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과 정리 (1)
어둠이 짙게 깔린 방.
로브를 쓴 한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깔끔한 차림의 미남.
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로브의 남자를 봤다.
“클클. 데이브, 이번엔 네가 틀렸구나.”
“…….”
데이브와 플린클로.
이계 최악의 범죄 단체로 떠오르며, 현재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루덴아크 학파’의 두 수장이었다.
그러나 그 위명과 달리.
그들이 처한 상황은 최악에 가까웠다.
“양동작전을 펼쳤지만… 둘 다 실패로 돌아갔어. 클클.”
그 이유는 간단했다.
부학파장 데이브가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이, 인간들에게 모두 간파당해 물거품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양동작전.
제6구역에선 황성연에게 언데드 군단을 쥐어주며 도재현 및 한국 클랜들을 쓸어버리는 걸로.
그 틈을 타 밖으로 이탈한 루덴아크 학파는, 비어있는 한국의 영토를 침공해 먹어치우는 걸로.
꽤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상대는 이쪽의 전력을 잘 모른 채 던전 공략에만 총공세를 취하고 있었고, 루덴아크는 밖에서도 충분히 병력을 끌어모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까.
성공만 한다면, 이계 정복에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성공만 한다면 말이다.
“죄송합니다, 학파장님. 계획에 착오가 있었습니다.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됐다.”
학파장 플린클로의 무심한 목소리가 울린다.
계획은 보란 듯이 실패했다.
제6구역의 황성연은 <이블 헌터>의 도재현에게 척살당하며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그에게 지원했던 언데드 군단은 하나도 빠짐없이 몰살당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밖으로 나온 데이브와 플린클로의 상황도 좋진 않았다.
빈 집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엔 <자유의 날개>라는 미국 클랜과 S급 홀더 리암 헨드릭스가 버티고 있었고, 때문에 이탈자들은 가는 곳마다 추적을 당하며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
그야말로 진퇴양난.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들이 전부 실패로 돌아가며 루덴아크 학파는 위기에 빠졌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전력 손실은 어마어마한 데다가, 간부급 이탈자들은 벌써 상당수가 목숨을 잃은 상태.
당연히 이 계획을 처음 발의하고 실행에 옮긴 데이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학파장 플린클로는 이를 딱히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평온하기 짝이 없는 그의 얼굴.
그는 데이브를 벌할 생각도, 뭔가 일을 벌일 생각도 없어 보였다.
단지….
“우리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학파장님, 그건…!!”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플린클로는 이미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클클. 데이브. 네 아쉬운 마음은 잘 알겠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나고 싶지는 않겠지.”
웃음을 터뜨리던 플린클로가 손을 들어 주변에 펼친다.
“그런데 봐라. 그 결과는 이리도 참혹하지 않더냐. 날 부활시키고 이탈시키는 데에 온 힘을 다 했던 학파원들은 몰살당했고, 데이브 네가 아끼던 간부들도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클클, 여기서 뭘 더 하겠다는 것이냐.”
“…….”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이미 루덴아크 학파가 받은 피해는 막대한 수준이라, 다시 이를 회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들 정도.
그런 상황에서 계속 현계에 머무르겠다는 건 고집일 뿐이었다.
“어차피 7구역부턴 인간들도 쉽게 공략할 수 없을 거다. 오랜 세월 루덴아크가 쌓아온 정수가 담겨 있는 우리의 영역이니까.”
제1구역부터 제5구역까지는 학파 내에서 ‘임시 구역’이라고도 불린다.
워낙 초입이기도 하고 학파 내에서도 마력 함정이나 병력 배치에 크게 신경쓰지 않은 구역들이기에 사실상 공략이 크게 어렵지 않은 것.
괜히 제1구역이 <버려진 연구소>로 이름 지어진 게 아니었다.
그러나 학파원들의 소유 구역으로 불리는 제6구역부터는 그 난이도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간다.
평범한 인간들이 구역 내에 발을 디뎠다간, 어둠과 저주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 채 숨 쉬는 것만으로 죽을 수 있을 정도의 위험한 구역.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이블 헌터>와 한국의 클랜들이라고 해도, 그 때부턴 쉽게 공략할 수 없었다.
“클클, 돌아가서 훗날을 도모한다. 늘 했던 대로.”
루덴아크 입장에선 시간을 벌 수 있는 것.
그리고 훗날을 기약하며 기다리는 건…
플린클로와 루덴아크에게 있어 너무도 익숙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마지 못해 답하는 데이브.
거기에 플린클로는 충격적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리플리 그 흡혈귀 년이 배신을 했더군, 클클. 인간의 피가 맛있긴 한 모양이야.”
“……!”
“조력자들이 더 필요하다. 구역 안에 있는 테르멘과 벨테인의 녀석들도 이탈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라.”
그렇게 루덴아크 학파는 전략 상 후퇴를 결정했다.
* * *
낯선 천장이다.
설마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동안 전투 도중 기절해 본 적은 없었고, 병으로 쓰러진 적은 더더욱 없었으니까.
애초에 공략 도중 기절한다는 건 죽을 정도로 위기 상황인 거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 마스터…!!”
“재현아!!”
어쨌든 내 위기는 잘 해결이 된 모양이다.
낯선 천장을 보며 눈을 떴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날 맞이하는 걸 보면 말이다.
“으음….”
대충 주변을 둘러보니 한 번 본 적 있는 방.
아무래도 <이블 헌터> 클랜 타워 내에 있는 휴게 전용 방인 것 같다.
방 안엔 나와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다 모여있었다.
세 명의 연인과 부마스터인 스승님.
<이블 헌터>의 각 팀장들과 친구놈인 박진우.
그 외에 박지환이나 최유민 등 이번 작전에 다방면에서 도움을 줬던 홀더들도 근처에 서 있었다.
‘뭔가 민망하네.’
주변인들이 이렇게 하나같이 모여 날 기다리고 있으니 뭔가 부끄럽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들 모인 걸 보니 공략은 성공인가 보네요.”
기억의 끈은 황성연을 죽인 것까지 남아있다.
지긋지긋했던 그와의 악연을 끝내고, 보상처럼 올라오던 무수한 정보창들.
그리고 의식이 끊긴 채 쓰러졌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4팀 팀장 김아름이 웃으며 내게 패드를 보여줬다.
“가장 위험했던 적을 쓰러뜨린 마스터 덕분에요. 여기.”
그녀가 건넨 패드 안엔 이번 사건과 관련된 각종 기사들이 쌓여있었다.
-마검의 소유자 황성연, 도재현의 검에 척살되다!
-<이블 헌터> 클랜, 제6구역 완벽 공략! 사망자는 한 명도 없어…
-드디어 붙잡힌 최악의 범죄자, 이제 남은 건 루덴아크 뿐.
-<이블 헌터>의 독보적인 공략 성과, 3대 클랜과 어깨를 나란히… 소수 정예 클랜의 표본.
제일 먼저 뜬 건 역시 우리 클랜의 공략 성공 이야기.
기사에 있는 내용과 클랜원들의 설명을 들으며 금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던전 내에 남아있던 언데드 군단들은 루덴아크 학파의 병력이지만, 그 지휘권은 계약을 통해 황성연에게 있었다.
그건 전투 초반 ‘본 드래곤’이 황성연의 손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황성연을 쓰러뜨리며 기절한 직후, 언데드 군단 역시 구심점 역할을 하던 우두머리를 잃게 됐다.
그리고 S급 홀더이자 부마스터인 스승님은 그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인물.
빠르게 클랜원들을 규합해 지휘하면서 남은 공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사망자는 제로.
나를 포함한 부상자는 고작 열 명.
그리고 제6구역에 있던 적들은 몰살.
완벽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놀라운 결과였다.
“대단하시네요, 스승… 아니, 부마스터.”
아직은 스승님이라는 수식어가 더 입에 붙는 유은설을 향해 감탄과 경의의 눈빛을 보내자,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 살짝 웃으며 답했다.
“4팀 팀장 말처럼, 재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황성연이 죽으면서 언데드 군단에 결속력이 사라졌으니까요.”
스승님은 가끔 보면 너무 완벽한 사람 같다.
S급 홀더로서 이미 실력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겸손함과 인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이니까.
아마 그런 점 때문에 그녀를 따르는 무소속 홀더들이 그렇게 많았고, 역으로 그런 점 때문에 타 클랜에 잘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같다.
“뭐지, 이 분위기?”
“나 뭔가 엄청 불편해, 채은아.”
“…….”
잠깐 딴짓을 하고 있자, 어디선가 들려오는 김채은과 문가은의 목소리.
그에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바로 화제를 돌렸다.
“김아름 홀더, 그래서 루덴아크의 잔당들은 어떻게 됐죠?”
“아, 네. 우리가 제6구역 공략을 시작한 후로, 루덴아크의 학파장과 부학파장이라는 인물들이 현계로 이탈을 했었어요.”
“이탈…을 했었다고요?”
이건 전혀 생각치 못했던 부분이다.
물론 적들도 우리의 던전 침입을 감지한 만큼 반격을 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과감하게 현계로 이탈을 시도하면서 국내 지역들을 노릴 줄은 몰랐다.
“네. 여길 봐 보세요.”
김아름은 패드의 기사들을 새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죽음이 닿은 미로 최종지에서 마주쳤던 군단 급의 언데드들이 현계에도 강림했었다고 하더라고요.”
기사 내용들과 그녀의 설명을 취합하면 상황은 이랬다.
우리가 제6구역을 공략하고 있는 동안, 루덴아크의 학파장 및 부학파장으로 대표되는 간부들과 그 외 이탈자들은 현계로 이탈하며 국내 침공을 시도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견했던 연합군 전략팀.
그들은 미국에 원조를 요청해 무려 <자유의 날개> 클랜과 리암 헨드릭스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현계로 나타났던 루덴아크의 병력을 빠르게 진압할 수 있었다….
“…우리가 미로에 있는 동안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었군요.”
“연합군도 가만히만 있던 건 아니니까요.”
“그럼 혹시 학파장 등 간부들도 모두 잡은 겁니까?”
그렇게 쉽게 잡히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혹시나 해서 던져보는 질문.
이에 김아름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던전으로 다시 돌아갔다네요. 그리고 그러면서 던전 공략도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어요.”
휙휙 넘겨진 마지막 기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7부 능선 넘은 <이탈자의 방>, 앞으론 어떻게 될까?
-홀더 협회장, “제7구역부턴 장기전이 될 것 같다.”
-루덴아크 척살은 장기전으로… 국내 주요 클랜들, 돌아가면서 공략한다!
-리암 헨드릭스, “한국의 요청이 있다면 언제든 다시 올 것.”
“방금 전에 홀더 협회 협회장님이 오셔서 말을 남기고 가셨어요. 앞으로 이탈자의 방 공략은 클랜별 교대 공략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네요. 공로가 가장 높은 저희 클랜에겐 우선권을 주시겠다고, 깨어나면 다시 얘기하자고 말씀하셨었습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공략을 마친 제6구역.
그러나 제7구역부턴 국내 주요 클랜들도 쉽게 공략하기 힘든 함정들과 병력들이 자리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연합군에서 내린 결정은 클랜별 교대 공략.
주요 클랜들마다 순서를 정해, 상황과 시간에 맞게 공략을 시도한다는 기조였다.
“그러니까….”
“네, 일종의 휴전인 셈이죠.”
루덴아크와 황성연을 쫓아 쉴 틈 없이 달려왔던 순간들.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