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호 클랜 협정
“반갑습니다. 이블 헌터 클랜 마스터 도재현입니다.”
“클랜원 김채은이에요.”
“기획팀장 한상진이라고 합니다.”
<자유의 날개> 클랜 타워에 우리 클랜원들이 대거 모였다.
함께 왔던 나와 김채은은 물론, 이번 업무를 함께 진행할 기획팀장 한상진과 그 휘하 몇몇 직원들이 동행한 상태였다.
박진우와 카밀라도 뉴욕에 있긴 하지만, 그들은 휴가 중이라 참석하지 않았다.
애초에 깨가 쏟아질 시기라 눈치껏 말도 안 꺼냈다.
“반갑습니다. 리암 헨드릭스입니다.”
헨드릭스는 그런 우리가 상당히 반가운지 환한 미소로 손을 내밀었다.
이전부터 내게 호감을 보이던 그였는데, 일련의 사건들을 연달아 겪으며 나와 우리 클랜에 더 깊은 유대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뭔가 신기하네.’
세계 최강의 홀더, 리암 헨드릭스.
처음 홀더가 됐을 때만 해도 기사로만 접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이렇게 한 단체의 수장이 되어 같은 자리에서 나란히 마주보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우리 클랜과 내가 세계적인 수준의 명성을 얻게 됐다는 게 확 실감이 났다.
“오는데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웃으며 묻는 헨드릭스에게 괜히 심술궂은 질문을 한다.
“헨드릭스. 그거 일부러 묻는 거죠?”
“아? 하하! 미안합니다. 바로 어제 있었던 사건을 잊다니, 제 실수입니다.”
뉴욕 전역을 강타한 투기장 테러 뉴스.
미국이 처음으로 루덴아크 학파에 피해를 당한 사건이자, 더 이상 미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 사건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일정상 뉴욕에 온 내가 해당 사건을 1분 만에 해결하면서 엄청난 화제가 됐었다.
최근의 난 S급 홀더로 승급하게 되며 국제 홀더 계에 이름을 알렸는데, 이 사건을 통해 그 명성이 몇 배로 치솟는 느낌이었다.
호사가들은 ‘뉴욕의 영웅’이라는 호칭까지 붙였다던데, 솔직히 영웅이라는 별명은 이제 그만 좀 들었으면 좋겠다.
“저도 뉴욕과 미국 시민들을 대신해 감사드리겠습니다. 큰 일을 하셨습니다.”
감사 인사를 전하는 헨드릭스를 향해 웃었다.
“마치 헨드릭스가 한국을 도와준 것처럼요?”
“하하. 그게 또 그렇게 되는군요.”
“승급 심사까지 치면 아마 제가 도움받은 게 더 많을 겁니다.”
“도재현 홀더는 겸손하기까지 하네요.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네.”
자유를 추구하는 미국과 <자유의 날개>라는 클랜 이름답게, 헨드릭스의 마스터 룸은 상당히 특이한 구조로 돼 있었다.
건물의 한 층이 전부 마스터 룸으로 구성돼 있는데, 내부는 마치 거대한 정원이 펼쳐진 것처럼 초목들로 꾸며져 있다.
더 안쪽으로 가면 작은 규모의 풀장이 마련돼 있고, 피서지에 있을 법한 선베드와 칵테일 테이블도 있었다.
…이게 마스터 룸인지 휴양지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제가 노는 걸 꽤 좋아합니다. 클랜에서조차요.”
“즐겁게 사시네요.”
“홀더 일도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계 최강의 홀더도 의무감만으로 일하진 않는다.
마스터 룸 구조와 말 몇 마디만으로 그의 홀더 철학이 묻어나왔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비슷한 인테리어의 회의실이 나왔다.
<이블 헌터> 기획팀과 <자유의 날개> 기획팀이 모두 착석하고, 헨드릭스와 내가 서로를 마주보고 앉는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일 얘기가 시작됐다.
“저희 자유의 날개 클랜은 이블 헌터 클랜과 최고 수준의 우호 협정을 맺길 희망합니다.”
이번 만남에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지만, 가장 핵심 주제는 역시 ‘우호 협정’에 관한 것이다.
이미 클랜 창설 당시 국내 3대 클랜들과도 맺은 적이 있는 협정.
하지만 당시 우호 협정이 <이블 헌터>의 안정적인 창설을 목표로 둔 형식이었다면, 이번 협정은 온전히 클랜 대 클랜으로 진행되는 우호 협정.
<이블 헌터>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보여준 잠재력과 가능성에 미리 배팅하는 협정이었다.
‘다른 클랜들도 엄청 제의해 왔지만….’
이미 우호 클랜 협정 제의를 건 클랜은 한둘이 아니다.
국내에만 수십 개의 클랜이 요청했고, 해외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유명 클랜들의 협정 제의를 해왔다.
하지만 <자유의 날개>로부터 제의가 들어왔을 때, 나머지 클랜들은 더 이상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 … … 소유 던전 공유에 대해선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호 클랜의 역사를 보더라도 던전 공유에서만큼은 … … ”
“ … … 이탈자의 방 공략은 상시 협업 상태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블 헌터 클랜이 해당 던전 공략에 있어 한국의 타 클랜들보다 우선권을 지니고 있고, 또 … … ”
회의는 장장 3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워낙 세계적인 클랜과의 우호 협정, 그것도 최고 수준의 협정을 맺는 것이기에 서로 논의하고 맞춰봐야 할 사항들이 꽤 많았다.
회의는 주로 각 클랜의 기획팀들이 주도했지만, 마스터인 나와 헨드릭스 역시 집중하며 이를 지켜봤다.
그리고 마침내.
“그럼 현 시간 부로 한국 이블 헌터 클랜과 미국 자유의 날개 클랜의 우호 클랜 협정을 확정짓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나긴 회의가 끝이 나며 협정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마스터 룸 안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렸고, 헨드릭스와 나는 웃음을 지으며 재차 악수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도재현 홀더.”
“그 말을 헨드릭스에게 들으니 이상하네요.”
세계 최고의 클랜과 우호 클랜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도재현의 <이블 헌터>, <자유의 날개>와 우호 클랜 맺다!
-끝을 모르고 위로 비행하는 도재현과 <이블 헌터>! 이번엔 세계 최고의 클랜과 함께!
-리암 헨드릭스, “이블 헌터처럼 유망한 신규 클랜과 우호 협정을 맺게 돼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회를 선점한 것이다.”
-홀더 계 원로들, 입 모아 “국내 4대 클랜에 이블 헌터가 들어가야 한다.”
“재현이는 이제 숨만 쉬어도 기사가 뜨는구나.”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던 기사들을 읽던 김채은이 웃으며 말한다.
나는 그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어떻게 숨만 쉰 거야. 세계 최고의 클랜이랑 우호 협정을 맺었는데.”
“헤헤. 재현이한텐 쉬운 일 아니야? 생각만 하면 뭐든 턱 턱 해내잖아.”
“채은아, 나 그 정도로 만능 아니야. 누가 들을까 겁난다.”
“그 정도로 만능 맞아. 오히려 그 말을 누가 들으면 돌 던지겠다.”
김채은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날 와락 안았다.
미국에서의 모든 공식 일정을 마친 후.
우린 드디어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사실 첫 날부터 만끽했어야 할 행복인데 웬 뱀파이어 하나가 투기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미뤄졌다.
당장 어제도 <자유의 날개>와 협정이 끝나자마자, 국제 홀더 협회의 요청으로 ‘캐롤라인 남작’의 심문을 도왔었다.
이제서야 좀 숨을 돌릴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아, 참. 그 뱀파이어는 어떻게 된 거야? 정말 루덴아크 학파를 도운 거래?”
그녀는 심문에 참여하지 못한 탓에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
나는 어제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리플리한테 이런저런 상황을 물어보면서 심문했는데, 아무래도 리플리 말고 이탈자의 방에 있는 뱀파이어들이 몇 명 있나 봐.”
루덴아크 학파의 전력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점이 많았다.
첫 번째로 뱀파이어.
리플리가 이계에 있을 당시 <벨테인>에서 나와 루덴아크 학파와 접촉했듯, 그런 식으로 <벨테인>을 떠나 <이탈자의 방>에 잠시 머무르게 된 뱀파이어들이 꽤 있었다.
캐롤라인 남작은 그런 식으로 루덴아크와 계약한 뱀파이어 중 하나.
그녀는 심지어 [어둠의 서약]까지 맺으며 악성향 신성력과 검은 마력까지 다룰 수 있게 된 계약자였다.
루덴아크 측이 그녀를 ‘이탈화’시켜 현계를 침공한 걸 보면, 슬슬 뱀파이어들을 활용해 보려고 하는 그들의 계획을 엿볼 수 있었다.
“두 번째가 테르멘.”
“테르멘? 어? 어디서 들어봤는데.”
“전에 말해줬잖아. 이 검이 성검이 된 이유.”
나는 [켈빌리드의 진정한 회개]를 꺼내들며 김채은에게 보여줬다.
‘테르멘의 전사들’.
일전엔 그 존재 자체도 몰랐었지만, [참회자의 검]을 진화시킬 때 죽였던 데스 나이트를 통해 알게 된 존재들.
그들 또한 현재 <이탈자의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형태는 전에 마주친 것처럼 데스 나이트의 형태도 있고, 실제로 살아있는 인간의 형태도 있다.
리플리에게 들은 바로는 이계에서의 역사가 꽤 깊은 부족이었다.
“부족 자체가 땅을 잃고 멸망해서, 뿔뿔이 흩어졌대. 근데 그 중 가장 많이 간 곳이 루덴아크 학파랑 벨테인이라고 하더라고.”
“벨테인이면…”
“응. 리플리가 원래 있었던 곳. 뱀파이어들의 영역.”
뱀파이어들의 땅, <벨테인>.
그곳에 뱀파이어들과 테르멘 전사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루덴아크 학파의 전력을 효과적으로 간파하기 위해선, 이를 찾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곧 가보려고. 그 벨테인이라는 곳.”
리플리와의 계약 때문에 원래도 찾아갈 계획이었던 <벨테인>.
그 특별한 던전의 공략일이…
조금 더 앞당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