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지부 (2)
스산한 기운이 주변을 감돈다.
폭풍전야.
서로의 기세가 폭발하며 닿기 직전의 상황.
평소라면 아마 나도 여기서 더 기다렸을 거다.
일반적으로 기습이 아닌 이상, 공격보단 방어가 효율적이기 때문.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용인화]와 [광폭화]의 버프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새로 버프를 건 [디바인 블레스]와 [거룩한 자비]도 지속시간이 길지 않다.
10분.
오직 10분 안에 녀석을 해치워야 했다.
“흐읍…!!”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한 템포 빠르게 검을 들고 달려갔다.
황성연 역시 내 저돌적인 움직임에 맞서듯 검을 들었다.
캉-!
카가강-!!
불꽃이 튄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파열음을 내고, 검은 마력과 신성력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기세를 강화한다.
평범한 무기라면 이 엄청난 마력의 파도에서 진작 박살났을 거다.
서로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끌어내 전투에 쏟고 있으니까.
하지만 마검 [다인 슬라이프]와 성검 [켈빌리드의 진정한 회개].
이 두 개의 ‘신화급(Myth) 아이템’은, 마치 영원히 깎이지 않을 듯한 내구도를 자랑하며 전장에서 빛을 발했다.
각기 성향이 다른 ‘신’의 힘을 담은 만큼 그 기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당신의 몸에 새겨진 ‘은빛 달그림자’가 끊임없이 빛나고 있습니다! 성검 ‘켈빌리드의 진정한 회개’가 훨씬 강력해진 성능을 보입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일전에 도승민을 통해 획득했었던 [은빛 달그림자].
신성 계열 아이템의 성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주는 이 보조룬 덕분에, 나는 원래 성검이 지닌 힘보다 훨씬 더 강렬한 공격을 할 수 있었다.
비록 황성연의 [영웅 살해자]만큼 특정 아이템(마검)에 최적화된 룬은 아니지만, 신성 감응도를 높여주는 것만으로 성검과의 궁합이 상당히 잘 맞았다.
게다가 [은빛 달그림자]는 신성 수치가 높을수록 그 효과가 강해지고, 성검 역시 신성 수치에 비례해 성능이 올라간다.
현재 내 신성 수치는 온갖 버프와 [거룩한 자비] 효과까지 받으며 거의 180에 가깝게 증가한 상황.
이 정도면 황성연의 [영웅 살해자]와 마검에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팟- 파밧-!!
캉- 캉-
카가가-!!
서로의 검이 계속해서 부딪히고 막힌다.
베고, 베고, 찌르고, 다시 베고.
돌아서 찌르고, 베고, 뒷공간을 찌르고.
[용맹한 영원의 물결]을 활용해 가하는 공격에 수없이 많은 변초를 섞었지만, 마검을 쓰는 S급 홀더는 생각보다 가볍게 이를 막아냈다.
중간중간 [연격]이나 [포이즌 어택] 같은 스킬들도 사용해봤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S급 홀더쯤 되는 실력자와의 싸움에선 평범한 스킬 활용보다 오히려 룬 활용에 집중하고 마력이나 신성력을 다루는 데에 집중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잠식당해 싸워라.”
그리고 그런 치열한 전투 속에서.
문득, 황성연의 나지막한 언령이 들려왔다.
‘…궁극스킬!’
그 음성을 듣자마자 방어 태세를 취한다.
궁극스킬이다.
그것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형태의 언령.
잘 알려진 원래 그의 궁극스킬은 [피의 주인].
마검 [다인 슬라이프]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초재생’과 같은 특별한 능력을 강화시키는 [영웅 살해자] 룬의 궁극스킬이다.
그리고 그 언령은 분명 ‘피를 삼켜라’.
즉, 이번 스킬은 황성연이 보유한 또 다른 궁극스킬이란 뜻이었다.
슷- 스스-.
끼이이이-!!
잠식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그의 발끝과 마검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색 마력은 조금씩 땅속으로 침투해가는 것 같더니, 이내 엄청난 속도로 분열하며 내게 날아왔다.
분열된 마력의 괴이한 형체는 특이하게도 무기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마력으로 이뤄진 병장기.
검, 창, 도끼, 망치, 화살, 철퇴….
다 세기도 힘든 양의 무기들이, 곳곳에서 검은색 마력의 탈을 쓴 채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미친… 급류로 흘러라!”
가만히 보고 있다간 그 공격들에 허무하게 당할 기세.
나는 서둘러 마력을 끌어올려 궁극스킬로 맞대응했다.
[진 유수활검].
춤을 추듯 움직이는 내 몸과 검.
그리고 그 끝에서 뿜어나오는 물줄기.
물이 만들어낸 거대한 구체 속에 날 가둬 보호했다.
촤라락-.
슷, 스스스-!!
검은 병장기들이 물의 구체에 부딪혀 힘을 잃는다.
비록 신성력은 담기지 않은 스킬이지만, 마력량이 워낙 많기에 상당히 탄력적인 방어를 자랑했다.
“…처음 보는 스킬인데.”
“피차 마찬가지지.”
생각해보니 황성연의 앞에선 진화한 [진 유수활검]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녀석의 감탄에서 싱겁게 답한 후 재빨리 다시 전투 태세를 취했다.
‘기회다.’
아무리 방대한 마력을 보유한 고위 홀더라고 해도, 궁극스킬을 사용하고 나면 자연스레 몸이 지친다.
약간의 탈력 상태와 함께 정비 시간이 필요한 것.
그건 황성연도 나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소강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소강상태는…
전투를 설계할 능력이 많은 내게 있어, 오히려 기회였다.
“파워 브레이크.”
첫 번째 설계.
지형을 바꾼다.
땅 속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주변이 갈라진다.
[엘리멘탈 마스터]의 [파워 브레이크].
대지를 흔들고 가르며 기존 땅의 형태를 완전히 뒤바꾸는 스킬이었다.
그리고.
‘러쉬 메테오.’
여기에 불속성 마력 공격을 추가로 얹는다.
마찬가지로 [엘리멘탈 마스터]의 파생스킬인 [러쉬 메테오].
커다란 불구덩이를 선택한 지점에 여러 개 떨구는 공격.
그간 자주 사용하진 않았던 스킬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꽤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은신인가. 패턴이 뻔하군, 도재현.”
지금 내 계획은…
그 화려한 공격 속에 몸을 숨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격 스킬을 썼지만 사실 [파워 브레이크]와 마찬가지로 특이 지형을 만들어 내 몸을 숨기려는 목적이었다.
크게 달라진 지형과 사라진 내 모습.
그에 따분한 얼굴로 읊조리는 황성연.
어쩌면 그 정도 되는 실력자에게 이런 은신 공격은 아무런 효과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시도해야 했다.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퍼부어야만 승산이 있는 상대.
그게 황성연이니까.
‘하이드 어택.’
[은신]의 활용과 동시에 파생스킬 [하이드 어택]을 활용한다.
어차피 황성연을 상대로의 [은신]은 1초도 안 돼서 발각된다.
그렇다면 발각되기 직전 곧바로 공격을 이어가는 게 베스트.
갈라진 대지와 타오르는 불꽃.
그 사이를 뚫고 나는 황성연의 뒤편으로 다가갔다.
카아앙-!!
하지만 바로 뒤를 돌아 검을 맞대는 황성연.
그 짧은 시간에 내 움직임을 탐지하고 간파해낸 것.
그의 자신만만했던 말투처럼 공격은 쉽게 막혀버렸다.
‘괜찮아.’
그러나 나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는 걸 느꼈다.
서로 궁극스킬을 사용한 상태에서 필요했던 정비 시간.
나는 그 시간을 활용해 황성연을 쉴 새 없이 몰아붙였고, 놈은 그 과정에서 방어에 집중하게 됐다.
그렇다.
‘방어’에 집중하게 됐다는 게 중요했다.
‘오히려 틈이 생겼어.’
마검 [다인 슬라이프]와 황성연의 능력은 오직 공격과 살육에 집중돼 있다.
가끔 ‘초재생’과 같은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보이기도 하지만, 힘의 기본적인 골자는 극강의 공격에 치중돼 있는 것.
때문에 방어를 하는 순간.
역으로 틈이 생긴다.
공격에 집중된 힘은 공격에서 가장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단죄의 벼락…!!”
황성연의 오른쪽 어깨 쪽에 보인 약간의 틈.
아직 마력이 갈무리되지 않은 신체 부위.
나는 그 틈을 노려, 마지막까지 아껴뒀던 신성 계열 스킬을 사용했다.
[단죄의 벼락].
경매장에서 구매했던 전설급 아이템 [트릴리온의 찬란한 맹세]에 담긴 내재스킬로, 신성력으로만 뭉친 강력한 일격을 상대에게 가하는 공격 스킬.
[디바인 슬래쉬]와 더불어 내가 딱 두 개밖에 보유하지 않은 신성 계열 공격 스킬이기도 했다.
“……!”
처음이다.
전투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황성연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드러났다.
틈을 뚫고 들어오는 신성력의 양이…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걸 놈도 직감한 것이다.
[단죄의 벼락]은 물리 공격으로 치면 [원초적 맹공]과 유사한 스킬이다.
말 그대로 신성력을 있는 힘껏 뭉치고 뭉쳐 상대에게 쏟아내는 공격형 스킬이기에, 어둠속성 혹은 악성향 신의 힘을 다루는 이들에겐 매우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애초에 경매장에서 아이템을 구매할 때, 나는 이 순간만을 상상하며 그를 골랐던 것이었다.
‘됐다.’
그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그린 설계가 절반까지 다가왔음을 느꼈다.
적이 보이는 잠깐의 틈.
그 틈을 더욱 키워 약점으로 만드는 것.
그게 이번 설계의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약점이 된 틈을 끊임없이 공략한다.
그리고.
‘리플리. 혹시 듣고 있어?’
-…어?
당황한 목소리가 전해진다.
치열하게 싸우던 도중 갑자기 자신을 부를 거라곤 생각지 못했나 보다.
내 네 번째 계약자이자 사령으로선 첫 번째 계약자.
뱀파이어, 리플리 백작은 전투가 시작된 후 아직 소환 해제되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그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네 힘이 필요해.’
-내 힘?
‘응.’
사실 리플리의 능력은 미로의 최종지역까지 오면서 미리 확인하긴 했다.
무려 백작이라는 지위를 가진 뱀파이어답게 그 능력도 화려하고 상당히 강력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고민 끝에 이번 전투에선 활용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내가 한 번도 그녀와 호흡을 맞춰보지 않아 전투 중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것.
두 번째론 황성연을 상대하기엔 그녀보다 내 힘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리플리의 힘은 내가 조금 더 익숙해지고 난 후에 쓰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근데 그렇다고 쓰임새가 없는 건 아니지.’
아예 활용하지 않을 거면 처음부터 소환을 해제했을 거다.
리플리의 능력이 익숙하지 않은 거지…
그녀가 지닌 방대한 ‘마력’이 익숙치 않은 건 아니다.
나는 [융화의 질서] 아이템을 꺼내들며 그녀에게 말했다.
‘미리 말 못해서 미안.’
-뭘?
‘네 마력 좀 빌릴게.’
-어? 어어? 자, 잠깐. 도재현, 잠깐. 야! 잠깐!
빠르게 [마력공유] 룬을 활용한다.
[계약의 법칙] 속 하위룬인 이 룬은, 계약자들이 서로의 마력을 최대 30%까지 빌려 쓸 수 있는 룬.
원래라면 이제 막 계약해 충성도가 낮은 리플리가 거절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계약과 관련해 사기급 성능을 보이는 [융화의 질서]가 그런 중간과정을 삭제해 버렸다.
덕분에 규모가 큰 스킬들과 궁극스킬 연달아 사용해 쑥 빠져나갔던 체내 마력들이 순식간에 보충됐다.
리플리를 전투 시작부터 남겨놓았던 건 이런 이유였다.
‘주유 좋네.’
몸 안 가득 마력이 가득 차오르고 있다.
이젠 두 번째 설계로 넘어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