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의 땅, 벨테인 (6)
우리는 캐롤라인 남작령을 벗어나 다른 영지로 향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리플리 백작령>.
리플리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자신만의 영지다.
다행히 도착하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캐롤라인 남작령 근처의 한 자작령에 도착한 후, 그곳의 [워프 게이트]를 활용해 이동했기 때문이다.
<벨테인>은 평범한 던전이 아닌 뱀파이어들의 거주지다.
마법에 대해 상당히 조예가 깊은 뱀파이어들이 적응자로 있기에, 당연히 던전 곳곳에 [워프 게이트] 또한 자리하고 있다.
다만, 캐롤라인 남작은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급이 살짝 떨어지는 귀족이기에 영지에 [워프 게이트]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리플리 백작령>.
“와… 잘 가꿨네.”
나는 영지를 보자마자 감탄했다.
‘씨앗’이라는 상징처럼 그녀의 영지는 다양한 초목과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줄기들과 푸르른 잎, 계절을 불러올 법한 가지들이 우릴 반겼다.
“흠흠. 그 정도야?”
“어. 건축가가 아니라 정원사라고 해도 믿겠는데?”
“흥. 유난 떨기는.”
괜히 틱틱대는 리플리.
하지만 은근히 기분이 좋아보이는 게 목소리에서도 느껴졌다.
게다가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도시가 보였는데, 그 도시의 근처에도 다양한 식물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생기가 느껴지는 영지.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던 <벨테인>의 별칭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지금껏 마주친 다른 영지들과 정말 같은 땅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무엇보다.
[‘리플리 백작령’에 발을 디딥니다. ‘씨앗’의 상징이 영지 전반에 퍼져 있습니다. 강인한 생명력이 몸 안에 깃들고 있습니다. 체력이 일시적으로 증가합니다.]
“영지 효과가 디버프가 아니네?”
정보창을 확인한 내가 깜짝 놀라 묻자, 리플리가 코웃음을 쳤다.
“디버프는 덜떨어진 귀족들이나 하는 방어 체계야. 나처럼 실력 있는 귀족들은 오히려 버프를 넣지. 그렇게 해도 침입자들을 제어할 수 있으니까.”
과연.
리플리 정도 되는 고위 뱀파이어들은 영지에 디버프를 넣는 걸 수치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영지의 진가는 뱀파이어 성에서 드러났다.
높게 솟은 건축물들과 심플하게 디자인된 아웃테리어.
그리고 그 주변을 감싸듯 여기저기 세워진 고목들.
으레 다른 성들에서 볼 수 있는 웅장한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리플리만의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뱀파이어 성 안에도 녹아들어 있었다.
성이라기보단 깔끔한 궁전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나는 감탄 어린 얼굴로 말했다.
“…진짜 다르긴 하네.”
“흥. 그렇다니까.”
캐롤라인의 뱀파이어 성에서 호언장담하던 리플리의 말이 이해가 갔다.
확실히 캐롤라인의 성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엔 웬 데스 나이트도 나타났다.
-어서오십시오. 백작님의 복귀를 환영합니다.
지금껏 내가 본 성격 더러운 데스 나이트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중함이다.
내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 리플리를 보자,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내 하수인이야.”
“하수인이… 데스 나이트?”
“난 백작급 귀족이니까. 유난 떨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중립지역 공략에 대한 이야길 해야 해.”
그렇게 성 안으로 들어온 후, 데스 나이트의 안내에 따라 3층에 있는 리플리의 침실로 가게 됐다.
…응접실 같은 곳에서 모이는 게 낫지 않냐고 물으니, 자기 방이 편하다는 간단한 이유로 묵살됐다.
어쨌든 우리는 본격적으로 중립지역 공략에 대한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벨테인 내 모든 중립지역은 일주일에 한 번만 공략 신청을 할 수 있어.”
“텀이 그렇게 길어?”
“응. 도전자 입장에선 빨리 공략하고 빼앗고 싶겠지만, 소유자 입장에선 방어하고 관리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니까.”
“아하… 근데 리플리, 공략을 ‘신청’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설마 그 과정을 총괄하는 사람도 있어?”
리플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아니고 뱀파이어. 벨테인 관리국 소속의 뱀파이어 심판관들이 신청을 받고 그 과정을 총괄해. 이건 중립지역뿐만이 아니라 영지 간 합병에서도 마찬가지야.”
“와, 본격적이구나.”
“어쨌든 중립지역은 일주일에 딱 한 번만 공략을 신청할 수 있어. 게다가 이것도 지원자가 몰리면 순번이 밀리지.”
“그럼 아예 신청도 못 해볼 수 있다는 건가?”
그 말엔 리플리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어차피 지금은 아무도 공략 신청을 안 하거든.”
리플리가 라큘리제 백작과 분쟁을 벌이는 중립지역은 총 9개.
그중 9개 모두가 <벨테인>으로 이주해 온 테르멘 전사들 소유에 있다.
즉, 라큘리제 백작 및 관련 귀족들과 계약한 테르멘 전사들이 담합해 모조리 각자만의 중립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립지역의 공략 신청 횟수는 날이 갈수록 현저히 줄어들었다.
“…테르멘이 너무 세니까.”
“맞아. 공략 난이도가 너무 높아져 버리니까, 다른 하수인들이 전혀 공략 신청을 안 해.”
그도 그럴 게 테르멘의 전사들은 상급전사만 해도 S급 괴수의 실력을 보인다.
한 명 한 명이 엄청난 전투력을 지니고 있고, 만약 최상급으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그 이상의 전투 능력도 보여주곤 한다.
그런 녀석들이 팀을 꾸려 각 지역들을 점령하는데 그 누가 쉽게 공략하려들까.
어지간한 영지 주민과 하수인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도재현, 넌 다르니까.”
“날 너무 고평가 하는 거 아니야?”
“흥. 제대로 붙으면 나도 질 것 같은데 무슨 고평가.”
어쨌든 도전자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내 공략 신청은 무조건 받아들여진다.
내가 인간인 건 문제가 안 된다.
어차피 <벨테인>은 다양한 종족들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는 곳이고, 실제로 중립지역을 차지 중인 테르멘 전사들도 인간 출신의 계약자들이니까.
‘그럼 간단하네.’
결국 리플리가 날 원했던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실력자들이랑 본격적인 전투를 치러 이겨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건, 내 전문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부터 공략하면 돼?”
* * *
“크아악! 넌 도대체 뭐냐…!! 갑자기 켈빌리드 녀석의 검을 들고 와서는-!”
어딘가의 3류 악당이 할 법한 대사가 귓가에 들린다.
저 전사의 이름은 뭐였더라.
에드레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중립지역 <소튼>을 소유하던 테르멘 전사가 소리를 질렀다.
난데없이 나타나 공략 신청을 하고, 홀로 <소튼>의 방어병력을 싸그리 밀어버리며 찾아온 나.
그 모습을 보고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싱긋 웃어주며 검을 들었다.
“미안. 내 계약자가 정체는 비밀로 하래. 그게 전략이라고.”
“끄, 끄아악-!!”
테르멘 전사의 심장에 검이 박히고, 그대로 전투는 내 승리로 끝이 났다.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룬 사냥꾼의 신묘한 힘으로, 상대방의 룬 하나를 복제할 수 있습니다. 복제할 룬을 선택해주세요.]
…
…
[도전자 ‘도재현’이 소유자 ‘에드레드’ 및 휘하 방어병력을 모두 처치하고, 중립지역 ‘소튼’의 소유권을 획득했습니다! 이는 고결한 뱀파이어 심판관 ‘클로이’가 검증한 적합한 결과입니다.]
[특별한 업적! 벨테인 내 중립지역 ‘소튼’의 소유권을 획득했습니다. 중립지역의 소유권을 획득하는 건 도전자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영광 중 하나입니다. 명예로운 업적에 당신의 능력들이 감응해 성장을 이룩합니다.]
[모든 일반 및 특수 능력치, 내성 능력치를 각각 1씩 획득합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떠오르는 정보창들.
사실 이건 지금껏 다른 던전에서 본 적 없는 특별한 정보들이다.
던전 내 적응자를 심판으로 두어 특정 지역을 공략하고, 그 공략의 도전에 성공하면 결과가 정보창으로도 나타나는 시스템.
마치 게임 같은 곳에서나 볼 수 있던 일종의 공성 시스템이다.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던전.
아마 현계에 알려지면 <초월자의 방>이나 <이탈자의 방>만큼 커다란 파급력이 생길 것이다.
공략 보상으로 ‘놀라운 업적’까진 아니지만, 모든 능력치를 올려주는 ‘특별한 업적’까지 회득할 수 있으니…
아마 능력치가 고픈 고위 홀더들에겐 눈이 돌아갈 정보겠지.
“…난 이제 지겹지만.”
성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한숨을 쉰다.
이 짓도 벌써 4번째였다.
능력치가 오르는 건 좋긴 하지만,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테르멘 녀석들의 똑같은 대사를 듣고 있으니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다.
종류는 약간 다르긴 하지만, 리플리가 왜 그렇게 테르멘을 싫어하는지 나름 이해가 되는 것도 같다.
“도전자. 공략 도중 중립지역의 소유자를 살해하셨군요. 이 경우, 추후 도전자께서 소유자가 된 후 타 도전자들의 공략 신청을 받는 기간이 6일로 줄어듭니다.”
뱀파이어 심판관 클로이가 내게 다가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나는 귀찮다는 듯 휙휙 검을 든 손을 내저었다.
“예, 괜찮습니다.”
이 말도 벌써 4번째 듣는다.
내가 테르멘의 전사들을 공략 도중 죽이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일단 녀석들이 너무 강하고 질긴 탓에 단순 제압으로는 공략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론 이들이 이계에서 악행을 일삼던 집단이라는 점.
리플리에게 듣기론 루덴아크 학파 정도까진 아니어도, 대륙에서 꽤 유명한 악의 무리였다고 한다.
괜히 회개한 켈빌리드가 세드닐렌의 대리자가 된 게 아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나중에 공략 신청 못 하게 하려면 후환이 없어야지.’
어차피 난 약속이 끝나면 <벨테인>을 떠나 현계로 돌아간다.
즉, 내가 공략한 중립지역은 알아서 소유권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리플리는 처음부터 중립지역을 전부 차지할 생각이 없었다.
단지 그녀를 빡치게 한 다른 귀족들을 엿 먹이고,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생각뿐이었다.
“누구 계약자인진 몰라도, 진짜 지독하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5번째 중립지역을 공략할 차례다.
리플리와 전략을 짠 지 고작 6시간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