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위의 미러전 (1)
미로의 끝은 미로라기엔 너무 광활했다.
전방은 탁 트여 있었고, 천장은 끝을 모르고 솟아있었다.
만약 햇빛이나 달빛만 있었다면, 바깥의 평지라고 해도 믿을 수준의 넓이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
‘…황성연.’
전 <빌런>의 부마스터, 황성연.
국내에선 여전히 수배 중인 범죄자이자…
나와는 지독하게도 연이 깊은 녀석.
그가 이 광활한 미로의 끝에, 그리고 아득한 언데드 군단 위에 서 있었다.
나는 황성연의 밑에 자리한 언데드들의 면모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이내 곧장 당황하고 말았다.
‘미친… 수가 너무 많잖아.’
미로 내 구역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자랑하는 최종 지역.
그곳을 가득 채우다시피 한 언데드들의 물량은 말 그대로 아득한 수준이었다.
최소한 <죽음이 닿은 땅> 초입에서 마주친 군단과 비슷한 수준에, 그의 뒤쪽으론 얼마나 더 많은 언데드들이 있는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 지금껏 미로에서 사냥한 언데드를 모두 합쳐도 눈앞의 수보단 적을 것 같은 느낌.
게다가 그 종류마저 다양하다.
스펙터나 레이스 같은 유령 형태부터, 데스 나이트 및 리치 등의 스켈레톤 형태, 좀비나 레버넌트 같은 괴물 형태까지….
갖은 형태의 언데드 괴수들이 저 멀리 황성연 아래에 발 맞춰 서 있었다.
상대적으로 우리 클랜이 상대하기엔 너무 많은 수였다.
“너라면 금세 여길 찾아낼 줄 알았지. 기다리는 건 꽤 재미없더군.”
그렇게 적들의 병력을 파악하고 경악할 때쯤.
황성연이 씨익 웃으며 먼저 말을 꺼낸다.
녀석과의 거리가 꽤 있는데도, 마치 마이크를 쓰는 것처럼 목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그러는 넌 아예 루덴아크 밑으로 들어가기로 한 건가? 언데드들이랑 같이 싸우다니, 자존심도 다 갖다 버린 모양인데.”
나는 최대한 녀석을 도발할 대사를 골라 내뱉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바로 싸우고 싶었지만… 어쨌든 갑작스러운 전투 상황에 맞닥뜨린 이상, <이블 헌터>의 내 클랜원들에게도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최상의 조건에서 부딪히는 효율적인 전투.
그 준비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기 위한 말싸움이었다.
“도발치곤 꽤 재미없군. 너도 예상은 했을 텐데.”
“…….”
아쉽게도.
그 도발이 큰 효과를 보진 못했지만 말이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루덴아크 학파와 손을 잡은 황성연이 <이탈자의 방>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고, 만약 <죽음이 닿은 땅>이 정말 부학파장 데이브의 권역이 맞다면…
이곳 <죽음이 닿은 미로>가 황성연의 활동 구역이 되겠다는 예상.
가능성이 충분한 추측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초입에서 성검을 획득했을 땐 유독 더 만족스러웠다.
그로부터 머지 않아 마검을 지닌 황성연을 만나게 될 것 같았기에.
“우와… 저 사람이 의뢰자랑 한패라는 인간이구나. 신기해.”
그러던 중.
내 옆에서 가만히 있던 리플리가 눈을 반짝였다.
그 중얼거림에 순간 의문이 든다.
‘…얘도 황성연은 처음 보는 건가?’
그녀는 루덴아크와 임시로 손을 잡았던 뱀파이어이자, 우릴 여기까지 직접 인도해준 미로의 제작자.
의뢰자라는 건 아마 루덴아크의 부학파장인 데이브일 텐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황성연에 대해선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아마 미로를 제작한 후에도 계속 이곳에서 나가지 않고, 루덴아크 학파와는 원격으로 소통을 했던 모양이다.
“재밌군. 미로 제작자와 계약을 맺은 건가?”
하지만 황성연은 리플리를 알고 있었다.
독특한 생김새와 내 옆에 서 있는 걸 보고 단번에 관계를 파악해 낸 녀석.
음침한 범죄자 주제에 눈치는 또 더럽게 빨랐다.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여전히 까칠하군.”
“네가 한 짓을 생각해. 말이 곱게 나가는지.”
“그런가. 난 널 위해 특별한 선물도 준비했는데 넌 딱히 관심이 없나 보군.”
선물은 얼어 죽을.
뻔뻔한 낯짝과 말투를 보니 딱 범죄자가 맞는 것도 같다.
나는 황성연의 말을 무시하고, 천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마검엔 성검으로.
놈의 마검인 [다인 슬라이프]에 유일하게 대척할 수 있는 성검, [켈빌리드의 진정한 회개]다.
처음 황성연과 맞닥뜨렸을 때만 해도, 정체불명의 능력에 당황하며 완전히 밀렸었지만… 두 번째 격돌엔 나름의 파훼법을 찾았고, 세 번째 격돌인 지금은 그에 적합한 무기까지 갖춘 상황.
이젠 서로 동일한 조건에서 정면으로 부딪힐 수 있었다.
그런데.
“마, 마스터. 저길….”
날 부르는 한 클랜원의 목소리와…
귓속을 파고들 듯 들려오는 엄청난 굉음.
미로 안이 거대한 진동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파동은 전방의 언데드들을 포함해, 우리 클랜원들에게까지 모두 전해질 정도로 강렬했다.
그리고.
갸오오오-!!
한 괴생명체가 하늘 위로 높게 솟아올랐다.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커다란 몸집, 그 안에 겹겹이 쌓인 뼛조각, 뭐든 찢어발길 듯한 발톱과 붉은 안광, 허름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형상의 날개….
어디선가 본 듯한, 매우 익숙한 형체의 언데드.
이는 분명…
언데드의 왕, ‘본 드래곤’이었다.
“미…친.”
처음 발견한 클랜원과 마찬가지로, 내 눈빛도 경악에 물들었다.
과거 ‘빌런 소탕 작전’ 당시, 황동연이 [데스 리바이벌] 스킬로 계약했던 본 드래곤.
루덴아크 학파에 의해 제작된 괴수였지만, 그 힘과 사령으로서의 기운이 워낙 강력한 탓에 황동연 또한 제대로 다루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때의 ‘임시 계약’은 파기되며, 본 드래곤은 나와 계약을 했었다.
그런데 그런 본 드래곤이 ‘또’ 있다고?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말했잖나, 도재현! 선물을 준비했다고! 감상은 어떻지? 난 꽤 재미있는데 말이야!”
본 드래곤의 위에 탄 채, 날 향해 소리치는 황성연.
즉, 황성연이 지금 저 본 드래곤을 직접 다루고 있다는 뜻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그에게 계약 관련 룬은 없을 텐데, 루덴아크 학파 쪽에서 뭔가 조치를 취해준 건지 그는 능숙하게 본 드래곤을 다루며 움직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의문점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이를 넋 놓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눈앞에 있는 건 분명한 본 드래곤이고, 그 형체와 기세만 봤을 땐 첫 번째 본 드래곤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게다가 본 드래곤을 탄 마검의 소유자.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황성연처럼 강한 힘을 가진 이가 기동성과 전투 범용성까지 갖춘다는 건, 안 그래도 어렵던 전투가 훨씬 더 까다로워진다는 걸 시사하기 때문.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클랜원들에게 불똥이 튈 게 분명했다.
“계약의 부름…!!”
나는 있는 힘껏 소리치며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불러오는 계약자는 당연히 티르본드.
이미 장악당한 허공의 영역을 뺏어올 유일한 괴수였다.
갸오오오-!!
티르본드의 거친 울음소리가 들리고, 나는 가볍게 그의 위에 올라타며 비행을 시작했다.
‘티르본드. 절대 지면 안 돼.’
-저런 가짜와 비교하지 마라, 주인.
뜬금없는 미러전의 등장이지만, 티르본드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상대를 물어뜯을 기세.
나는 녀석의 그런 넘치는 자신감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며 앞을 본다.
본 드래곤과 본 드래곤의 대결.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갸오오오-!!
캬오오오-!!
공중에 지옥도가 펼쳐진다.
두 마리의 거대한 본 드래곤이 격돌하며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공격 중이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이블 헌터> 클랜원들의 전투도 시작을 알렸다.
황성연은 본 드래곤을 타고 하늘 위로 올랐지만, 그 아래 아득한 물량의 언데드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전사 계열 전원, 앞으로 돌진! 간격을 맞춘 진형을 구성합니다!”
유은설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퍼진다.
클랜 마스터 도재현이 황성연의 상대를 위해 하늘 위로 뛰어오른 이상, 클랜의 총 지휘권은 당연히 부마스터인 그녀의 몫.
그리고 지금 상황에선 팀별 전투가 아닌, 무조건 클랜 전투를 해야 한다.
유은설은 오랫동안 무소속 홀더들을 이끌어본 경력직 S급 홀더답게, 망설이지 않고 클랜원들을 각 역할군에 배치하며 전투를 이끌었다.
칵, 카그그-!
크그그그-!!
전방에 쏟아지기 시작하는 언데드의 행렬.
초반 진형엔 유독 스켈레톤들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이들이 언데드 중에서도 무장을 한 괴수들이고 선공에 강점이 있는 괴수들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들보다 앞에서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몇몇의 데스 나이트 무리.
초장부터 고위 괴수들이 튀어나왔다.
“흡…!!”
그리고 데스 나이트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박진우는 곧바로 검을 들고 뛰쳐나갔다.
그는 <죽음이 닿은 미로>에 도착하고서부터 데스 나이트만 상대해왔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 있는 전사 계열 클랜원들 중에선, 그가 데스 나이트를 가장 많이 상대해봤을 것이다.
‘최대한 먼저 죽여놔야 해.’
데스 나이트는 개체별로 무력이 다르지만, 최소 A급에서 S급에 다다르는 강력한 힘을 지닌 언데드 괴수들.
그 때문에 초반 급습을 통해 기세를 꺾어두는 게 중요했다.
특히 이렇듯 군단급으로 언데드들이 즐비한 곳에서 데스 나이트를 활보하게 놔둔다면, 아직 실력이 부족한 클랜원들에겐 큰 위험요소로 다가올 수 있었다.
[지키고자 하는 대상과 적으로 규정된 대상이 활성화됩니다. ‘균형의 구도자’ 룬 특수효과가 발동합니다. 대상의 산정 결과,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47% 상승합니다.]
그리고 번뜩이듯 떠오르는 정보창.
박진우가 획득했던 룬, [균형의 구도자]의 진정한 힘이었다.
<울펜서>에서 처음 능력을 각성한 후 한동안 이 힘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었지만, 미로 안에서 아버지 박지환에게 조언을 듣고 데스 나이트들을 상대하며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게 됐다.
[균형의 구도자] 룬의 가장 핵심적인 특수효과는, 적으로 규정된 수에 따라 홀더의 능력치가 임시로 상승한다는 것.
지키려는 대상과 적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하기에 그 격차가 심할수록 능력치 상승의 비율이 올라간다.
그래서 지금의 박진우 역시 평소보다 훨씬 강해진 능력치로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빨리 끝내고 재현이를 도와야 해.’
박진우의 의중은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공중에선 여전히 강렬한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그 기세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황성연이 내뿜는 어둠의 기운이 전보다 훨씬 강렬해졌다는 건 땅에 있는 박진우조차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놈인 도재현을 믿으면서도, 조금이라도 빨리 지상의 전투를 끝내고 그를 돕고싶은 마음이 컸다.
크, 카가가-!!
캉- 캉-
카가강-!!
빠르게, 더 빠르게.
순식간에 30마리의 스켈레톤 전사들을 쓸어담는다.
구도자의 힘을 각성하며 [쫓을 수 없는 쾌검]에서 [그림자를 밟은 검]으로 진화한 주력룬.
이름은 바뀌었지만 쾌검을 다루는 그 본질만은 그대로였다.
박진우는 폭발적인 능력치 상승과 엄청난 속도를 기반으로, 전방의 모든 스켈레톤을 쓸어버리며 적 선봉의 중심에 도착했다.
‘잡았다.’
그리고 드디어.
데스 나이트들이 모여있는 무리에 도착했을 때.
박진우는 이를 악물며 언령을 내뱉었다.
“어둠을 쫓아라…!!”
룬이 진화하며 마찬가지로 변화를 이룬 궁극스킬.
[진 비월참]의 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