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전투 (4)
신은 강림이 되는 순간 가장 약하다.
그 자세한 원리에 대해선 이해하지 못했지만, 들은 바로는 대리자와 해당 신 간의 연결 과정이 초반엔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초월자들이 말해준 그 조언으로부터 한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럼 진짜 신이 아니라는 거네.’
반드시 대리자의 신체를 통해서 강림해야만 올 수 있는 존재라면, 그건 해당 신의 본체가 아닐 확률이 높다.
아마 분신이거나, 의념이 형상화한 것이겠지.
애초에 신 정도 되는 존재가 현계에 도달하는데, 이를 관장하는 시스템이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을 리 없었다.
지금껏 홀더 시스템에 괜히 균형이 맞춰져 있던 게 아니다.
그리고 내가 상대해야 할 존재가 ‘진짜 신’이 아니라면… 한 가지 사실이 더 확실해진다.
‘이길 수 있다.’
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어쨌든 이길 수 있는 상대다.
신의 힘을 마음껏 다루며 감당하기 힘든 공격만을 쏘아내는 게 아니라면, 내가 지닌 전력을 쏟아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강림’ 또한 신성 계열 룬에 담긴 하나의 능력일 뿐이었다.
‘티르본드, 가자.’
-알겠다, 주인.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직접 전투한다.
나는 [단죄의 벼락]으로 루미엘에게 강렬한 타격을 입힌 후, 그대로 티르본드를 움직여 땅으로 쇄도했다.
가장 약한 순간에 효과적인 타격을 주긴 했지만 그걸로 끝은 아닐 거다.
아무리 강림으로 약화되고 선제 공격을 당했어도, 신은 신.
악신 루미엘을 상대하려면 모든 능력을 쏟아내 공격해야 했다.
‘액셀 피어싱.’
손에 든 [와이번 스피어]로 내 첫 번째 주력 공격을 터뜨린다.
돌격류 룬의 추진력을 이용해 마치 공간을 찢듯 강렬한 타격을 입히는 스킬.
비록 신성력은 담기지 않았지만, 적중하기만 한다면 충분한 효과를 내줄 공격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악신 루미엘은 내게 반격할 준비가 돼 있었다.
“빌, 어먹으으을…!!”
기괴하고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안엔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혼재해 있었고, 학파장 플린클로인지 악신 루미엘인지 모를 목소리가 섞여있었다.
몸은 악신에게 내줬지만, 정신은 플린클로의 영향이 남아있는 듯한 모습이다.
게다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내게 공격하려는 모습을 보니, 아까의 [단죄의 벼락]이 확실히 효과가 있던 모양이다.
사아아아-!!
루미엘이 거대한 양의 어둠을 끌어와 내게 조준한다.
그 형태와 색채는 매우 익숙했다.
[어둠의 서약]을 맺은 이들을 상대할 때면 항상 마주했던 ‘검은 마력’.
황성연조차 사용했던 그 지긋지긋한 능력이 루미엘에게서도 펼쳐지고 있었다.
‘색깔이… 진해.’
그런데 그 순도가 매우 깊다.
평범한 검은 마력이 아닌,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강렬한 어둠의 마력.
당연한 이야기다.
악신 루미엘은, 그 검은 마력의 주인일 테니까.
그동안 봐왔던 모든 ‘검은 마력’이, 전부 저 악신으로부터 파생된 능력일 테니까.
‘티르본드, 멈춰.’
-액셀 피어싱을 안 하는 건가, 주인?
‘응. 지금 상황에선 필요 없어졌어. 그리고 긴급탈출 좀 써줄래? 지금 널 해제할 여력이 안 된다.’
-알겠다, 주인.
곧바로 티르본드의 돌격을 멈추고, 시전 중이던 [액셀 피어싱]을 취소한다.
사실 [액셀 피어싱]을 활용하려던 의도는 하나였다.
강림 초반 상대가 약한 틈을 타 먹였던 공격에, 연타로 강력한 공격을 먹이기 위해.
하지만 루미엘이 생각보다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이미 신성력이 담긴 ‘검은 마력’을 꺼내든 시점에서, [액셀 피어싱] 같은 스킬은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디바인 블레스.’
버프 스킬 중 [광폭화]와 [용인화]는 이미 사용한 지 오래.
신성력 버프인 [디바인 블레스]까지 사용해 능력치를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이어 활용하는 무구교체술-.
손에는 성검, [켈빌리드의 진정한 회개]가 들려있었다.
“거룩한 자비.”
땅에 성검을 꽂아 성스러운 보호 구역을 만들어낸다.
성검의 내재스킬 [거룩한 자비]는 기본적으로 팀원들에게 버프를 주는 스킬이지만, 그 효과가 워낙 뛰어난 탓에 개인의 일대일 전투에도 큰 버프를 주는 능력.
즉, 지금의 나는 나 스스로를 보조하기 위해 이 스킬을 썼다.
“죽음으로!”
그런 내 모습을 보던 루미엘이 거칠게 소리쳤다.
죽음으로.
꽤 익숙한 구호다.
지금껏 내가 상대했던 루덴아크 학파 일원들은 하나같이 저 구호를 사용했고, 그 후엔 ‘검은 마력’의 운용이 더욱 매끄럽게 이어졌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난 후.
초월자들과의 담론을 통해, 나는 그 의미를 정확히 깨우칠 수 있었다.
‘신성력을 더 깊이 있게 다루는 구호였어.’
루덴아크 학파의 일원들이 모두 똑같이 저 구호만 사용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모두 동일한 악신, 혹은 비슷한 부류의 마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미엘은 아마 죽음을 다루는 악신.
그 때문에 루덴아크 학파는 그간 죽음과 관련된 능력들을 자주 사용해왔다.
사령 제작과 언데드 활용에 조예가 깊었고, 비슷한 형태의 저주들도 능숙하게 다뤘었다.
그렇기에 검은 마력을 더 깊게 다루는 구호.
저 “죽음으로”라는 말 역시, 당연히 루미엘이 원조였다.
사아아아-!!
쿠과과과-!!
어마어마한 양의 검은 마력이 날 덮치려든다.
이미 티르본드까지 돌려보낸 나는 바닥에 홀로 서 있었고, 이대로라면 검은 마력에 뒤덮여 영원한 죽음 속으로 끌려갈 것 같았다.
“자비롭게.”
…내가, 루미엘과 똑같은 방식으로 신성력을 사용하기 전까진 말이다.
“뭐, 뭐?!”
내 구호를 들은 루미엘이 크게 당황한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내 몸에서 거대한 양의 신성력이 뻗쳐나간다.
이건 뭐랄까-
‘녹색 마력’이라고 지칭해야 할까?
어쨌든 자비의 신 세드닐렌의 성향을 품고 뿜어져나온 신성력은 검은 마력을 잡아먹으며 공격을 상쇄시켰다.
‘잘 되네.’
나는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궁극스킬의 언령과는 다른 개념이다.
온전히 룬의 힘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보조 구호.
[세드닐렌의 견습 대리자] 룬과 [광기의 신앙심] 룬이 일정 레벨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게 됐다.
그래봐야 기존에 다루던 신성력을 더 깊이 있고 강렬하게 사용하는 것뿐이지만, 애초에 악신 루미엘 휘하의 신도들이 사용하던 검은 마력도 그런 종류였다.
“네놈이 어떻게 세드닐렌의 힘을….”
“그야, 세드닐렌의 대리자니까.”
당황하며 말을 더듬는 루미엘에게 친절한 답변을 건네준다.
대리자 플린클로의 몸을 빌려 강림한 루미엘처럼, 나 역시 세드닐렌의 힘을 잠시 빌려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 위력이 상상 이상으로 엄청날 뿐.
“쇄도하라.”
틈을 만들기 위한 말다툼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미리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던 나는, 루미엘에게 답하자마자 곧바로 [왜곡의 그림자]를 사용했다.
파앗-!
스스슷-!!
예전부터 강자들을 상대해오며 깨달은 하나의 전투 법칙이 있다.
그건 바로, 궁극스킬을 아끼지 말라는 것.
궁극스킬을 마지막까지 아껴두고, 최후의 일격으로 사용하면 분명 효과는 극대화된다.
상황만 갖춰진다면, 가장 확실하게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이다.
‘…상황만 갖춰진다면 말이지.’
문제는 전투에선 그런 이상적인 구도가 잘 안 나온다는 것이다.
강자들끼리의 전투에선 서로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그런 만큼 각자의 필살기도 언제 어떤 때에 나올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궁극스킬은 사용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최대한 빨리 사용해 변수를 만들어내는 게 좋다.
적들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궁극스킬에 당황할 거고, 그 사이에 생긴 조금의 틈에서 나는 공격을 이어간다.
내가 보유한 최고의 스킬 중 하나인 [왜곡의 그림자]를 망설임없이 사용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죽음으로! 더 깊은 죽음으로!”
“자비롭게.”
루미엘의 검은 마력은 가볍게 세드닐렌의 신성력으로 받아쳐준다.
그리고.
성검이 무참히 루미엘의 어깨를 가른다.
“크흡…!!”
고통 섞인 비명을 내지르는 루미엘.
나는 여기서 곧바로 필살기를 이어가려 했다.
궁극스킬 [자비로운 참마검].
내가 지닌 신성 계열 스킬 중 가장 강한 위력의 스킬이다.
아마 이 스킬까지 연계로 먹일 수 있다면, 이대로 전투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된다.
그렇기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언령을 읊으려 했다.
“위대한 자비-”
“죽음을 삼켜 회개하라!!”
하지만 루미엘의 반응이 더 빨랐다.
그는 연이은 내 공격에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이를 악물고 자신의 궁극스킬을 펼쳐냈다.
강림한 악신이 사용하는 궁극스킬.
아마 신화룬에 등록된 스킬일 거고, 그 위력은 엄청날 거다.
‘…위험해.’
나는 계획이 틀어졌음을 직감하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지금부터는 전세가 역전된다.
나 역시 얼마든 위기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팟- 파아앗-.
‘…어?’
하지만 적 궁극스킬의 발현과 동시에, 내 갑옷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신성력.
[응집된 악의 결정체를 감지합니다! 갑옷 안에 새겨진 트릴리온의 찬란한 맹세가 악을 처단코자 깨어납니다. ‘신성한 가호’ 효과가 발동합니다.]
[착용자의 보유 신성 수치는 105(+84). 해당 수치에 비례한 ‘신성한 가호’가…]
[‘은빛 달그림자’ 룬의 특수효과로, 장비의 신성 감응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립니다. 가호의 위력이 40% 증가합니다!]
[‘신성한 가호’가 악신 루미엘의 ‘메멘토 모리’를 완전히 파훼합니다! 루미엘의 어두운 신성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
“빌어먹으을!! 도대체 네놈은 정체가 뭐냔 말이다!!”
악신조차 울분에 겨워 소리치는 상황.
나는 그에 차마 ‘템빨’이라고 답해줄 수가 없었다.
대신.
성검을 휘두름으로써 답을 줬다.
“위대한 자비에 잠들라.”
처음 전투가 시작될 때부터 말했지만…
나는 어둠속성과 악에 대해서라면 극한의 상성을 지닌다.
루덴아크 학파가 ‘악신 루미엘’을 강림시킨 건, 어쩌면 이번 마지막 전투의 최대 실수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