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떨고 있는 아빠를 마주 안으며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 누구보다 아빠를 이해하고 있고 또 아빠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하지만.
‘아빠가 돌아가지 않으면, 이 나라는 파멸인걸.’
그렇다.
아빠는, 에녹 루빈슈타인은, 여기 있으면 안 된다.
그는 원작대로 딸의 복수를 위해 입에는 꿀을 담고 뱃속에는 칼을 품은 채 기사단으로 돌아가야 하고, 남주 체시어를 거둬야만 한다.
그리고 기사단 내부에서부터 착착 반란을 준비한 뒤 이 나라에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면.
지금으로부터 약 십 년 뒤.
‘일반인들은 다 죽을 테니까.’
제국 황실은 ‘비능력자 말살 정책’을 자행한다.
말 그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법 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을 잡아 죽이는 대학살.
그걸 막는 사람이 바로 아빠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 어차피 주인공들이 대학살을 막아 주니까. 주인공들이 지켜 주니 엑스트라로 꿀만 빨려 했는데.’
그러나….
‘울 아빠가 주인공이었잖아!’
원래였다면 아마, 나는 조금 전 납치당했을 거다.
딸을 뺏긴 에녹 루빈슈타인에게 복수의 씨앗을 심는 역할.
하지만 아빠와 헤어지기 싫다는 순간적인 생각으로, 나는 원작을 바꿔버렸다.
원작과 달리 무사한 나.
그런 나를 아빠가 데리고 도망친다면?
아빠는 남주인 체시어를 거둬 그를 가르칠 일도 없고 제국 황실에 반기를 들지도 않을 거다.
‘그러면 파국이야. 무고한 엑스트라들은 다 죽겠지?’
나는 수잔 아줌마와 죠 아저씨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둘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모습까지 떠올린 순간.
‘안 돼, 안 돼.’
나는 고개를 힘껏 저어 몹쓸 상상을 털어냈다.
“아빠.”
“…응.”
“아빠는 내가 평생 도망 다니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아니지?”
“그건 아니지만.”
아빠는 꼭 끌어안고 있던 내 몸을 떼고 눈을 맞춰왔다.
“공주가 그랬잖아. 아빠랑 둘이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
“제도로 돌아가면? 공주는 능력자로 살아야만 해. 절대 평범한 삶이 아니겠지.”
그래, 내가 그랬었지.
하지만.
‘이미 아빠가 에녹 루빈슈타인인 시점에서 내 평범하고 안락한 엑스트라의 삶은 다 끝났거든요!’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삼키고, 나는 탐욕에 젖은 일곱 살 꼬맹이를 연기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빠가 대단한 사람이구 내가 능력자라 그러니깐 맘이 쫌 달라졌어.”
“그게 무슨 말이야?”
“능력자라면 귀족이기도 하잖아. 게다가 아빠 딸이면 귀족 중에서도 제일 힘 쎈 귀족. 맞지?”
“…….”
번뜩이는 내 눈을 멍하니 들여다보며 아빠는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빠는 맨날맨날 힘들게 나무 해서 시장에 팔면서 안 살아도 되고, 나는 그런 아빠 안 기다려도 되고. 또… 빨래도 안 해도 되지!”
“리리스, 공주야, 빨래는 아빠가 하지 말랬는데 네가 자꾸…!”
“또 있어! 마카롱도 맨날맨날 먹을 수 있구, 리본 달린 드레스도 입을 수 있잖아!”
쾅, 쾅.
나는 화난 것처럼 발을 굴렀다.
아빠가 놀랐다.
‘어흐흑. 아빠, 미안해. 이런 불 속성 효녀 같은 행동 하고 싶지 않았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왜!”
“리리스!”
“나를 능력자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구?”
나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입을 삐쭉이며 소리쳤다.
“능력자로, 귀족으로 살고 싶은지 아닌지 내 생각은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고, 공주야….”
“나는 아빠한테만 공주님이라고 불리는 거 싫어! 진짜 공주님 하고 싶어!”
아빠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 아빠 딸 아니야!”
“뭐, 뭐라고?”
결정타….
아빠는 충격받은 얼굴로 한 번 크게 몸을 휘청거렸다.
“제임스 딸 안 해! 에녹 공작님 딸 할 거야!”
나는 쬐만한 검지로 창밖을 야무지게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빠가 안 가면 저 삼촌들한테 데려가 달라고 할래!”
“…….”
강경한 내 태도에 아빠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물며 한참 침묵했다.
‘어흐흑. 아빠, 진짜 미안해.’
아빠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을 거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이 딸내미일 테니까.
* * *
내 유년 시절 추억이 가득한 정든 오두막집.
그 앞에서 나와 아빠는 바리바리 싼 짐과 함께 기사들을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아빠에게 안겨 기사단장의 잘생긴 얼굴을 훔쳐보았다.
‘흑발에 자색 눈. 어쩐지 익숙한 묘사다 싶더라니.’
그의 이름은….
악시온 리브르.
1. 계급, 도스(Dos).
2. 리브르 공작.
3. 아빠의 기사단 입단 동기로, 7년 전 종적을 감췄던 아빠 대신 단장직을 맡고 있었음.
4. 앞으로 아빠의 혁명군 동지가 되어줄 최측근 조력자.
역시 원작의 주요인물이었다.
‘암요, 저 사람이 악시온이었어. 저런 잘생긴 얼굴이 엑스트라일 리가 없지.’
제임스 브라운 씨에게 시원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난, 앞으로 ‘잘생긴 엑스트라 같은 건 없다’라는 철칙을 뼈에 새기기로 했다.
“그럼 출발하지, 에녹.”
“마차.”
아빠가 무심한 목소리로 읊조리자 악시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최고급 마차 대령하기 전까진 못 가. 우리 딸 엉덩이 배겨서 말 타고 오래 이동 못 한다.”
“아니, 뭔!”
악시온의 옆에 서 있던 기사가(내게 손을 물렸던 그 사람이다) 아빠의 갑질에 욱해 튀어나오려 했다.
그러나 악시온이 가볍게 팔을 들어 제지했다.
“후우….”
그는 한숨 쉬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저, 저 봐라. 마치 짐덩이를 보는 듯한 눈빛. 표정에서 뭔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내가 불 속성 효녀 짓까지 해가며 아빠를 움직인 건데, 그 노고도 몰라주고!
“얘들아.”
악시온은 결국 명령했다.
“마차 구해 와라…. 최고급, 으로….”
* * *
그로부터 약 1시간 뒤.
우리는 남부의 엘파샤라는 도시로 이동 중이었다.
큰 도시에만 있는 신전에서 워프 게이트를 타고 제도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우왕. 푹신푹신 좋당.”
나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안락한 마차의 승차감에 감탄했다.
무려 성기사씩이나 되는 분들이 하인처럼 헐레벌떡 구해 온 마차였다.
“아빵! 마차 완전…!”
나는 들떠서 아빠를 부르다 멈칫했다.
가만히 턱을 괴고 창밖을 보는 아빠의 옆모습에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아마 7년이나 공들여 키워놓은 딸이 생각지도 못한 불 속성이라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어흐흑. 진짜 미안해, 아빠….’
나는 쭈뼛쭈뼛 엉덩이를 움직여 아빠 옆에 찰싹 붙었다.
“아빠아.”
“어어, 리리스.”
“미안해….”
아빠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잠시 시무룩해진 나를 바라봤다.
“공주.”
이내 아빠가 나를 들어서 자기 무릎 위에 마주 앉혔다.
“아빠 표정이 무서워서 그래? 미안. 생각 좀 하느라 그랬어.”
“…….”
“있지, 아빠가 잘못했어. 우리 공주한테. 공주 말대로 공주 생각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아빠는 머리를 넘겨주고 뺨을 쓰다듬어주면서 내가 안심하도록 웃었다.
“공주 하고 싶은 거 다 해. 아빠 진짜 집에 가서, 예쁜 옷도 입고 비싼 마카롱도 잔뜩 먹고 그러자.”
“…….”
“지금까지 그렇게 못 해줘서 미안. 아빠가 몰랐어. 공주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지.”
“아, 아니야….”
나는 제임스 브라운 씨와의 산골 오두막 생활이 행복했다.
마카롱은 비싼 디저트라 많이는 못 먹지만 가끔 먹는 것만으로도 괜찮았고, 예쁜 옷이야 입어 봤자 산골짜기 마을에 자랑할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아빠는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부족하거나 못 해 준 것 하나 없던 만점짜리 아빠였다.
‘어흐흑. 불 속성 효녀가 울 아빠 죄책감까지 들게 했어.’
나는 미안해져서 말했다.
“나도… 아까 아빠 딸 아니라고 한 거 정말 미안해. 진심 아니야. 그리구 나는 아빠 이해해. 전쟁터 무서우니까 나 보내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맞아. 전쟁터는 무섭지. 그러니까 우리 공주는 가지 말자.”
“…응?”
단호한 아빠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예쁜 옷도 입구 마카롱도 먹으려면 전쟁터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안 그래도 돼. 예쁜 옷 입고 마카롱 먹어. 하지만 전쟁터는 안 가도 돼. 아빠가 공주 전쟁터 안 가게 할게.”
나는 듣는 귀가 있을까 고개를 휙휙 돌려 살폈다.
대놓고 배 째라 병역 거부?
아빠는 뭔가 무시무시한 생각을 마친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아빠. 잠깐만. 아빠가… 으앙!”
그때였다.
순간 급정거한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고 내 엉덩이가 부웅, 한 번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리리스! 괜찮아?”
“으, 응.”
무슨 일이지?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살폈다.
“아, 아빠? 저게 모야?”
저 멀리서 거대한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엄청난 속도로 마차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웨어울프다.”
아빠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창을 열자마자, 말을 타고 마차 옆에서 동행 중이던 악시온이 말했다.
“장난해?”
놀란 아빠에게 찰싹 달라붙어 나는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느, 늑대?’
그건 허연 이를 드러내고 침을 질질 흘려대는 늑대였다.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직립보행하는!
“이 근방에 서식지가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인가까지 내려올 줄은 몰랐군.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처리하고 올 테니.”
“빌어먹을….”
아빠는 악시온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출발하자마자 나를 위험에 빠트린 게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공주야.”
“응?”
“꼼짝 말고 여기 있어. 절대로 나오면 안 돼. 밖으로 머리 빼지도 말고.”
“잠깐만! 아빠 어디 가는데?”
붙잡을 새도 없이 아빠가 문을 열고 훌쩍 뛰어내렸다.
“넌 마차에 실드나 쳐. 내 딸 상처 하나라도 나면 넌 죽는다.”
“네가 직접? 그럴 필요까지야.”
“네놈들이 세월아 네월아 한 마리씩 잡는 걸 언제 다 기다려.”
이를 간 아빠가 악시온의 허리에 매인 검을 스릉, 당겨 빼냈다.
“아, 아빠? 아빠!”
나는 무서워서 차마 문을 열진 못하고, 눌린 찐빵처럼 창에 뺨을 바짝 붙인 채 소리쳤다.
“아빠아아!”
어림잡아 서른 마리는 되는 듯한 괴물 늑대들을 향해, 아빠는 달랑 검 한 자루만 쥔 채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곁을 따르던 기사들은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저, 저기여? 삼촌! 도와주셔야지 왜 구경만 해요! 우, 울 아빠 혼자 저걸 다 어케 잡으라구요!”
나는 창을 탕탕 두드리며 악시온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그가 나를 힐끗 보고는 중얼거렸다.
“…혼자 다 잡아.”
“무, 무슨…?”
그 순간.
아빠가 검을 휘둘렀다.
허공을 가르듯, 가로로 포물선을 그리며 한 번 쓱.
‘뭐지?’
그리고 동시에―
멀리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까워지던 괴물 늑대들이 일제히 정지했다.
마치 비디오를 멈춘 듯한 광경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쟤, 쟤네 갑자기 왜 멈췄지? 칼도 안 맞았는데?’
의문은 곧바로 해결됐다.
“헐.”
정확히 3초 정도 멈춰 있던 괴물 늑대들은, 마치 공간을 그대로 자른 듯 두 동강 나서 동시에 피를 터뜨리며 쓰러졌다.
“저, 저, 저게 머선 일….”
나는 또 믿기지 않아서 눈을 쓱쓱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