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2)
<이탈자의 방> 공략이 끝이 난 후.
대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혼란스러웠던 한국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국내 홀더 계 역시 이전의 나름 평화롭고 체계적이던 시스템으로 돌아왔다.
홀더들은 다시 던전과 필드로 사냥을 떠나기 시작했고, 각 클랜들은 이전처럼 굵직한 작전이나 미발견 던전 탐색 등을 이어가며 자신들만의 이익을 쫓았다.
그러나 <이탈자의 방> 공략 성과를 아직도 정리 중인 클랜도 있었다.
<이블 헌터> 클랜.
당시 공략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기록하고,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은… 공략이 끝나자마자 국제 홀더 계에 명성을 알리며 세계적인 클랜으로 발돋움을 시작했다.
-비상하는 <이블 헌터>의 날갯짓! 창설 3개월 만에 국내 최고 반열 오른다!
-용병 클랜으로 합류했던 <블루 아쳐>, <이블 헌터>와의 합병 확정!
-전 <블루 아쳐>마스터, “클랜원들 모두 동의한 내용…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 첫 번째 발걸음은 클랜 합병.
연합군 당시 산하 용병 클랜으로 합류했던 <블루 아쳐>를 흡수하며, 그동안 클랜 내에 부족했던 궁수 계열 홀더들과 보조 홀더들을 대거 영입했다.
추가로 <타이탄스> 클랜과의 합병 논의도 이어지고 있어, 전사 계열 홀더들까지 충원이 될 수 있는 상황.
만약 이 합병이 모두 성사된다면, 다른 대형 클랜의 규모에 밀리지 않는 클랜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 … … 제가 이블 헌터에 들어가고 싶은 이유는, 클랜 마스터인 도재현 홀더님을 오랫동안 존경해왔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클랜에 가입해서, 도재현 홀더님과 다양한 던전들을 공략해가고 싶습니다!”
신규 클랜원 영입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블 헌터>는 창설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공식 채용보단 상시 특별 채용을 선호하는 편인데, 이번 공략을 통해 워낙 명성이 높아지다 보니 온갖 무소속 홀더들이 전부 가입 신청을 해왔다.
국내에서 한 가닥 한다는 무소속 홀더들부터 시작해, 미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는 유명 홀더들, 소속 클랜을 탈퇴하고 새로 <이블 헌터>에 지원하는 홀더들.
심지어는 아직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은 학생 홀더들까지….
초창기 <이블 헌터>가 학생 클랜으로 시작했다는 특수성과 국내 최고 반열에 다다른 명성이 더해져, 별의별 홀더들이 마구잡이로 가입 신청을 했다.
덕분에 인사팀장과 함께 최종 면접을 담당한 부마스터, 유은설은 요즘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양수진 홀더.”
“예!”
“우리 클랜 마스터를 오랫동안 존경해왔다고 했는데, 마스터는 프로 홀더로 활동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어요.”
“아, 맞다.”
“…아, 맞다?”
“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도재현 홀더님과 함께 클랜을 이끌어가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꼭 한 번이라도 얼굴을 뵐 수 있다면….”
“…….”
면접을 보러 오는 무소속 홀더들 중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다.
도재현이 국내 최고의 홀더(이에 대해서 아직 이견이 있긴 하지만)로 떠오르고, <이블 헌터> 역시 신흥 대형 클랜으로 이름을 알리면서… 그 인기에 편승하고자 가입 지원을 하는 홀더들이 많았다.
특히 방금처럼 “도재현과 꼭 함께 하고싶다!”고 말하며 면접을 보는 여성 홀더들이 대다수.
유은설은 그런 그녀들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다른 의도는 아니고, 그냥 클랜 가입을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진짜였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이블 헌터에 지원한 A급 홀더 나혜린입니다!”
물론, 쭉정이 지원자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탈자의 방> 공략에 참여했던 용병 홀더이자, 무소속 홀더 계의 최고 자원인 나혜린 등의 실력자들도 영입되곤 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블 헌터>가, 강한 클랜이 되어간다는 것.
“재현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네요.”
유은설은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제자를 떠올렸다.
도재현.
수많은 편견에 맞서며 그가 직접 설립했던 이 클랜은, 어느새 국내 최고라는 이름을 향해 성큼성큼 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초창기 그들을 향해 쏟아졌든 물음표는…
이제 모두가 확신하는 느낌표가 되어가고 있었다.
* * *
아카데미에 드디어 종강이 찾아왔다.
사실 <초월자의 방>부터 시작해 <이탈자의 방>에 이르기까지.
대형 던전과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방학과 학기를 통째로 날려버리긴 했다.
그래서 이번 2학년 1학기는 사실상 제대로 출석을 한 날이 없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 홀더들 대부분이 말이다.
그럼에도 탁원호 교수를 비롯해, 아카데미 재단 내부에선 깔끔한 일 처리를 보여줬다.
국내 홀더 계에 닥친 특수성을 고려해 결석 학생들의 출석을 대부분 인정해줬고, 장학금 등의 보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학생들 사이의 차별을 최대한 줄였다.
덕분에 모든 교수와 학생들이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평온하게 학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밥 먹고 싶어.”
팔짱을 끼며 함께 걸어가던 강주연이 문득 말을 꺼낸다.
“지금? 나가서 뭐라도 먹을까? 근데 가은이 금방 온댔는데.”
“아니. 재현이 네가 차려준 음식.”
“어?”
살짝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가만히 말을 이었다.
“…재현이가 만들어준 스테이크 먹고 싶어요.”
“뭐? 하하.”
연애한 시간이 오래돼도 성격은 쉽게 안 변하는 걸까?
강주연은 이런 말을 꺼낼 때면, 늘 익숙하지 않은 듯 부끄러움을 타곤 했다.
지금도 고개를 숙여서 보이진 않지만 아마 얼굴이 빨개져 있을 거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은 같이 약속도 있고 하니까 늦었고, 다음에 만들어줄게, 모레 어때?”
“…좋아요.”
“하하. 그 반존대는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야? 채은이?”
“…….”
말이 없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다.
역시 김채은.
연인동맹의 리더답게, 내가 좋아하는 티를 냈던 요소들은 모두 동료들에게 전파를 한 모양이다.
어쨌든 그렇게 함께 길을 걷고 있으니, 약속시간에 맞춰 문가은이 나타났다.
오늘은 그녀가 이전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면서 우리에게 직접 커피를 대접해주겠다고 모인 날이었다.
김채은도 왔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아빠 김명현 교수와 선약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
저 멀리 나타난 문가은이 우릴 보고 손을 흔들었다.
“재현아! 주연아! 여기…”
그러나 반갑게 손을 흔들던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한다.
…아무래도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부끄러움을 타는 강주연을 목격한 것 같다.
문가은은 손을 내리자마자, 순식간에 달려오며 우릴 마주했다.
뭐야.
보법류 룬이라도 쓴 건가?
“이씨- 강주연! 너 또 재현이한테 뭐 해달라고 했어.”
“…내가 뭐.”
“너랑 나랑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날 속이려 해? 너 그렇게 부끄러운 얼굴 하고 있으면, 재현이한테 꼭 뭐 부탁하고 성공했을 때잖아! 무슨 부탁했어. 또 야한 부탁했지!”
“…아니거든.”
그리고 그새를 못 참고 또 투닥투닥 싸우는 두 사람.
누가 친구 아니랄까봐 만나기만 하면 서로에게 으르렁대는 그녀들이었다.
분명 초창기엔 가은이가 주연이 눈치도 보고 그랬던 것 같은데, 다 터놓고 지내는 요즘은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다.
“자자, 그만 싸우고 이제 가보자. 나 빨리 가은이가 직접 만든 커피 먹어보고 싶어.”
결국 또 중재자는 나였다.
내 목소리에 문가은이 바로 표정을 풀며 팔짱을 꼈다.
“흥- 강주연, 이따 봐. 우리 아직 얘기 안 끝났어.”
“…바보. 그래봤자 안 말해줄 건데.”
“이씨, 이게 진짜….”
…중재가 안 된 건가?
나는 허탈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비어있던 왼쪽 팔짱은, 당연히 문가은의 몫이었다.
* * *
“할 게 많다, 할 게 많아.”
복잡했던 일들이 모두 끝나고, 아카데미도 종강을 맞이했다.
내게 있어 가장 큰 과제였던 <이블 헌터> 클랜 역시, 이제는 궤도에 오르며 천천히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이젠 정말 모든 게 안정권에 접어든 상태.
하지만 그럼에도, 내 일은 아직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한 명의 학생 홀더가 아닌, 한 대형 클랜의 클랜 마스터이자 세 여자의 연인.
책임져야 할 홀더들이 늘어났고, 지켜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적어도 반년은 더 바쁘게 지내야 업무에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조금 과하긴 해도,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그렇게 과하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그래도… 할 건 또 하면서 일해야지.”
나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준비한 장비들을 꺼냈다.
성검이나 성갑 등의 내 주력 장비들이 아니다.
평범한 재료로 만들어진 가죽 갑옷과…
평범한 금속으로 제작된 철제 검.
한때 내가 F급 홀더였던 시절에 주로 사용했던 노멀 장비들이었다.
약간의 추억이 담긴 그 장비들을 보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왔냐.”
근처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나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장비들을 입고 나타난 내 친구.
박진우였다.
우리가 모인 곳은 <아카데미 연무장>.
박진우와 내가 처음으로 만나 대련을 했던 장소이자, 아카데미에서의 모든 일들이 시작됐던 장소였다.
그 추억이 담긴 곳에서, 나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박진우를 봤다.
“아무리 바빠도… 할 건 해야지?”
“오우, 당연한 말을.”
내 말에 박진우가 반갑다는 듯 답한다.
우리는 서로 바빠진 이후로도 아카데미가 종강할 때면 항상 모여 이렇게 대련을 하곤 했다.
마치 일종의 루틴과도 같은 일.
오늘은 왠지 모르게 감상에 젖어, 평소와 달리 장소를 <아카데미 연무장>으로 바꾸긴 했지만…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늘 해왔던 대로.
그저 서로의 검을 주고받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