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에 휩싸인 어린아이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주는 착한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가 다치지 않게 해라. 뒤로 물러서서 대기해.”
기사단장은 그리 말하며 재빨리 뒤에 있던 부하 기사에게 나를 넘겼다.
내게 손을 물린 아까 그 사람이었다. 오른손에 선명한 잇자국 위로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엄….”
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봤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살짝 화가 난 표정으로.
‘이 사람은 그냥 성실히 공무 집행 중이었던 거군.’
나는 머쓱해져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당. 저도 방금 알아가지고요….”
그때였다.
순간 엄청난 풍압이 느껴져 쳐다보니.
쉬익―!
“큭.”
……? 저게 무슨 일이람.
아빠는 그냥 허공에 부지깽이를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시퍼런 검기가 기사단장을 향해 날아갔고 그는 검으로 겨우 방어한 채 뒤로 1m가량 밀려났다.
그 뒤로는 무자비한 공격의 연속이었다.
부지깽이는 쉴 새 없이 허공을 갈랐고 기사단장은 날아오는 검기를 막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명령 불복종은 죽음뿐?”
“큭.”
“말하고도 우스웠겠군.”
“젠, 장….”
“네놈이 나를 무슨 수로 제압할 거지?”
아빠는 말하는 중간중간 검기를 날리며 여유로웠다.
기사단장은 자신만만하게 입을 나불거린 것과 달리 쪽도 못 쓰는 중이었다.
“게다가.”
“크윽.”
“감히 내 딸을.”
역시 아빠의 화를 펑 하고 터뜨린 기폭제는 나였다.
아빠는 1초마다 검기를 날려댔고 기사단장은 겨우 막아내는 데만 급급했다.
저, 저… 방어하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어찌 공격할 거며, 무슨 수로 제압을 한단 말인가.
나는 이제야 기사단장을 가소로워했던 아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멈춰라! 에녹 루빈슈타인!”
척 봐도 승산이 없었는지 나를 안고 있던 기사가 소리쳤다.
동시에 눈앞이 번쩍 빛났다.
발검한 기사가 내 목에 칼을 세운 것이었다.
“히익!”
“리리스!”
공격을 멈춘 아빠는 사색이 된 얼굴로 다가오려다가 멈춰 섰다.
“순순히 투항하고 우리를 따라라. 그러면 딸의 목숨을 보장하겠다.”
“어린애를 가지고 협박이라니. 성기사단이라는 위명이 우습군.”
아빠가 이를 갈며 비아냥거렸고 나는 속으로 조심스레 동의했다.
“우리는 황명을 이행할 뿐. 황제 폐하께서는, 에녹 루빈슈타인, 그대를 데려오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하셨다.”
죽다 살아난 기사단장이 또 입을 나불거렸다.
잠시 침묵하던 아빠가 대답했다.
“……나는 그 이름을 버렸다.”
허어, 그러니까 역시, 그 이름이었던 적은 있다는 말이지?
나는 일말의 가능성도 날아가 버린 상황에 실소를 머금었다.
제임스 씨(27)는 사실 힘을 숨긴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이 맞는 모양이었다.
“더는 제국 황실에 복종하며 살 생각이 없다. 너희의 주군에게 그리 전해라.”
“그대에게 선택하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뭔 패기인지 기사단장이 아빠를 향해 검을 겨누고 덧붙였다.
“명령이다.”
“…….”
제대로 화난 아빠의 주변으로 또 묘한 기류가 맴돌았다.
이번에는 뭔가… 더 큰 게 터질 것 같았다.
그러자 나를 잡고 있던 기사가 또 검을 세우며 위협했다.
“에녹 루빈슈타인! 딸이 무사하길 바란다면 멈춰라!”
“흐윽. 자, 잠깐! 잠깐만여!”
나는 무서워서 쿵쿵 뛰는 가슴을 애써 다잡았다.
상황을 정리하자면, 엑스트라인 줄만 알았던 우리 아빠의 정체는 힘을 숨긴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
고로 나는, 그의 6번 설정. 그러니까―
6. 젊은 시절, 제국 황실에 의해 어린 딸을 잃은 뒤 복수의 칼날을 갈았음.
―에서, 밑줄 쫙 친 ‘어린 딸’을 맡고 있다는 얘기다.
‘이거 실화냐. 내 꿀 빠는 엑스트라 인생 돌려줘요.’
이 사실들이 명확해진 시점에서, 원작의 내용을 전부 알고 있는 내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나는 검을 쥔 기사의 팔을 살짝 밀어낸 다음,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암요! 황명이라면 따라야져! 울 아부지, 오늘 당장 기사단으로 돌아가시겠답니다~!”
짝짝짝.
아빠 포함, 모두의 얼빠진 시선이 내게 모였다.
* * *
“엄마 닮았다며! 엄마 닮았다며!”
바닥에 드러누운 채 팔과 다리를 파닥거리는 내 옆에서 죄인처럼 무릎 꿇고 앉은 아빠가 사과했다.
“미안해, 공주.”
“왜 나한테 말 안 했는데! 왜! 왜!”
“진짜 미안해. 아빠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비로소 본모습을 드러낸 아빠의 은발과 푸른 눈은 나와 꼭 닮아 있었다.
분명히 엄마 닮았다고 해놓고선.
아빠는 거짓말쟁이!
“그런데 우리 딸.”
입꼬리를 씰룩거리던 아빠가 버둥거리는 나를 꽉 붙잡고 뺨에 찐하게 뽀뽀했다.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똑똑하지? 응? 그 상황에서 그런 임기응변이라니?”
아빠는 집 밖에 대기 중인 여섯 명의 기사들을 힐끔거리며 좋다고 웃었다.
‘오늘부로 복귀하겠다’는 내 말에 아빠는 하는 수 없는 척 고개를 끄덕였고 이곳을 정리하고 나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번 시간이었다.
“클클클…. 저 멍청한 놈들. 이걸 믿고 인질을 풀어주네? 우리 공주만 안전하면 나는 무서울 거 하나 없쥐. 자, 대충 짐 챙겨서 얼른 도망갑시다.”
나는 창밖을 살피며 낄낄거리는 아빠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아니, 이게 진짜 맞냐?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무뚝뚝한 냉혈한에 말끝마다 ‘~군.’ 하며 포스 풀풀 풍기던 그 에녹 루빈슈타인이?
아무리 봐도 그냥 동네 바보 형인데?
‘뭐, 내가 죽은 줄 안 후로 달라진 거겠지만.’
나는 매 순간 주접이 일상인 지금 아빠의 모습을 이해하려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나 할 말 있어.”
“응, 뭔데?”
어느새 빠르게 짐을 챙기고 있던 아빠는 대충 대답했다.
“도망치지 말구 제도로 돌아가자. 기사단에도 복귀하고.”
“응?”
아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더니 코끝을 훔치며 피식 웃었다.
“에이, 걱정하지 마. 우리 공주가 인질로 잡혀 있을 때야 아빠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밖에 쟤들? 부지깽이로도 다 이겨.”
“으응, 부지깽이는 나도 아까 봐서 알지이. 아는데… 그냥 아빠가 돌아갔으면 좋겠어.”
멈칫한 아빠가 짐 싸던 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야 표정이 좀 진지해져 있었다.
“왜?”
“그리구 나도 아빠 따라 제도 갈래. 가서, 능력자 양성소도 들어가구 능력자 배지도 받을 거야. 나도 능력자잖아.”
아빠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양성소니 뭐니,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엄, 죠 아저씨가 말해줬어.”
“뭐라고?”
아빠가 인상을 찌푸렸다.
“형님이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아니, 알아도 그렇지 애한테 대체 뭔 소릴….”
사실 죠 아저씨는 아는 게 전혀 없을 테지만 일단 나는 그를 팔아보았다.
“도망치면 평생 쫓겨야 하자나…. 또 일케 무서운 아저씨들 올 수도 있구, 잘못하면 나 죽을지도 몰라….”
“아니야, 리리스. 아니야. 미안해. 이번에는 아빠가 방심했던 거야. 앞으로는 우리 공주 위험할 일 없어. 이런 일 안 만들게.”
“그게 문제가 아니야. 나 도망 다니면서 살기 싫단 말야. 떳떳하게 살고 싶다구.”
내 말에 아빠의 눈이 흔들렸다.
“리리스.”
내 이름을 불러 놓고도 아빠는 몇 분쯤 말없이 망설였다.
“아빠 말, 잘 들어.”
그러다 이내 결심했는지,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아빠는 사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수도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밖에 저 무서운 아저씨들이 아빠를 찾아올 수도 있겠다고…. 그런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어.”
“으응.”
“그런데도, 다 알면서도 도망친 거야. 왜냐면 너를… 능력자로 키우고 싶지 않았거든.”
소중한 자식을 능력자로 키우고 싶지 않다는 말.
이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는 당연히 아빠의 맘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비능력자’인 줄 알았을 때 안도했던 이유도, ‘능력자’의 삶이 결코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니까.
“능력자로, 귀족으로 사는 게 좋아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이 파빌리온 제국에서 능력자는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계급과 전공에 따라 귀족 작위를 받고 수많은 영지와 금화를 보유하며 만인의 복종과 충성을 얻는다.
다만 그 혜택에는 의무가 따른다.
황제의 검과 방패와 지팡이가 되어, 평생을 ‘황실 정예군’ 소속으로 사는 것.
1년 365일이 정복 전쟁과 마수 토벌인 이 제국에서, 툭하면 출정 명령을 받는 정예군들은 전투 노예나 다름없다.
“능력자는 귀족이면서 군인이기도 해. 전사로, 마법사로… 거의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야 하지.”
“…….”
“그리고 전쟁터는… 아주아주 끔찍한 곳이야.”
아빠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힘겹게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어제 인사했던 친구가 오늘… 죽어서 내게 돌아와. 나는 그 친구를 땅에 묻으면서 생각해. 내일은 또 누가 죽게 될까. 나는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빠는 깊어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7년이나 떠나 있었어도 조금도 옅어지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폭음, 비명, 죽음의 소리….
“아빠는.”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듯 아빠의 시선이 허공에 머물렀다.
아마 상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능력자로 살아야 할 내 미래를.
“…무서워.”
아빠는 한참 만에, 울 듯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너를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아.”
“아빠….”
“리리스. 7년 전에, 태어난 너를 처음 본 그날.”
아빠는 힘겹게 말을 잇다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날 너는 내 세상의 전부가 됐어.”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나는… 그런 너를 잃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