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의 땅, 벨테인 (4)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지만, 분명 [어둠의 서약]이 새겨진 ‘검은 마력’은 아니다.
특이한 생김새와 붉은 안광을 보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뱀파이어나 데스 나이트도 아니다.
남자는 분명 ‘인간’이었다.
단지 그 외관이 너무 특이한 탓에, 보자마자 인간이라고 여기긴 힘들었을 뿐.
-대답이 없군. 그렇다면 직접 묻는 수밖에.
무언가 긁어진 듯한 음성이 [언어]를 통해 들린다.
그리고 낡은 벽장 안을 열면서, 남자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나를 ‘켈빌리드’라고 부른 것.
그리고 몇 번이나 경험한 이 익숙한 전사의 기운.
아마 저 남자는 ‘테르멘 부족’의 일원일 확률이 높았다.
즉, 우리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뜻이다.
“…….”
그런데 그 불쾌한 인상과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 때문일까?
옆에 있던 리플리가 순간 마력을 끌어올리는 게 보인다.
사실 리플리가 지금껏 나와 같이 다니면서, 전투가 일어났을 땐 전적으로 내게 맡겼었다.
어차피 내 무력 자체가 강하기도 하고, 그녀와 내 계약 관계는 다른 계약자들처럼 온전한 주종 관계가 아니기도 하니까.
그런데 지금은 살짝 다른 모습이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남자를 죽일 기세로 마력을 뿜어낸다.
‘…왜 이래?’
그에 오히려 내가 속으로 긴장을 삼켰다.
리플리는 S급 홀더 그 이상의 마법사.
그녀의 마법 한 번에 이 성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마법은 순식간에 준비됐다.
속성은 불.
마력이 뭉쳐진 지 3초 만에 강렬한 열기가 주변을 덮친다.
얼핏 보면 강주연이 펼쳤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강력한 불속성의 마법이다.
20레벨의 [엘리멘탈 유저] 룬이 보이는 위용이었다.
“리플리, 왜 그래?”
“쟤, 마음에 안 들어.”
여기서 ‘쟤’는 당연히 저 음침한 테르멘 녀석이다.
그 손짓에 테르멘 녀석도 순간 몸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녀석도 이 마법이 보통 마법이 아니라는 걸 아나 보다.
“어떤 점이?”
“생긴 것부터 껄렁거리는 것까지 전부. 저 새끼, 그 빌어먹을 테르멘의 종자 맞지?”
“…….”
나는 리플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거친 욕설에 입을 다물었다.
일전에 캐롤라인을 심문할 때도 느꼈지만, 리플리는 유독 테르멘의 전사들을 싫어했다.
듣기로는 루덴아크의 영역인 <이탈자의 방>에 있을 때도, 데스 나이트가 된 테르멘 전사들을 보이는 족족 가루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는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리플리가 <벨테인>을 공략하기 위해 날 부른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하나 더. 넌 도재현인데 왜 켈빌리드라고 하는 거야?”
“…그러게.”
역시 고귀한 뱀파이어 백작.
[언어] 룬이 없는데도 테르멘의 말을 알아들었나 보다.
게다가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나와 켈빌리드는 그저 같은 검을 썼을 뿐인데, 이놈의 테르멘 새끼들은 날 볼 때마다 켈빌리드라고 불러댔다.
덕분에 테르멘 데스 나이트들과 싸울 땐 항상 전력을 다해 부딪혀야 했다.
리플리는 끌어올리는 마력을 붙잡은 채, 그대로 고개를 돌려 내게 물었다.
“죽일까? 마스터.”
“…….”
…기어코 그 말을 꺼내는구나.
이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하지만 대답을 할 겨를이 없었다.
문득 벽장 쪽에 있던 테르멘의 전사가 쿵쿵 하고 금세 우리 앞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리곤 왠지 모르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착각했네. 그대는 그저 켈빌리드의 검을 쓰는 인간일 뿐이었군. 그리고 리플리 백작도 계셨군. 반갑소.
그걸 듣고 생각했다.
이 새끼…
너도 리플리는 무섭구나?
* * *
남자는 <이탈자의 방>에서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테르멘 녀석들과 달랐다.
들어 보니 그들은 데스 나이트가 되면서 이성을 잃어 그리 행동했던 거라고 한다.
그래서 나와 켈빌리드도 구분하지 못하고 무작정 공격한 거라고.
‘…그렇다고 치기엔 너도 처음엔 켈빌리드라고 했잖아.’
남자는 그런 모순은 가볍게 넘어가는 편의를 보였다.
어쨌든 무력이 살짝 섞인 타협이 끝난 후.
우리는 캐롤라인의 방에서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주제는 당연히 캐롤라인과 테르멘의 관계, 그리고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였다.
-반갑네. 나는 테르멘의 상급전사, 올란드라고 하네.
쿵- 하고 자신의 어깨를 치며 말하는 테르멘 전사, 올란드.
그의 몸짓과 말투에서 커다란 자부심이 느껴진다.
확실히 ‘상급전사’라는 직함까지 있는 걸 보면 평범한 전사는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 모습에 리플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다시 마력을 뿜는다.
“죽일까? 마스…”
-올란드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단언컨대 이 새끼들은 전사가 아니다.
무력 앞에 이토록 쉽게 무릎 꿇는 녀석들이 전사는 무슨 전사.
어이없는 듯한 내 표정에 헛기침을 몇 번 한 올란드가 말을 이었다.
-흠흠. 어쨌든 전말은 잘 들었습니다. 종합하자면 제 계약자인 캐롤라인 남작이 루덴아크 학파의 편에 섰고, 그 앞잡이 역할을 하다가 변을 당했다는 말이군요.
대화가 통한다는 걸 알고 난 후 간략하게 우리의 상황을 이야기했는데, 올란드는 단번에 이를 파악하고 정리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눈치와 두뇌 회전이 빠른 녀석이다.
그런데 그에게서 익숙한 단어가 들렸다.
“계약자?”
-아, 말을 잘못했군요. 시스템 상으로는 계약이 해지됐습니다만, 아직 서류 상으론 계약서가 남아있어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정확히는 구 계약자가 맞겠군요.
“아니, 아니. 그게 궁금한 게 아니라, 네가 캐롤라인 남작의 계약자였다고?”
“아마 맞을 거야.”
리플리의 말에 고개를 돌린다.
그녀는 진지하게 부연 설명을 하며 내 이해를 도왔다.
“도재현, 네가 나와 계약을 맺은 것과 비슷한 구조야. 뱀파이어는 특수 사령이긴 해도 어쨌든 사령으로 분류돼. 그래서 인간, 혹은 타 종족과 계약을 맺을 수 있지.”
“심장을 바쳐야 하는 거 아니었어?”
“그건 내 상징의 공유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내 질문에 술술 답하던 리플리가 순간 입을 다문다.
그녀의 뱀파이어 상징인 ‘씨앗’.
그중 계약과 관련된 ‘의심의 씨앗’ 이야기를 무심코 할 뻔했나 보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어쨌든 도재현, 네가 심장을 바친 것처럼 다른 뱀파이어들도 저마다의 계약 방식이 있어. 저 올란드라는 테르멘 전사는 그렇게 캐롤라인 남작과 계약한 거겠지.”
그런 리플리의 말에 올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캐롤라인 남작은 제게 파멸을 대가로 계약하자고 했죠.
파멸을 대가로 계약한다니.
상징을 소재로 한 오글거리는 계약 내용은 다 비슷하구나.
올란드는 어깨를 쿵- 하고 치며 말을 이었다.
-저로서는 만족스러운 계약이었습니다. 저는 벨테인에 빠르게 정착한 다른 테르멘 전사들과 달리 약간 고지식한 면이 있어, 후견인 뱀파이어를 늦게 찾은 편이거든요.
후견인 뱀파이어.
또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
“도와줘요, 스피드왜건.”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지 마.”
“미안.”
“후견인 뱀파이어는 말 그대로 후견인이야. 정확히는 테르멘의 전사들과 계약하면서, 그들의 편의를 봐주는 뱀파이어들을 말 해. 전에 테르멘 부족이 멸망하면서 루덴아크의 영역과 벨테인으로 흩어졌다는 건 들었지?”
“응.”
“그중 벨테인으로 넘어온 테르멘 전사들은 대부분 뱀파이어와 계약을 맺었어. 어쨌든 그들도 이 죽음의 땅에서 살아가려면 나름의 뒷배경이 있어야 하니까.”
-맞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전사들 중에서 그 계약이 늦은 편이라, 크게 망설이지 않고 계약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차원 이동이 시작됐고, 벨테인에 시스템이 적용됐죠.
홀더 시스템과 이계의 차원 이동.
올란드는 <벨테인>이 던전화 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 얼마 안 되고, 캐롤라인 남작은 던전 이탈을 시도하며 벨테인을 떠나버렸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계약자인 제 사견으로는 아마 아버지를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 도재현 님과 리플리 백작님께서 말하신 내용을 종합하자면요.
그리고 결정적인 단어가 나왔다.
“아버지?”
-예. 캐롤라인 남작은 뱀파이어와 테르멘 전사에게서 나온 혼혈 뱀파이어거든요. 그리고 그 아버지이자, 테르멘의 족장 전사였던 타슈마드가 루덴아크의 영역에 갔었죠. 타슈마드는 벨테인에 정착한 저희들과 달리, 루덴아크로 정착한 대표적인 전사였습니다.
거기까지 들으니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그러니까 캐롤라인 남작은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벨테인>을 이탈해 <이탈자의 방>으로 갔고, 그곳에서 아버지와 루덴아크 학파를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뉴욕 투기장에서 테러를 일으키려 했던 거겠지.
리플리가 처음 말했을 땐 캐롤라인이 <벨테인>에서 방출당했다고 했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그녀가 잘못 알고 있던 내용인 모양이다.
캐롤라인은 <벨테인>에서 방출당한 게 아니라 직접 이탈을 한 거였다. 마치 리플리처럼.
머릿속에서 대강 그러한 타임라인이 그려졌다.
“그럼 이탈한 뱀파이어는 캐롤라인 한 명이야?”
<벨테인>에서 이탈한 뱀파이어들은 대부분 <이탈자의 방>으로 갔다.
나는 그들의 추가 전력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건넸다.
-그건 아닐 겁니다. 당장 앞에 계신 리플리 백작도 이탈을 했었고, 캐롤라인과 우호 관계에 있는 몇몇 뱀파이어도 넘어갔다고 들었는데, 아마 자작급을 넘어서는 뱀파이어는 없을 겁니다.
그 대답을 통해.
내가 굳이 <벨테인>의 캐롤라인 남작령까지 찾아온 소기의 목적이 달성됐다.
그건 바로 루덴아크 학파에 얼만큼의 뱀파이어 전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
캐롤라인 남작을 통해 그들의 새 전력을 알게 됐기에, 이를 조금 더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전원 남작급이면… 어렵진 않겠네.’
생각보단 어렵지 않을 것 같은 전력이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두 번째 목적에 대해 물었다.
“올란드. 그러면 루덴아크의 영역에 간 테르멘 전사들의 전력 수준은 어떻게 돼? 그들 대부분이 루덴아크의 편에 섰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 질문은 거부감이 들었는지 올란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예? 그건 대답하기 어렵군요. 아무리 제가 뱀파이어와 계약한 테르멘 전사라지만, 한때 동족이었던 전사들의 정보를 어찌 그리 쉽게….
그리고 리플리가 마력을 뿜는다.
“속성은 불이 좋지?”
-드, 드리겠습니다.
역시 동료들은 멀고, 마법은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