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 같다.
“우우, 바아….”
품에 안겨 방긋 미소 짓는 아기를 보며, 에녹 루빈슈타인이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생후 2개월.
아기는 세상 빛을 본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저를 품에 안은 남자가 아버지임을 꼭 아는 것 같았다.
“뱌아아.”
은실 같은 머리칼과 청명하고 푸른 눈.
자신을 꼭 빼닮은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던 에녹은, 가슴을 울리는 생경한 느낌에 당황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이끌림이었다.
혈육을 향한 유대감, 그리고 어쩌면 애정이라고 해도 좋을….
‘왜?’
에녹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의 능력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종마처럼 만들어 낸 자식.
그래서 아무런 느낌도 없을 줄 알았다.
그저 나와 같은 피가 흐를 뿐인 작은 개체이며, 자라면 능력자로, 귀족으로, 또 군인으로서 제국의 개로 살게 될….
‘싫어.’
그는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아.’
결심한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기를 안은 채로 숨죽여 막사를 나섰다.
바깥은 소강상태의 전쟁터였다.
아직 잡히지 않은 불길이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 광경을 눈에 담자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너는… 안 돼.’
부모 둘 다 최상위 계급의 능력자이며 그중에서도 발군.
아이의 능력치는 검증할 필요도 없었다.
모국의 검으로, 방패로, 또는 지팡이로…. 삶의 반절 이상을 전쟁터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혹시 도망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뒷덜미를 느릿하게 잡아 세웠다. 숨을 삼킨 에녹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여자는 아이의 엄마였다.
“설마, 애를 데리고?”
그녀는 임신 중에 출정했고 전쟁 통에서 출산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다시 전열에 합류했다.
누군가는 임산부를 전장으로 내몬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능력자가 지는 의무란 슬프게도 그런 것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
“나처럼 키우고 싶지 않아.”
“내 애이기도 한데.”
여자가 조소했다.
다시 품 안의 아이를 바라보던 에녹의 고민은 짧았다.
“…같이 가자, 그럼.”
“하하하. 당신, 생각보다 충동적인 사람이었네.”
소리 내어 웃던 여자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는 능력자로, 귀족으로 태어났고, 살아왔고, 또 살아가다가… 죽어야 해. 이 애도 마찬가지고.”
“…….”
“뭐, 당신 맘은 이해해. 딸이라서 더 그렇겠지. 나도 생각이 많아지더라고.”
여자는 그대로 에녹을 스쳐 지나갔다.
“가.”
에녹은 놀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여자도 분명, 아이를 보며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다고….
“…제논으로 갈 생각이다. 거기 계속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탈영하는 군인이 행적을 알리는 꼴이었으나….
여자는 아이의 엄마였다. 그 정도의 알 권리는 있어야 했다.
“그래. 행운을 빌지.”
여자의 짧은 인사를 뒤로하고 에녹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날.
그렇게 제국 유일의 검성, 에녹 루빈슈타인은 사라졌다.
7년 전의 일이었다.
* * *
짹짹짹―.
낡은 오두막 창 너머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아침.
“우리 공주님, 아침입니다. 일어나세용.”
“우응…. 5분만 더.”
“안 돼, 안 돼. 얼른 치카치카하고 아침 먹어야지.”
이불을 휙 걷어내는 손길에 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었다.
앙증맞은 앵두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는 뒤집개를 든, 이 주부 9단의 이름은 제임스 브라운.
바로 울 아빠다.
“으으응, 배 안 고픈데.”
“아빠가 우리 공주 좋아하는 꼬꼬알 요리 엄청 맛있게 해놨지.”
아빠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나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다시 감고 아빠의 목에 매달려 냄새를 맡았다.
“킁킁. 꼬꼬알뿐이 아니라 물에 빠친 브로콜리 냄새두 나는데?”
“헉.”
아빠가 뜨끔했다.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아! 브로콜리 싫다구 했는데!”
“쉬, 우리 공주님, 리리스. 오늘 브로콜리 딱 두 개만 먹자. 그러면 디저트로 초콜릿 마카롱에 사과 잼 뿌려줄게.”
“하.”
유치하게 사과 잼 뿌린 초콜릿 마카롱으로 협상하려 하다니.
내가 고작 그딴 거에 넘어가 맛도 없는 브로콜리를 순순히 먹을 애로 보이나?
“알겠어. 그럼 딱 두 개만이야.”
…잘 봤다. 그런 애 맞다.
까짓 거 두 개밖에 안 되는걸.
“어이쿠, 누구 딸이 이렇게 착해?”
아빠는 큭큭 웃으면서 내 통실통실한 뺨에 쪽 뽀뽀했다.
주부 9단인 제임스 씨는 육아도 만렙이었다.
* * *
내 이름은 리리스 브라운.
올해로 일곱 살.
자라면서 천천히 전생을 기억하게 된, 조금은 특별한 비밀을 가진 어린아이다.
“아, 해보세요.”
“아아.”
치카치카.
“이번엔 이이.”
“이이이….”
혼자 할 수 있다는데도 굳이 내 양치를 도와주는 아빠의 얼굴을 보며 나는 쿡쿡 웃었다.
“왜 웃어?”
“아우고또 아이야.(아무것도 아니야.)”
전생 25년, 현생 7년을 합쳐 무려 32년 삶의 기억을 가진 나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아빠 제임스 씨(27세)는 날 애 취급하며 양치까지 시켜준다.
나는 사실 비밀을 숨긴 어린이인데….
“자아, 와글와글. 퉤에.”
“와글와글. 퉤.”
양칫물을 뱉자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준 아빠가 나를 또 번쩍 안아 들었다.
“저기여, 아조씨. 저도 다리 있거든여?”
“알지. 그렇지만 공주님은 원래 움직이는 거 아냐. 손가락만 까딱하면 하인들이 다 해주거든.”
“에휴우우, 아빠. 이케 오냐오냐 키워서 나 버릇 나빠지면 어쩔라 그래?”
주방으로 향하던 아빠가 멈칫하더니 파하하 웃었다.
“우리 리리스, 꼭 어른처럼 말하네.”
그야 어른이니까요.
전생의 기억은 내가 어느 정도 사고를 할 수 있었던 3살 무렵부터 차근차근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7살이 된 지금은 전생을 완벽히 기억해냈다.
더불어 이 세계가, 내가 전생에 읽었던 판타지 소설 속이라는 것도.
“자, 용감한 리리스 공주님! 오늘도 못된 악당, 브로콜리 백작을 해치워 주시지요!”
“에휴우.”
꼬꼬알 프라이와 소시지….
그 사이 수줍게 낀 삶은 브로콜리 두 개를 포크로 뒤적거리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은 천천히 떠올랐는데 그 전까지는 나도 평범한 아기들과 다름없었다.
전부 떠올린 지금도 일부러 상기하지 않으면 전생은 흐릿하게만 느껴질 뿐.
본능적으로 현생의 내게 이입하게 되고….
‘꼬꼬알 밑에 브로콜리 숨겨 버릴까.’
그래서 어른의 사고를 할 수 있게 됐다고 해도 여전히 브로콜리 싫어하는 애 입맛은 변함없었다.
“읏차, 오늘은 머리를 어떻게 해 줄까. 토끼? 아니면 공주님?”
내 뒤에 의자를 끌고 와서 앉은 아빠가 빗질하며 물었다.
토끼는 양 갈래고 공주님은 반 묶음이다.
“아빠, 내가 애야? 그냥 말 꼬리 머리 해조.”
멈칫한 아빠가 막 웃었다.
“우리 공주는 아직 아기지. 아빠 허리에도 안 닿잖아.”
“몸만 그렇거든?”
나는 또래보다 성장이 느린 편이었다. 감나무 집 막내아들인 5살 지미보다도 덩치가 작았다.
하지만 알맹이는 다 여물었다.
이제 완벽하게 어른의 사고를 할 줄 아니까.
‘흠, 그래도… 똑똑한 어린이가 되는 것도 좋지만, 어른들이 이상하게 느낄 정도면 안 되겠지?’
나는 적당히 혀도 꼬부려주고 토끼 머리도 하면서 비밀을 잘 숨기기로 마음먹은 다음 말했다.
“구냥 토끼 머리 하께.”
“토끼? 좋아쓰.”
아빠가 능숙한 손길로 내 머리를 묶었다.
“아고, 이쁘다. 누구 딸이 이렇게 이쁘대? 응?”
“으앙, 뽀뽀는 하지 마아아!”
옴짝달싹 못 하게 끌어안고 쪽쪽 입을 맞추는 아빠 때문에 볼이 꼭 찐빵처럼 눌리고 말았다.
“맞다, 공주님. 오늘 아빠 시장 갔다 와야 하니까 옆집 가서 놀고 있어. 수잔 아줌마한테 말해 둘게.”
“왜? 나두 같이 가면 안 돼?”
나는 아직 바닥에 닿지 않는 짧은 다리를 휙휙 구르며 물었다.
“당분간은 안 돼. 요즘 무서운 군인 아저씨들이 돌아다니거든.”
“칫.”
아빠가 말하는 무서운 군인 아저씨들이란, 제국 황실 소속의 정예군들이다.
제도에서 구만리는 떨어진 이 깡촌 영지까지 가끔 제국군이 내려오는 이유는 ‘능력자’를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그치만 나랑은 상관없잖아. 능력 개미 똥만큼도 없는데.”
“그래도 안 돼. 위험해.”
쓸데없는 걱정 하기는.
‘아빠, 아빠는 모르겠지만, 우린 멋진 주인공들만 열 일 하는 이 세계에서 이름 한 줄 안 나오는 엑스트라라구. ‘수많은 제국민’에서 그 ‘제국민’이고 ‘널린 비능력자들’에서 그 ‘비능력자’인!’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이 세계는 판타지 소설, <도스의 반란> 속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을 꼽아 보라면, 인간들이 ‘능력자’와 ‘비능력자’로 구분되는 세계관이라는 점이다.
쉽게 말해 마법을 쓸 수 있으면 능력자, 없으면 비능력자.
비능력자는 보통의 인간들로, 이 소설 속에서 조연 축에도 못 낀다.
그게 바로 나와 우리 아빠다.
“하지만… 오히려 좋아! 으히히, 평범하게 태어난 건 엄청난 축복이라구?!”
“응? 무슨 소리야?”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울 아빠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뜯어보았다.
키 크고 몸 좋고 얼굴도 기가 막히게 잘생긴 데다가 딸바보이기까지 한 만점 아빠지만, 그는 누가 봐도 엑스트라다.
평범한 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 흔하디흔한 ‘브라운’이라는 성에 심지어 이름까지 길 가다 마주치면 열에 두엇은 나올 ‘제임스’ 씨.
“무서운 세상이자나. 나는 아빠랑 단둘이 알콩달콩 평범하게 사는 거 넘무 조아. 행복해!”
능력자만 귀족 작위를 갖고 대우받는 세계관.
능력치에 따라 철저히 구분되는 피라미드 계급제.
툭하면 일어나는 전쟁과 그곳에 기용되는 능력자들.
그리고 주연급 캐릭터들도 가차 없이 죽어 나가는 스토리….
이곳이 소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바람 잘 날 없었던 <도스의 반란> 속이라면, 이름 한 줄 없는 엑스트라가 그야말로 꿀 빠는 삶인 것이다.
나는 ‘제국민 1’, ‘엑스트라 1’인 내 존재 의의를 깨닫자마자 신께 감사한 사람이었다.
“…으응, 맞아. 아빠도 우리 공주님만 있으면 다 좋아.”
왜인지 어색하게 웃는 울 아빠, 제임스 씨를 보며 나는 브로콜리 두 개를 야무지게 해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