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1)
“자, 여기.”
“…….”
리플리는 내가 건네는 인증패를 보고 말을 잃었다.
<벨테인>의 중립지역은 각 지역마다 도전과 공략에 성공할 경우 ‘소유주 인증패’라는 걸 준다.
회색 빛깔을 내는 금속에 피의 형상을 새긴 인증패인데, 외관만 봐도 뱀파이어와 관련된 물건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게 다….”
“응. 리플리 네가 말한 중립지역 전부를 공략 완료했어. 테르멘 녀석들은 깔끔하게 처치했고.”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진 인증패는 총 9개.
리플리와 내가 처음 공략 계획을 짤 때 목표로 한 9개 중립지역의 인증패였다.
나는 리플리에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꺼낸 후,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시간에 목표물을 전부 공략하는 데에 성공했다.
리플리는 어이없다는 듯 나와 인증패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도재현, 꼭 너다운 결과네.”
“나다운 결과가 뭔데?”
“흥. 너만 모르고 다 알 걸? 너랑 계약한 지 한 달도 안 된 나도 아는데.”
대충 느낌은 알 것 같다.
아마 맡은 일에 대해선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버리는 걸 말하는 거겠지.
그건 어쩔 수 없는 내 성격상의 특징이다.
[룬 사냥꾼]을 비롯한 여러 룬들을 통해 워낙 단기간에 강해지다 보니, 문제가 생겼을 땐 그 무력을 활용해 재빨리 해결하려는 습성이 언제부턴가 내게 생겼었다.
처음엔 <빌런> 클랜 혹은 루덴아크 학파의 계획을 분쇄하려는 것에서 시작했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런 일종의 의뢰에도 그런 습성이 발휘되곤 했다.
“근데 리플리, 내가 벨테인을 떠나면 그 중립지역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내가 9개 중립지역의 소유자가 됐지만, 나는 어쨌든 <벨테인>을 떠나야 하는 외부인이다.
다른 하수인이나 거주민들의 ‘도전’이 들어온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물었다.
그러나 리플리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말했잖아. 집착할 생각 없다고. 그냥 그대로 둘 거야.”
“…그럼 이거 진짜 다른 귀족들 엿 먹이려고 시작한 거야?”
“너, 죽을래?”
“미안.”
리플리가 ‘너’라고 부르면 괜히 경건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내 질문에 답은 해줬다.
“벨테인에도 균형이라는 게 있어. 귀족들이 섣불리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건, 다 나름의 이해관계와 힘의 균형이 얽혀 있기 때문이야.”
리플리가 머리를 살짝 넘기며 말을 이었다.
“난 테르멘 전사들이 뱀파이어들의 사회에서 그 균형을 깨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야. 라큘리제 백작과 휘하 귀족들은 그걸 부추겼기에 경고를 한 거고.”
“아하….”
“이제 중립지역은 말 그대로 중립지역으로 돌아가겠지. 그 후에 어떤 거주민이나 하수인들이 이를 차지하는 건, 더 이상 내가 관여할 영역이 아니야.”
그걸 들으며, 난 왠지 모르게 리플리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게 고귀한 뱀파이어의 품격이라는 건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곤 있지만, 그녀의 말투와 몸짓에선 은은한 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멋있네.”
그래서 솔직한 감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리플리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게 보였다.
“뭐, 뭐라는 거야.”
“아니, 그냥. 느낀 점을 말한 거야.”
“흥! 아무튼 벨테인에서 부탁할 일은 이걸로 끝이야.”
“어… 그럼 우리 계약도 끝나는 건가?”
리플리는 분명 규격 외의 존재다.
아직 내 룬 레벨과 통솔로는 제어할 수 없는 수준의 계약자.
그 때문에 우리가 맺은 계약 또한 그녀의 의지에 따른 한시적인 계약이었다.
그리고 이젠 그녀가 원했던 조건과 내가 부탁했던 부분이 서로 만족스러운 결과로 끝이 났다.
계약이 종료됐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였다.
“무슨 소리야, 그게?”
하지만 리플리는 평소처럼 팔짱을 낀 채 날 빤히 바라봤다.
네 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의지가 눈빛에 묻어나왔다.
“네 심장을 바치기로 한 거 잊었어? 그 심장이 파멸에 이르기 전까진 넌 못 벗어나.”
-계약하려면 심장을 바쳐야 한다.
리플리가 나와 계약을 맺을 때 처음 했던 말.
무시무시한 의미가 담긴 조건이었지만, [명경지수] 룬의 사기적인 정화 작용으로 없는 일이 돼버렸다.
덕분에 난 리플리와의 계약은 계약대로 챙기고, 페널티는 전혀 얻지 않았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 페널티에 대해 굳건히 믿고 있는 리플리.
‘…이젠 말해줘야겠네.’
나는 진실을 말해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그녀가 모르는 채로 계약을 이어가도 좋겠지만, 그녀와 지낸 짧은 시간 동안 정이라도 든 걸까.
서로를 속인 채로 무의미한 계약을 이어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먹고 입을 열던 찰나엿다.
“리플리, 그거 말인데…”
“몰라. 아무튼 계약은 유지 상태야.”
문득 리플리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한 듯한 태도.
그 칼 같은 모습을 보고서야 난 비로소 깨달았다.
‘…알고 있었구나?’
그녀는 이미 [스며드는 씨앗] 효과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와 함께 지낸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 내 힘과 능력에 대해 이해도가 깊은 계약자였다.
내가 저주 계열에 관해선 극도로 뛰어난 상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도, 그동안 어떤 상태 이상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도 모두 파악하고 있었을 거다.
그렇다면 자신의 ‘씨앗’도 먹히지 않았다는 걸 예측했겠지.
사실상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헛웃음을 흘렸다.
“참, 뭐랄까….”
모든 게 끝난 지금.
그녀는 여전히 계약을 이어가고 싶다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다.
예전엔 그저 틱틱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게 그녀만의 서투른 표현 방법이란 걸 안다.
그래서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리플리, 너다운 결과네.”
“죽을래? 왜 따라해. 나다운 결과가 뭔데?”
“글쎄, 너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알걸? 아니, 나만 아는 건가? 아무튼….”
그녀에게 가볍게 오른손을 내민다.
씨앗이 어떻게 됐고, 그 과정이 어떻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건-.
“앞으로도 잘 부탁해, 리플리.”
<벨테인>의 고귀한 뱀파이어 백작, 리플리.
그녀가 여전히 내 소중한 계약자 중 한 명이라는 것.
이건 우릴 엮고 있는 시스템조차 인정하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흥. 뻔한 말을 왜 자꾸 해?”
리플리가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손을 맞잡는다.
…틱틱대면서도 할 건 하는 그녀였다.
* * *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왜애-.”
“나 던전 가고 이틀 만에 돌아왔는데?!”
“몰라! 늦었어.”
한국에 돌아왔을 땐 김채은이 가장 먼저 날 반겼다.
…바로 옆집에 살고 있으니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는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고 날 타박했다.
특히 “네 열렬한 추종자들을 떼어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라는 말을 꺼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한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산적해 있는 많은 일들부터 처리했다.
가장 먼저 클랜의 일.
<이블 헌터>가 신생 클랜인 만큼 하루가 멀다 하고 처리할 일들이 쌓이는데, 그 중요한 시간들을 개인 일정으로 비웠으니 운영에 애로사항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를 뵙습니다.”
“아, 혜영씨. 오랜만이에요.”
“예. 정말 어떻게 생기셨는지조차 까먹을 지경입니다.”
“…말에 뼈가 너무 들어간 것 같은데, 제 착각이죠?”
“착각이길 바라시나요?”
“…죄송합니다.”
비서팀장 임혜영의 차가운 눈빛에 나는 일단 고개를 숙였다.
클랜 마스터씩이나 되는 사람이 무려 2주 가까이 클랜을 비웠다.
그나마 그중 사나흘 정도는 미국 공식 일정을 처리하면서 비워 망정이지, 2주를 통째로 여행간답시고 비웠으면 정말 대역죄인이 될 뻔했다.
“괜찮습니다. 지금부터 계속 결재를 해주시면 됩니다.”
“결제요? 아, 그래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해요. 안 그래도 제가 이번에 클랜 법인 카드를 만들었….”
“결제가 아니라 결재입니다.”
턱-.
임혜영이 가볍게 내 말을 자르며,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내밀었다.
대리인 없이.
오직 클랜 마스터의 직접 인가만이 필요한 내용의 서류들.
“…아.”
그걸 보고 난 현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비서팀장이 클랜 마스터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체벌.
나는 돌아오자마자, 서류 지옥에 빠졌다.
* * *
“끄어억… 나 죽네.”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며칠 동안 거의 밤을 새며 클랜 일을 처리했더니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역시 사람은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면 안 된다.
내일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라면서 미뤄봤자, 결국 오늘 내가 지나면 내일의 나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못 본 새에 엄살이 심해졌구나.”
그런 나를 다그치는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울 홀더 아카데미 재단 이사, 탁원호 교수였다.
지금 있는 곳은 탁원호 교수의 개인 교수실.
휴가 동안 산적해 있던 문제들 중 두 번째, 아카데미에 관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스승님을 찾아온 상태였다.
“스승님. 엄살이 아닙니다. 저 진짜 죽을 뻔했어요. 과로사로.”
“그게 리더의 무게다.”
“…이 상황에 저한테 그렇게 멋있는 말 하셔도 안 먹힙니다.”
아카데미 내에서도 딱딱하고 원칙주의자로 소문난 탁원호 교수.
하지만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렇게 농담 섞인 말도 자주 건네곤 했다.
그만큼 나와 스승님 사이의 친분이 두텁다.
그와 함께한 세월도 어느새 1년 반이 다 돼가니, 세월이 참 빠르게 흘러간다는 게 느껴졌다.
“엄살 그만 피우고 이것부터 읽어보거라.”
스승님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그리고 거기엔….
<도재현 보상안 - 특별 학생 조교 및 조기졸업 계획>
“네가 맡는 의뢰마다 전부 최상급 결과물을 내놓는 탓에, 재단 이사회에서도 그 보상 문제로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뭘 해줘도 마땅치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 와중에 나온 임시 계획이다.”
…아카데미에서의 내 일정 문제를 해결해줄, 파격적인 제안이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