남자.
그건 분명 ‘사람의 형태’를 한 계약자였다.
“위대한 존재의 맹약자를 뵙습니다.”
계약자 아스피도켈론.
신 들린 수송 능력으로 항상 날 안전하게 이동시켜줬던 아스였다.
아스는 최근 내가 <울펜서> 공략을 마치면서 새로이 각성했는데, 그중 [마력지배] 룬의 제한이 풀리면서 [폴리모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이렇듯 물이 없는 곳에서도, 인간 형태로 소환할 수 있었다.
“아스, 네 힘이 필요해.”
나는 그런 아스를 불러내 지금의 위기를 타파하고자 했다.
그는 우선적으로 수송 및 방어의 전문가이지만, [마력제어]가 20레벨에 [드래고니안 주문]이 17레벨인 정통 마법사이기도 하다.
마력을 감지하고 파악하는 데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존재.
그래서 그에게 현 상황을 밝히고, 어떤 방안을 마련해야할지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네크로맨서군요.”
아스는 너무나도 빨리…
완벽하게 이 상황을 분석해냈다.
“위치는 땅 안. 우리가 밟고 있는 현 지점 깊숙한 곳에 숨어있습니다.”
“…….”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엘리트 계약자가 구세주가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