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의 땅, 벨테인 (5)
다행히 리플리가 “필요없어!”를 외치는 일은 없었다.
올란드는 천천히 동족들의 정보를 정리해 내게 설명했다.
족장 전사 타슈마드.
최상급 전사 알드레드와 그리멜드.
그리고 상급 전사 약 20명, 중급 및 하급 전사는 셀 수 없음.
그게 올란드가 밝힌 루덴아크 내 테르멘의 전력이었다.
아마 사후에 데스 나이트로 계약하게 된 테르멘 전사들까지 합치면 그 수가 훨씬 많겠지.
하지만 이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많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양보단 질이 중요하니까.’
족장 전사와 최상급 전사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마주치지 않아서 모르겠다.
하지만 상급 전사들의 실력은 대강 안다.
딱 S급 괴수 수준.
내가 <죽음이 닿은 땅>에서 마주쳤던 테르멘 데스 나이트들이 상급 전사였으니 아마 확실할 거다.
그리고 S급 괴수는 S급 홀더가 홀로 사냥할 수 있는 단계의 괴수. A급 홀더들도 공격대 단위부터는 쉽게 사냥할 수 있는 괴수다.
즉, S급을 뛰어넘는 전사 3명에, S급 괴수 수준이 20명.
나머지는 전원 A급 괴수 이하니까 애초에 확인할 필요가 없다.
‘…진짜 생각보단 많지 않아.’
의외의 소득이었다.
뱀파이어들은 전원 남작급.
테르멘은 상급 이상의 전사가 23명뿐.
이 정도면 루덴아크 공략 연합군이 뭉쳤을 때, 크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캐롤라인한테 테러를 시킨 거구나.’
그제야 루덴아크 학파의 전략이 이해가 갔다.
굳이 뱀파이어나 테르멘 전사들을 이탈화시켜 현계에 타격을 입히려는 이유.
이는 맞대결을 했을 때 승산이 많은 전력이 아니란 걸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큼, 크흠. 도움이 좀 되셨습니까, 리플리 백작?
동족의 정보를 술술 불던 올란드가 이제 와서 헛기침을 하며 리플리에게 물었다.
물론 리플리의 시선은 날 향해 있다.
“도재현, 도움이 됐어?”
“응. 개인적으로는 벨테인에 온 목적을 거의 다 이뤘어. 고마워, 리플리. 네 덕분이야.”
운 좋게 캐롤라인의 계약자인 올란드가 있긴 했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리플리의 덕이다.
나로선 아무 정보가 없는 <벨테인>에서 길잡이 역할을 해준 것도, 남작령 안에서 캐롤라인의 성과 방을 찾아 나서준 것도 그녀였으니까.
…올란드에게 작은 질문(협박)을 해준 건 덤이다.
“뭐, 뭐라는 거야. 나도 목적이 있어서 데려온 거니까 낯간지러운 말은 하지 마.”
이게 낯간지러운 말인가…?
어쨌든 우리가 목적한 바를 모두 이루자 올란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리플리 백작? 그럼 전 이제 가봐도 되는 겁니까?
그 말을 듣고 있으니 문득 궁금해진다.
캐롤라인 남작령은 뱀파이어였던 캐롤라인이 소유하고 있던 영역.
아마 리플리가 자신의 백작령이 그대로 있다는 걸 보면, 이탈을 하더라도 영토의 소유권은 유지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캐롤라인은 뉴욕 테러 사건 이후,심문 끝에 결국은 처형당했다.
뱀파이어가 인간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적응자이자 특수 사령이긴 하지만 어쨌든 일반인들을 살해한 범죄자.
루덴아크 학파와도 연관이 깊어 어떤 추가 범죄를 저지를지 모른다는 의견에, 국제 홀더 협회에서 처형이 확정됐다.
즉, 캐롤라인 남작은 현재 사망 상태다.
그렇다면 이처럼.
영지의 주인이 ‘이탈’에서 그친 게 아닌…
‘죽음 혹은 소멸’에 다다르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의문은 리플리가 의도치 않게 해결해줬다.
“어디로 가려고? 어차피 캐롤라인 남작령도 중립 지역이 될 텐데.”
-예? 리플리 백작께서 본 영토를 합병하려는 게 아니셨습니까?
“너, 미쳤니? 내가 캐롤라인 남작의 영지 따위를 왜 합병해? 이렇게 척박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 죽음의 땅을.”
-…벨테인은 전부 죽음의 땅 아닙니까?
“자꾸 말꼬리 잡는 거 보니까 역시 마법을 쓰는 게-”
-…라고! 중립지역의 동족들은 생각하겠죠! 하하하. 하지만 전 리플리 백작의 의견에 백 번 공감합니다. 백작께서 이곳을 굳이 합병할 이유가 없죠. 예.
더 이상 대화인지 만담인지 모를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고, 올란드는 다시 처음 왔을 때 있던 벽장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그럼, 두 분 편하게 있다 가십시오. 곧 남작령이 중립 지역으로 선포되더라도, 저는 전 계약자의 지위를 인정받아 이곳에 있을 테니… 만약 제 소식이 궁금하시다면 이 성으로 오시면 됩니다.
쿠우웅-.
그렇게 올란드는 알짜배기 정보들을 넘겨주고 그대로 벽장 속에 들어가버렸다.
…벽장이 너무 낡아서 그런지, 꼭 관에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도 난다.
나는 옆에 있던 캐롤라인 남작의 침대에 털썩- 하고 걸터앉았다.
그리곤 리플리를 본다.
내가 목적했던 바는 모두 이뤘지만, 궁금한 점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리플리, 근데 중립지역이라는 게 뭐야? 올란드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말하는 거 들어보면 되게 중요한 것 같은데.”
“중요하지, 당연히.”
리플리가 한쪽 무릎을 내가 앉은 침대에 걸치며 다가온다.
그리고 일전에 봤던…
붉디 붉은 눈동자를 드러내며 날 바라봤다.
“도재현, 이제부터 네가 약속을 지켜야 할 장소니까.”
* * *
<벨테인>의 땅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가 영지.
처음 이곳에 입장했을 때 마주했던 <발레로프 남작령>이나 방금까지 우리가 있던 <캐롤라인 남작령>, 혹은 리플리가 소유한 <리플리 백작령> 등…
뱀파이어 귀족들이 직접 소유하고 관리하는 땅이다.
영지는 <벨테인>의 땅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애초에 이 던전 자체가 뱀파이어들의 땅을 의미하기에, 당연히 그 주인인 귀족들의 영지가 가장 많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황무지.
이건 비중을 차지하는 땅들이 대부분 황무지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주인을 섬기지 않는 괴수들이 돌아다니는 땅이라고 해서 붙여지기도 했다.
황무지엔 뱀파이어 귀족으로부터 파문당한 하수인들이 오기도 하고, 어딘가에 소속되기 싫어하는 독고다이 괴수들이 모이기도 한다.
인간들의 기준으로 치면 일종의 ‘결계 밖 필드’.
사람이 살지 않는 척박한 땅에 해당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중립지역. 뱀파이어들이 차지할 수 없는 땅이지만, 그 하수인들은 영토 분쟁을 통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곳이야.”
그렇게 말한 리플리가 가볍게 불꽃을 일으킨다.
화륵-!
크웨엑-!
불속성 공격 마법 하나가 작렬하고, 우릴 가로막던 캐롤라인 남작의 하수인이 그대로 명을 달리 했다.
“…….”
마치 숨을 쉬듯 간단히 하수인을 처치한다.
내가 직접 전투에 나서는 걸 지켜만 보던 아까완 확연히 다른 모습.
아마 지금은 내게 설명을 해줘야 하기에, 쓸데없는 시간들을 최대한 단축시키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난 매우 편안한 자세로 그녀의 설명을 듣는 중이었다.
“중립지역이 선포되는 기준은 제각각인데, 지금 우리가 있는 캐롤라인 남작령처럼 주인이 사라진 영지는 해당 귀족이 소멸하고 7일 후에 중립지역으로 선포돼. 그 전까지 다른 귀족이 영지를 합병하지 않는다면.”
거기까지 듣던 난 나름의 유추를 하며 물었다.
“근데 리플리 너도 캐롤라인 남작령이 좋을 게 없다며 합병 안 했잖아. 그럼 다른 녀석들도 굳이 중립지역 분쟁을 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니야?”
리플리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뱀파이어들에게 별로인 땅인 거지, 갈 길 잃은 벨테인의 괴수들한텐 보금자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아, 그렇네.”
“그리고 모든 중립지역이 안 좋은 건 아니야. 몇몇 중립지역 중엔 뱀파이어들도 눈이 돌 정도로 마력재료나 자원이 넘치는 곳이 있어.”
하지만 뱀파이어들은 그 중립지역의 분쟁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다.
이게 <벨테인>에 주어지는 규칙 중 하나였다.
“근데 빌어먹을 라큘리제 녀석들이 그 룰을 깼어. 교묘하게.”
“라큘리제?”
“백작이야, 내 영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영지의 주인. 그리고 격 떨어지게 떨거지 귀족들을 데리고 다니는 년이기도 하지.”
싫어하는 귀족이라 그런지, 일전의 거친 욕설들이 또 튀어나온다.
그리고 리플리가 날 <벨테인>으로 초대한 진짜 이유가 나오고 있었다.
라큘리제 백작.
거기에 ‘떨거지’라고 표현되는 그녀의 우호 귀족들.
아무래도 그들과의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듣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룰을 깼다는 게 무슨 말이야? 중립지역을 차지했다고?”
“응, 맞아.”
“어떻게? 뱀파이어들은 직접 관여 못한다며.”
“맞아. 직접은 관여할 수 없어. 대신 계약자들은 이야기가 다르지.”
“…아!”
계약자.
그 단어에 머릿속에 가득하던 의문들이 해결된다.
캐롤라인 남작과 계약을 맺었던 테르멘의 전사, 올란드.
그는 분명 이곳 <벨테인>에 넘어온 다른 동족들이 있고, 그들은 뱀파이어들과 계약하며 후견인을 뒀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즉.
“테르멘 녀석들이 계약하고, 중립지역을 탈취했구나. 뱀파이어들의 지시로.”
뱀파이어의 직접 참여가 불가능한 중립지역에, 교묘하게 규칙을 깨며 간접적인 참여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리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떨거지 귀족들이랑 한패로 움직이면서 좋은 지역들만 골라 탈취했지.”
“아, 그럼….”
이제야 리플리가 ‘이탈’을 시도하고, 루덴아크의 영역인 <이탈자의 방>까지 찾아갔던 이유를 알게 됐다.
“맞아. 계약자들을 찾으려고 이탈한 것도, 너랑 계약한 것도 다 같은 이유. 중립지역에서 그년들이 나대는 꼴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리플리가 살짝 말을 멈춘 후.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날 봤다.
“아예 수준을 확 높여서 계약해버렸어. 그 빌어먹을 테르멘 녀석들을 전부 중립지역에서 몰아내려고.”
그게 리플리가 나와 계약하게 된 진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