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는 전생에서 인간이 아니었다.
뭐였냐면….
‘대학원생이었지.’
와, 진짜 인간의 삶이 아니었다.
꽃다운 스물다섯 나이에 밤새워 논문 쓰다 과로로 죽었다.
‘논문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강렬했으면 소설 속에서 환생까지 한 거람.’
내 논문 제목은 이러했다.
[장르 소설에서 시사된 사회 개혁의 특성 연구 - 판타지 소설 <도스의 반란>을 중심으로]
나는 논문을 쓰기 위해 <도스의 반란>을 약 10회 정독한 사람이었다.
그 누구보다 원작의 전개며 소설 속 여러 가지 설정들에 빠삭하단 얘기다.
‘뭐, 엑스트라인 이상 굳이 소설 내용 열심히 떠올릴 필욘 없지만.’
소설 내용을 떠올리려면 머리에 힘을 빡 주고 전생을 기억해야 하는데….
그러면 배도 많이 고파지고 성인일 때 정신연령과 동화돼서 위화감도 들고 그렇다.
뭐, 어차피 피 튀기는 전쟁과 혁명은 부자(父子)인 두 주인공이 알아서 해 줄 예정이다.
주인공들이 비능력자도 인간 대우 받는 좋은 세상을 만들고 나면, 그 후로 나는 한가로이 꿀만 빨면 된다는 말씀.
‘엑스트라 인생, 최고야!’
나는 수잔 아줌마에게 안겨서 쿡쿡 웃다가, 아빠를 향해 소리쳤다.
“아빠, 조심해!”
아빠는 비가 샌다는 아줌마네 집 지붕을 고치는 중이었다.
탕탕탕―!
사다리에 올라 입에는 못을 물고 망치질하는 아빠의 모습은 아주 익숙했다.
이 산골 마을 사람들 모두, 천장에서 비 샐 때나 닭장 울타리가 망가졌을 때 아빠를 부르거든.
‘여기 사람들은 울 아빠 착하다고 맨날 호구처럼 부려먹는다니까? 물론 수잔 아줌마는 괜찮지만.’
맛있는 요리라도 하면 항상 우리 집에 나눠주고 아빠 없을 때 나를 봐주는 수잔 아줌마만 인정할 수 있다.
나머지 이웃들은 영 양심이라곤 없단 말이지.
“어유, 제임스. 매번 도움만 받아서 미안해.”
“아닙니다. 저야말로 항상 신세 지는데요, 뭐. 오늘도 리리스 좀 부탁드릴게요.”
“신세라니? 그런 소리 마. 리리스가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내가 신경 쓸 게 하나도 없어. 어쩜 이렇게 착하고 귀여운 아이가 다 있을까?”
“으항항.”
나는 수잔 아줌마의 목을 안고 히죽 웃었다.
말이야 당연히 잘 듣지.
나를 보통 일곱 살짜리 꼬마랑 비교하면 곤란하다.
“웃는 거 봐. 귀여워라…. 지금도 이렇게 예쁜데 나중에 크면 얼마나 더 예뻐지려고 그럴까? 리리스는 누구 닮았어, 응?”
아빠 닮았…다고 하기에는, 사실 난 생김새가 영 딴판이다.
눈처럼 하얀 은발에 파란색 눈동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엑스트라 1의 외모라기엔 너무 튀어서 의심스러웠던 난―
“호, 혹시 나 주워온 거 아냐?”
―아빠에게 그렇게 물어봤었는데.
“엄마 닮았대요!”
“그래?”
아빠는 내 은발과 푸른 눈이 아기 때 집 나간 엄마를 닮았다고 했다.
“하하, 네. 애 엄마를… 닮았죠.”
못질하던 아빠가 왜인지 어색하게 웃으며 거들었다.
“엄마도 엄청 미인이었나 봐.”
엄마 얼굴을 모르니까 증명할 길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혹시 내가 아빠 친딸이 아니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다!
자랄수록, 웃을 때 휘는 눈꼬리와 버선 모양 코, 끝이 올라간 입매가 아빠랑 찰떡같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확실히 울 아빠 딸! 그리고 확신의 엑스트라!’
갈색 머리, 갈색 눈.
심지어 이름까지 제임스 브라운.
누가 봐도 지나가는 제국민 1인 울 아빠의 딸이니까, 나 또한 평화로운 미래가 보장된 엑스트라가 분명했다!
“이제 비 안 샐 겁니다. 그리고 저번에 문고리도 말썽이라 하셨던 것 같은데. 다녀와서 한번 봐 드릴게요.”
“어머, 그러면 나야 고맙지. 어휴, 제임스 없으면 어쩔 뻔했어. 우리 집 식충이는 밥 먹고 하는 일 없이 배나 긁고 있고. 어디 써먹을 데도 없다니까.”
수잔 아줌마가 말하는 식충이는 그녀의 남편인 죠 아저씨다.
“하하…. 그럼 오늘도 리리스 잘 부탁드립니다. 공주, 아빠 얼른 시장 다녀올게.”
아빠는 가져왔던 나무 한 짐을 등에 메고, 수잔 아줌마에게 안겨있던 내 코끝을 툭 건드렸다.
“빨리 가따 와! 글구 우리 약속 잊지 않았지?”
“넵, 공주님. 당연하지용. 마카롱 사 올게.”
“히히.”
나는 아빠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수잔 아줌마에게 안겨 손을 흔들었다.
더 이상 아빠가 보이지 않자 시무룩하게 손을 내리는데 수잔 아줌마가 웃었다.
“리리스는 아빠가 그렇게 좋아?”
“네, 그럼요!”
전생에도 고아였던 나에게, 다정한 보호자의 기억이라곤 이번 생의 아빠뿐이다.
젊은 남자 혼자 아기를 키우는 게 힘들었을 텐데….
아빠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 기저귀도 갈고 이유식도 먹이고 목욕도 시키고 그랬다.
애착 관계가 형성될 아기 때부터 곁에 있어 줬던 아빠의 의미는 내게 무척 컸다.
착하고, 잘생기고, 키 크고, 다정하고.
심지어 이 무서운 세계에서 가장 꿀 빠는 엑스트라로 태어나게 해준 울 아빠.
‘얼른 자라서 효도해야지!’
나는 의지를 다지며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나는 수잔 아줌마네에서 꿀 탄 우유와 쿠키를 먹고, 죠 아저씨와 카드 게임을 열 판쯤 했다.
수잔 아줌마는 카드 게임을 구경하며 옛날얘기를 해줬다.
“밤늦게 누가 문을 막 두드리는데 놀라서 열어 봤더니 네 아빠가 사색이 되어선 서 있는 거야. 웬 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그게 리리스 너였지.”
“애 아빤 줄 그때 알았다니까.”
카드를 든 죠 아저씨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젊은 남자가 난데없이 이 산골 마을로 들어와선, 인사도 없이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내길래 뭔 사연이 있나 했더니….”
“후후, 그랬지. 아무튼 네 아빠가 하는 말이, 아기가 분명 아픈 건 아닌데 먹지를 않는다네? 배고플 텐데 젖병만 갖다 대면 울며 자지러진다고 하길래 왜인가 봤더니, 세상에.”
“제가요? 왜 안 먹었대요?”
나는 카드를 한 장 받고, 칩 대신 쓰는 도토리를 왕창 걸며 물었다.
“아기가 5개월이 넘었는데도 분유만 먹이고 있었던 거야. 하도 질려서 그랬는지 배고픈 거 꾹 참고 너 나름대로 표현을 했던 거지.”
어설픈 아빠의 모습을 떠올린 수잔 아줌마가 막 웃었다.
“일단 들어오라고 하고, 사과 갈고 바나나 으깨고 먹던 분유 섞어 이유식 만들어줬어. 그러니까 안 먹는다던 아기가 한 그릇을 다 비우는데, 네 아빠 눈이 휘둥그레지더라구.”
“킬킬…. 그다음 날부터는 아주 깍듯하게 굴었지. 멀리서 보일 때마다 후다닥 달려와서 인사하고, 나무 하면 반절은 나눠줘서 내가 아주 편했단 말이야.”
“으휴, 식충이 양반 같으니. 먹었으면 밥값을 해야지. 농땡이 피우면서 착한 사람 부려먹고.”
“아니, 제임스가 굳이 나눠주고 싶다는데 어떡해? 호의를 거절해도 예의가 아니야, 이 사람아.”
“여하튼, 아기를 처음 키워 보니 막막했는지 그날부터 이것저것 묻고 배워갔어.”
신기했다. 지금은 주부 9단인 아빠인데 그렇게 어설플 때도 있었다니.
“흐흐. 이번에는 내가 이겼단다, 꼬맹아.”
죠 아저씨는 히죽 웃으며 뒤집힌 자기 카드를 까 보였다.
하트 모양이 다섯 개.
“플러시다! 크하하하!”
죠 아저씨는 털이 숭숭 난 팔로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여 있던 도토리를 끌어 모았다.
“잠깐.”
나는 죠 아저씨의 팔을 딱 붙잡았다. 그리고 내 카드를 깠다.
K, K, K, 7, 7.
“훗, 풀하우습니다.”
죠 아저씨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나는 의자에서 폴짝 내려와 치마를 펼치고 도토리를 몽땅 쓸어 담았다.
“내일 또 하시져. 도전은 언제든 환영이에요.”
“아, 무슨 풀하우스야!”
경악하는 죠 아저씨를 보고 수잔 아줌마와 나는 깔깔 웃었다.
그렇게 나는 치마폭에 도토리를 한 아름 안고 수잔 아줌마와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곧 돌아올 시간이었다.
“오늘도 감사히 잘 놀았습니다.”
나는 공손히 손을 모으고 수잔 아줌마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아줌마 먼저 가 보세요. 저 빨래 하러 갈 거예요.”
“뭐어? 네가 왜 빨래를 해? 놔둬, 그냥.”
“아빠 돌아와서 빨래까지 하려면 피곤하니까 제가 해놀려구여!”
“세상에나…. 리리스는 맘씨도 천사 같네. 그럼 아줌마가 해놓고 갈게. 그게 빨랫감이니?”
빨랫감 든 바구니를 들고 오자 아줌마가 물었다.
나는 흠칫 놀라 바구니를 끌어안았다.
“아, 안 돼요. 아빠 팬티도 있거든요.”
“에그머니나.”
“으항항, 걱정하지 마세요. 저 빨래 잘해요. 쉬워요. 요 바로 뒤에 냇가에 가서 쪼물쪼물만 하면 되는걸요?”
수잔 아줌마는 놀라워했다.
“네가 몸도 작고 말도 늦게 떼서 아빠가 걱정이 많았는데…. 실은 천재였나 봐. 세상에 어떤 일곱 살이 카드 게임도 척척 하고, 아빠 빨래도 해주고 그러겠어?”
“엣헴.”
아줌마는 코가 한껏 올라간 나를 보며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럼 아줌마 먼저 가 볼게. 저녁 꼭 챙겨 먹고.”
“네, 아줌마! 안녕히 가세요!”
나는 수잔 아줌마를 보내고 빨래터로 향했다.
‘아빠는 내가 몰래 빨래하는 거 싫어하지만….’
그래도 계속 할 거다.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온갖 집안일은 물론이고 나무까지 해다 파는 싱글대디 제임스 씨의 고충을 이해하는, 나는야 어른의 사고를 할 줄 아는 어린이니까.
“일곱 살에 아빠 팬티 빨아주는 효녀 누구지요? 넵, 리리스 브라운입니다!”
나는 냇가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빨랫감을 꺼내며 킬킬거렸다.
산 좋고 물 좋은 주변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히야, 엑스트라의 삶은 참 한가롭구나. 매일 오늘만 같아라.’
비록 이 세계에서 사람 취급 못 받는 비능력자에 평민이고 조금 가난한 삶이지만.
‘곧 주인공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테니 걱정 없지. 전생에 비하면 이만한 삶이 없다. 환생 최고!’
그때였다.
다그닥, 다그닥―.
‘응? 웬 말발굽 소리?’
작은 손으로 열심히 빨래를 조물거리고 있는데 별안간 숲 너머에서 낯선 기척이 났다.
대륙 남부의 작은 시골 영지, 제논. 거기에서도 한참은 구석탱이에 있는 두메산골.
여기는 우리 집을 포함해 가정집 여섯 채가 전부인 외딴곳이다.
다시 말해, 말까지 타고 여기에 들어올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데….
‘뭐,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내 촉은 기똥차게 들어맞았다.
“이랴!”
히이잉―!
말을 탄 여섯 명의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튀어나와 내 앞에 멈춰 서는 게 아닌가.
그들은 전부 은색 갑옷 위에 푸른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망토에 새겨진 문양을 바로 알아보았다.
황실 문장.
제국군이다!
그것도 푸른 망토라면….
‘도, 도스(Dos) 계급 성기사단? 아니, 누추한 곳에 왜 이런 귀하신 분들이?’
나는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잡아.”
기사단의 중심에 있던 남자가 명령하자 그의 부하 하나가 내 뒷덜미를 덥석 잡아 올렸다.
“캑!”
그리고는 들고 있던 경찰봉 같은 것을 가차 없이 내 가슴팍에 쿡 찔렀다.
“헉! 아, 아퍼요….”
그건 내가 알기로 능력자를 구분하는 아티팩트였다.
쇠막대기처럼 생긴 아티팩트는 금방 푸른 빛을 냈다.
“능력자입니다, 단장. 에녹 루빈슈타인의 딸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거 고장 난 거 아냐?
“생긴 것만 봐도 알겠군.”
당황하고 있는데, 아마도 기사단장인 듯한 흑발의 미남자가 코웃음 치며 나를 넘겨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