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2)
“절 대학원생으로 써먹겠단 말씀이십니까?!”
과장된 몸짓으로 순간 목소리를 높이는 내 모습에 탁원호 교수가 조용히 날 봤다.
“이젠 스승 상대로 장난도 치는구나.”
“…죄송합니다.”
“재밌었다.”
“전혀 재미없으셨던 것 같은데…?”
“일 얘기를 하지.”
탁원호 교수는 내게 다가와 말을 꺼냈다.
“처음엔 출석을 전부 인정하고, 바로 조기졸업을 시킬까도 생각했었다. 학생 차별로 논란이 되긴 하겠지만, 어쨌든 아카데미와 너에게 모두 이득이 되는 방향이니. 아니, 아카데미 입장에선 네가 계속 재학생으로 남아주길 바라니 오히려 너에게 큰 이득이 되는 방법이지.”
살짝 숨을 돌린 탁원호 교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을 차용하면 아카데미의 교육관과는 너무 벗어날 것 같더군. 재단 이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교수로서, 학생이 무언갈 얻어가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특별 학생 조교. 사실 이름은 그냥 직책이 필요해 그렇게 지은 것뿐이다.”
문득 탁원호 교수가 서류를 건넸다.
그 안엔 <특별 학생 조교>의 본격적인 계획이 적혀있었다.
“일단 이 직책을 맡는 순간부터, 앞으로 너의 모든 수업 출석이 인정될 거다. 수업을 듣든, 안 듣든 말이지.”
“…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하다. 재단 이사회도 합의한 내용이고, 아카데미 내 모든 교수들의 동의 또한 받아냈다. 네 인기가 상당하더군.”
“…….”
그 모순적인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나와 친분이 있는 교수라곤 스승님인 탁원호 교수와 김명현 교수, 그리고 강동욱 교수밖에 없는데….
아마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쌓인 내 명성에 인기가 뒤따라온 것 같았다.
탁원호 교수는 계획서를 다음 장으로 넘기며 말했다.
“대신, 학기 당 최소 30시간씩은 특별 학생 조교로서의 업무 시간을 채워야 한다.”
“조교 업무를 하는 건가요?”
“아니. 아까도 말했지 않나, 이름만 붙인 거라고. 이 30시간은 도재현, 네가 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활용해 채우면 된다.”
계획서엔 30시간을 채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써 있었다.
많다.
뭔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시간을 채우는 게 너무 쉽다는 거다.
“이미 출석이 인정된 강의를 듣는 걸로 시간을 채워도 되고, 명칭 그대로 조교 일을 하면서 채워도 된다. 아마 김명현 교수는 네게 수업을 시키겠지. 그리고 원한다면 특별 대련 시간을 요청해 채워도 된다. 바쁘긴 하지만, 내 기꺼이 제자를 위해 시간을 내주마.”
“…….”
“그리고 이 30시간을 이번 학기와 다음 학기까지 채우면, 3학년 1학기를 끝으로 조기졸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아카데미 가이드 라인에서 가장 합리적인 기간으로 결정됐다.”
너무 좋은 조건들이 연달아 쏟아졌다.
학생 조교의 업무도 그렇고, 조기졸업 조건도 그랬다.
결국 요약하자면…
‘아카데미는 네 맘대로 다녀라-!’라는 거다.
계획서와 탁원호 교수를 멍하니 번갈아 보던 내가 물었다.
“…이거, 저한테만 너무 유리한 거 아닌가요?”
아무리 봐도 내게 너무 유리한 조건이었다.
특별 학생 ‘조교’라는 말에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하지만 스승님은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탁원호 교수와 알게 된 지 벌써 1년하고도 반.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너무도 인자한 미소였다.
“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 * *
아카데미에서의 향후 일정은 가볍게 처리가 끝났다.
스승님께서 ‘계획’이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사실 이미 준비가 다 마쳐져 있고 내가 결정만 하면 되는 상황.
당연히 실행은 빠를 수밖에 없었다.
가장 급했던 일을 마무리한 후.
여유가 생긴 나는 한국 홀더 협회를 찾아갔다.
사실 아카데미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이번 건이었다.
“홀더님! 어쩐 일이세요?”
협회에선 이지혜가 놀란 얼굴로 날 반겼다.
그녀는 1년 만에 고속승진을 이루며 협회 내 고위 직원이 돼 있었지만, 내가 방문한다고 할 때면 항상 이렇게 날 마중 나오곤 했다.
자신이 잘된 게 전적으로 나 덕분이라면서-.
그냥 잘될 사람이 더 일찍 잘됐을 뿐인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몇 번을 만류해도, 그녀는 한사코 괜찮다며 날 보조하곤 했다.
“협회장님을 뵈러 왔어요.”
다만 오늘은 정말 이지혜에겐 볼 일이 없었다.
한국 홀더 협회의 협회장.
그리고 <이탈자의 방> 공략 총 연합군을 통솔 중인 연합장.
권영훈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연락도 없이요?”
“당연히 미리 연락드렸죠. 일정 조율하고 온 거예요.”
“앗! 저한텐 말도 안 하시고.”
“지혜 씨 바쁠까 봐 그랬죠. 이제 제 보조는 그만하셔도 된다니까요.”
“그래도요.”
살짝 삐진 얼굴로 서운함을 토로하는 이지혜.
하지만 이내 금세 웃음을 되찾으며 날 안내했다.
“홀더님 S급 승급하신 이후로, 협회는 그동안 거의 축제 분위기였어요.”
“그래요?”
“네! 유은설 홀더님 이후로 무려 7년 만의 S급 홀더니까요. S급이 많아질수록 국제 홀더 계에서 한국과 저희 협회의 위상이 올라가거든요. 재현 홀더님 덕에 저희가 어깨 피고 다니게 된 거죠.”
치켜세워주는 이지혜의 말에 살짝 민망해진다.
“뭘 또 그렇게까지. 너무 안 띄워주셔도 돼요.”
“진짜예요- 그리고 협회에서 맡겨야 할 특별 의뢰 같은 것도, S급 정도의 초고위 홀더들이 많으면 훨씬 편해지니까요.”
S급 홀더는 개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관리가 들어가는 초대형 인재이기도 하다.
특히 홀더 계에선 S급 홀더의 수가 그 나라 국력을 가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위상은 엄청났다.
이지혜가 지금 꺼내는 말들이 결코 과장이 아니란 뜻.
이는 내가 S급 홀더로 승급한 후, 국내 반응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아, 참. 협회에 홀더님 개인 휴게실 생긴 거 아세요?”
“…제 휴게실 얘기를 제가 처음 듣네요?”
“아하하. 이번에 S급 홀더 혜택으로 신규 설정된 내용이거든요. 다른 S급 홀더님들 휴게실도 다 이제 생겼어요. 이번 주 내로 연락 돌릴 예정이었는데, 제가 먼저 알려드리게 됐네요?”
S급 홀더가 되고 난 후의 혜택은 상당히 많았다.
그 첫 번째가 장비 대여.
S급 홀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등급을 보유한 홀더들이다.
당연히 고급 장비들 또한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들.
그 논지에 따라, S급 홀더가 되면 홀더 협회에서 보관 중인 장비 중 최고 등급의 장비들을 대여할 수 있다.
물론 전설급을 넘어가는 장비들은 어느 정도의 조건과 계약을 맺어야 가능하지만, 어지간한 에픽급 장비들은 간단할 절차만 밟고서도 빌릴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수수료.
협회와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수료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때문에 괴수를 사냥하고 나온 부산물이나 마력석을 거래할 때, 전과는 달리 정가만큼의 수익을 모두 가져갈 수 있었다.
이제 와선 큰 의미가 없어진 혜택이지만, 이런 것도 은근 쌓이다 보면 거액의 차익이 된다.
그 외에도 워프 게이트 무료, 협회 공인 연무장 무료, 일일 던전 대여권 등 크고 작은 혜택들이 무수히 쌓여있었다.
얼마나 활용을 할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있어서 나쁠 건 없었다.
아마 이지혜가 말한 ‘협회 내 S급 전용 휴게실’이라는 것도 그런 차원의 복지겠지.
역시 홀더가 잘 나가면 가만히 있어도 떡이 떨어지곤 했다.
“앗. 다 왔네요.”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협회장실에 도착해 있었다.
앞에선 비서로 보이는 여성이 날 안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 또 봬요, 홀더님!”
“네. 지혜 씨도 일 보세요. 다음엔 제가 먼저 연락드릴게요.”
“칫. 꼭이에요!”
“하하, 네.”
그렇게 이지혜와 가볍게 인사를 마친 후.
나는 비서의 안내에 따라 협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선 홀더 협회장 권영훈이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 도재현 홀더.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협회장님.”
우리는 가볍게 악수를 주고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미리 독대를 요청했었기에, 비서가 나간 협회장실엔 권영훈과 나 둘만이 남아있었다.
“늦었지만 자유의 날개와 우호 클랜 협정을 맺으신 거, 축하드립니다. 한국 클랜 계의 역사를 새로 쓸 협정을 맺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어요.”
“하하. 그 정도 대형 협정을 맺고도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는 건, 아마 도재현 홀더밖에 없을 겁니다.”
…진짠데.
처음 헨드릭스가 내게 호감을 보인 것도, 우호 협정을 위해 미국으로 초청한 것도 전부 내 의도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나도 그게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구태여 이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협회장님을 찾은 건 앞으로의 공략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의 공략 일정이라 하시면….”
내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자, 권영훈이 눈을 가늘게 뜬다.
그에 미리 준비해 온 서류들을 탁자에 꺼내며 펼쳐놓았다.
뉴욕에서 캐롤라인 남작을 추궁하며 얻어낸 정보들.
그리고 <벨테인>을 공략하며 알아낸 정보들.
그 모든 것들이 깔끔하게 정리된 보고서들이었다.
“제7구역, 슬슬 공략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탈자의 방>, 제7구역.
장기전이 되며 차일피일 미뤄진 구역의 공략.
그 바톤을 이제 이어받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