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261)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천천히 밖의 기사들을 살펴봤는데, 놀란 건 나뿐이었다.

…진짜 나만 놀랐어? 다들 왜 이리 태연한 얼굴이야?

“실드 쳐놓으라니까 왜 멀뚱히 서 있지?”

가볍게 산책이라도 다녀온 양, 휙휙 어깨를 풀며 되돌아온 아빠가 악시온에게 무섭게 일갈했다.

“그 에녹 루빈슈타인이 검을 들었는데 어차피 몇 초 만에 끝날 일 아니었나. 괜한 마나 낭비지.”

“이 자식이 진짜.”

확 인상을 찌푸린 아빠가 말에 타고 있던 악시온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후.”

곧 날카롭게 한숨을 뱉은 아빠가, 악시온의 검집에 도로 검을 꽂고 마차에 올랐다.

“아, 아, 아빠….”

“공주는 저런 거 보지 마.”

다시 출발하는 마차의 창밖으로 즐비한 괴물 늑대들의 사체가 보일 뻔했지만, 다행히도 아빠가 눈을 가리고 커튼을 쳐주었다.

나는 꼴깍 침을 삼키며 아빠의 손을 천천히 잡아 내렸다.

‘내, 내가 뭘 본 거지? 생각보다 더 대단하잖아? 힘을 숨겼던 제임스 브라운 씨….’

아빠는 괴물 서른 마리를 한 획에 잡아 놓고, 꼭 날벌레 한 마리 쫓고 온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렇구나. 이래서 주인공이구나.’

세계관 최강자의 힘을 그저 텍스트로만 읽었을 때와 실제로 보는 것은… 괴리가 어마어마했다.

나는 아빠의 활약을 두 눈으로 보고서야 비로소 실감했다.

최상위 계급 능력자만을 배출해 온 명문가의 모태 귀족.

제국 유일의 소드마스터.

전장의 은빛 늑대, 백전백승의 군인….

‘규격 외 존재’라고 한 5천 번은 서술됐던, 주인공의 진짜 저력을!

“공주, 우리 딸, 표정이 왜 그래. 많이 무서웠어?”

“아, 아니야. 구냥 좀 놀랐어….”

“괜찮아. 아빠 있잖아. 일로 와.”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나를 소중히 안아 등을 다독여주는 아빠 품에서, 나는 또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거 신분 상승이 너무 가파른 거 아니야?’

아빠의 숨겨진 힘을 실제로 마주하고 나니 심장이 콩콩 뛰었다.

나, 하루아침에 세계관 최강자의 딸이 되어버렸다….

* * *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

“우와앙. 보들보들하다.”

난생처음 입어본 최고급 옷의 감촉!

이곳은 남부 엘파샤 신전의 워프 게이트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아기 사제님들이 입는 망토 달린 순백색 사제복으로 갈아입었다.

‘평민들 옷차림으로 제도에 갈 순 없으니까.’

거듭 말하지만, 말만 평민이지 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몹쓸 세계관이다.

제도에는 귀족들이 많기 때문에, 출발 전 신전의 사제님들이 내게 헐레벌떡 사제복을 내어준 거다.

“애기야, 애기야.”

“넹!”

주황 머리의 성기사 삼촌, 필립이 나를 불렀다.

“너 몇 살이야?”

“뭐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해? 에녹 경이 탈영하고 7년 지났으니 일곱 살이지.”

“아니, 일곱 살이라기엔 애가 너무 작아서 물어보는 거잖아.”

필립 삼촌과 벤 삼촌이 투닥거렸다.

나는 게이트실에서 아빠를 기다리면서, 이 두 삼촌과 제법 친해졌다.

“일곱 살 맞아요.”

“혹시 에녹 경이 굶겼어?”

“아니요.”

도리도리.

“그럼 혼난 적은? 아빠 무섭지?”

“아빠 화나면 어떠니? 맞아본 적 있어?”

둘은 내게 아주 관심이 많았는데, 궁금해하는 게 어째 다 비슷비슷했다.

아빠 안 무섭냐, 안 맞아봤냐, 안 혼나봤냐….

“아빠한테 혼났을 때요?”

나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혼난 기억을 뒤지다가 겨우 말했다.

“꼬꼬알 밑에 브로콜리 숨겼을 때랑, 저녁에 이 닦구 몰래 쪼꼬 먹은 거 들켰을 때….”

“와, 아직 앤데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 역시 무섭게 키우네.”

“당연하지. 그 에녹 루빈슈타인이 설마, 자기 자식이라지만 오냐오냐 하겠어?”

“…그러면 안 돼, 라고 해여.”

덧붙이는 내 말에 필립과 벤의 눈이 껌뻑였다.

“그게 다야?”

“때리진 않고?”

“네. 울 아빠 안 무서워요. 저 안 맞아봤고 안 혼나봤어요.”

둘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했다.

“구런데 삼촌들, 울 아빠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에요?”

내가 묻자, 필립과 벤이 7년 전의 아빠를 떠올리는 듯하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있지, 에녹 경은….”

쪼그려 앉은 필립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맨손으로 곰을 찢어.”

“네에에?”

“너 곰 본 적 있어?”

도리도리.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젓는 나를 보며 벤이 의아해했다.

“한 번도? 사실 제논이 숨어 살기 적격인 동네긴 한데… 상당히 위험하거든. 산이 많아서 야생동물들이, 어우. 옛날부터 유명했지.”

“잉? 아닌데. 우리 마을 전혀 안 위험해요. 살기 엄청 좋….”

나는 말하던 도중에 문득, 스쳐 지나가듯 죠 아저씨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하! 제임스 부녀가 아주 복덩이야, 복덩이! 둘이 여기에 오고 나서 얼마나 살기 좋아졌는지 모른다니까! 겨울엔 곰 때문에 골치 아팠는데, 제임스 온 뒤로 때맞춰 씨가 말랐는지 어쩐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서, 설마 아빠가 미리 찢어놨나?

나는 꽤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꼴깍 침을 삼켰다.

“아무튼, 네 아빠 진짜 무서워. 맨손으로 곰도 찢고 마수도 때려잡고 그래.”

“맞아. 마수들이 오천 보 밖에서도 네 아빨 알아보고 줄행랑을 친다고. 괜히 전장의 은빛 늑대가 아니라니까.”

열심히 주고받는 필립과 벤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전장에서의 아빠 모습을 나름대로 상상해봤다.

텍스트로야 수십 번 읽었지만 역시, 실제로 보면 훨씬 더 무시무시하겠지….

“무뚝뚝하긴 또 얼마나 무뚝뚝하다고. 친해지기 힘든 상관이었지.”

“그래도 단장이랑은 좀 친하지 않았냐?”

주고받던 둘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워프 게이트를 살피고 있는 악시온이 보였다.

“아까 에녹 경, 단장 죽이려고 한 거 맞지?”

“그치. 까딱 잘못했으면 분명 살인 났을 거야.”

둘은 계속 속닥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전우애라는 게 있는데 너무한 거 아냐?”

“야, 그 상황에서 눈에 뵈는 게 있겠어? 딸 가지고 협박하는데?”

“나는 그 점이 진짜 놀랍다니까.”

침을 꿀꺽 삼키며 말한 벤이 나를 물끄러미 봤다.

“아무리 딸이라지만, ‘그’ 에녹 루빈슈타인이 이렇게 이성을 잃고 날뛰는 게 말이 되냐고.”

“그러게. 솔직히 우리 힘으론, 에녹 경이 있는 데 알아봤자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거든? 그래서!”

필립이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너한테 진짜 고맙다. 우리 빈손으로 돌아갔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

“맞아. 우린 거기서 에녹 경한테 죽든가, 소득 없이 돌아가서 황제 폐하께 죽든가 둘 중 하나였다고.”

“엣헴. 뭘요.”

나는 왜인지 어깨가 치솟는 기분이 되었다.

벤이 그런 내 머리를 귀엽다는 듯 쓰다듬었다.

“너도 과거의 에녹 경을 봤다면, 우리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있을걸?”

“암, 암. 그 에녹 루빈슈타인에게 감히 명령할 수 있는 여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막 삼촌들의 회상이 또 시작되려 할 때.

게이트실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아빠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내 앞을 막고 앉아있던 필립과 벤이 돌아보더니 흠칫하며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에 아빠에게 달려가려던 나는―

‘헐.’

놀라고 말았다.

환복한 아빠, 아니, 마침내 마주한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을 보고.

“와, 아아.”

강건한 몸을 감싼 성스러운 은빛 갑주.

한쪽 어깨에 걸쳐 내린 기사의 상징, 푸른 망토.

본모습을 찾은 은발과 푸른 눈에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포, 포스 봐라?’

성기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날카로운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어마어마해 나는 환청까지 들렸다.

전장의 긴박함과 성기사의 성스러움이 적절히 믹스된 웅장한 BGM이 자동으로 귓가에 재생되는 기분….

‘소설 안 읽었어도 주인공인 줄 다 알겠네.’

어쩌면 7년이나 속았던 게 아니라 내가 눈치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리리스.”

“으응.”

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아빠가 어색해서 침을 꼴깍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아빠는 왜인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빤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내 겨드랑이에 손을 하나씩 끼워 넣고 허공에 달랑 들어 올린 다음 말했다.

“…천, 사?”

“응?”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천사였잖아…. 천사였어, 우리 공주님 정체가.”

“아.”

나는 사제복인 내 차림을 내려다보고 곧바로 깨달았다.

아빠의 주접이 시작되리라는 걸.

“아, 아빠. 잠깐만.”

제발 하지 마!

말릴 새도 없이 나를 자기 팔에 앉힌 아빠가 호들갑 떨며 등 뒤를 살폈다.

“아기 천사님, 날개는 어디 있어? 응? 어디에 숨겼어?”

“아….”

“세상에. 리리스, 공주야. 내 보물. 내 천사야.”

아빠는 울컥했는지, 눈꼬리를 쭉 내리고 입술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우리 딸 이렇게 이쁜데 아빠가 맨날 누더기만 입히고…. 아빠가 미안해. 잘못했어.”

“아니, 누더기까진 아닌….”

아빠는 내 뺨에 이마를 붙이며 마구 부비부비했다.

그때 모두의 시선은 우리를 향해 있었다.

‘아씨, 망했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에 찬 표정.

입은 할 말을 잃은 채 떡 벌어지고 동공은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섭고 과묵하고 냉정한 전장의 은빛 늑대 이미지 와르르….’

내 볼을 빨아먹을 듯 뽀뽀하는 아빠에게 붙들려 나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늘어졌다.

“그, 그만….”

저 멀리, 표정이 거의 없던 악시온의 입마저 떡 벌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곧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좀 심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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