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261)

세상 다 산 듯한 공허한 눈빛이 조금 아쉽지만, 남자애는 특별하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의 미모를 갖고 있었다.

‘확실해! 분명 주연급으로 갈수록 인상이 또렷해지고 있다고!’

나는 그렇게, 이 세계의 법칙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나 또한 엑스트라치곤 지나치게 귀여운 외모라, 수잔 아줌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지 않았던가.

‘알고 보니 나도 엑스트라가 아니었지. 엑스트라는 무슨. 난….’

문득 내 존재 때문에 머리가 아파 왔다.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아차, 일단 내 걱정은 치워 두고.’

맞다. 내 감은, 지금 이 아이가 바로 체시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빨간 눈.

우선 이 애의 생김새는 체시어의 외모 묘사와 같았다.

물론 흑발에 적안인 아이는, 찾아보면 얘 말고도 없진 않을 거다.

하지만.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을 가진 ‘잘생긴’ 아이를, ‘주인공’인 ‘에녹 루빈슈타인’이 찾아낸 상황.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니다.

100% 원작의 진행을 따라간 게 틀림없었다.

“이, 이름이 뭐야?”

“…….”

마음이 급해져 대뜸 던진 질문에 남자애는 대답이 없었다. 그냥 집요하게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하긴. 대놓고 경계하고 있는 게 보이는데 쉽게 입을 열어줄 리가.

“얘야, 많이 아프냐? 일어날 수 있겠어?”

아빠가 손을 내밀자 남자애는 잠깐 그걸 보다 혼자 일어났다.

그리고는 절뚝이며 우릴 지나쳐갔다.

“잠깐 기다려. 너.”

탁―!

붙잡으려던 아빠의 손이 남자애의 손에 내쳐졌다.

그 애는 다시 한번 나와 아빠를 번갈아 보곤, 텅 빈 눈으로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저기, 잠깐만!”

“리리스.”

더 붙잡으려던 나를 아빠가 말렸다.

아빠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있지, 공주야. 귀족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아.”

“아아, 응.”

“저 애가 불편해하니까 그냥 여기까지만 도와주자.”

아빠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골목 밖으로 나서는 남자애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봤다.

나는, 왜인지 저 애에게 끌리는 듯한 아빠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속으로 실소했다.

‘여기 소설 속 맞구나, 확실히. 원작은 알아서 차근차근 잘 진행되고 있는 거야.’

아마 이것이 분명, ‘우연한 계기’로 만났다던 에녹 루빈슈타인과 체시어의 첫 만남이었을 것이다.

“이만 가자, 공주님.”

“응.”

내 손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아빠는 말이 없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아빠의 머릿속이, 왜인지 나는 훤히 들여다보였다.

7년 만에 돌아왔지만, 역시 반갑지만은 않은 썩어빠진 이 나라의 현실.

앞으로 여기에 적응해 살아가야 할 딸에 대한 걱정.

조금 전 본 남자애에게 묘하게 이끌리는 마음.

뭐,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을 테지.

“아빠아.”

나는 조심스럽게 잡고 있던 아빠 손에 힘을 줬다.

“응, 공주. 왜.”

“있자나, 나 친구 마음대로 사귀면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귀족이잖아. 그럼… 평민 친구들은 사귀면 안 되는 거지?”

내 질문에 아빠는 잠시 침묵했다.

에녹 루빈슈타인. 미쳐버린 이 제국 계급제에 회의적이던, 정의로운 혁명가.

아마 딸을 잃기 전에도 이미 그의 안에 충만했을, 혁명의 피가 끓어오르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아니야, 리리스.”

예상대로 아빠는 단호한 눈을 했다.

“네가 원한다면 그 누구도 상관없어. 귀족이든 평민이든, 능력자든 비능력자든. 너만 좋다면,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도 돼.”

“정말?”

“그럼.”

아빠는 피식 웃으며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아빠, 아빠. 아까 그 애 있잖아. 정말 괜찮을까? 그대로 둬도?”

“응?”

“많이 다쳤던데 치료는 제대로 받으까? 아니, 것보다… 귀족들 싫어해서 인사도 안 하는가 본데, 또 맞고 다니면 어뜨케?”

“…그러게.”

“어디로 갔을까….”

“처음 본 애가 그렇게 신경 쓰여?”

“응!”

나는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자꾸 생각나. 친구… 하고 싶은가 봐.”

아빠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렇겠지. 자기도 지금 그 묘한 느낌의 남자애가 계속 떠오르고 있을 텐데, 딸인 나도 비슷한 말을 하니까.

“아빠가 나중에 다시 찾아서 도와주면 안 돼? 치료했는지도 궁금하구 걔랑 말도 해 보고 싶구 그런데….”

“하, 하하.”

아빠는 멍하니 나를 보다가 이내 웃기 시작했다.

“내가….”

그러다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내 뺨에 자기 이마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내가 천사를 낳았네.”

“찾아서 도와줄 거야?”

“그래, 그러자. 당연히 그래야지. 아빠가 언제 우리 공주님 말 안 들어준 적 있었어?”

“으항항. 아빠 최고다. 고마워.”

나는 아빠의 품에 파고들며 씁쓸해지는 표정을 감췄다.

‘원작대로라면 체시어는 지금쯤 오닉스 후작가에서 지내고 있을 거야.’

체시어 루빈슈타인의 6번 설정에 따르면―

6. 원래는 모 귀족의 사생아로 학대당하며 살다, 우연한 계기로 에녹 루빈슈타인의 눈에 들어 양자로 입적됨.

―모 귀족의 사생아인 그는 지금 매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을 거다.

물론 그 불우한 유년 시절은 작중에 서술되지 않았다.

<도스의 반란>은 이미 아빠의 양아들이 된 13살의 체시어가 검술 수련을 하던 장면에서 시작하니까.

그가 ‘오닉스 후작’의 사생아였다는 설명은 후에 나온다.

‘지금 네가 어디 있는지 알아, 아니까….’

귀족에 대한 반발심을 심기 위해 체시어에게 부여한 학대 서사가 못 견디게 안타까웠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체시어의 그 공허한 표정을 본 사람이라면 전부 나 같은 마음이겠지.

‘기다려, 체시어. 내가 조금이라도 빨리 너를 찾아줄게.’

* * *

성은 없고 이름은 체시어였다.

하녀 출신이었던 어머니와 11년을 살다가, 반년 전에 오닉스 후작 저 앞에 버려졌다.

있는지도 몰랐던 아버지, 오닉스 후작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콰르토(Quarto) 계급의 귀족.

도스 다음으로 치는 능력자였다.

“조나단, 네놈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느냐? 저 애를 밖에 내버려서 어찌할 것인데?”

체시어는 아버지인 오닉스 후작과 배다른 형, 조나단이 옥신각신하는 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복형제 조나단은 아버지의 사생아인 체시어를 끔찍할 정도로 경멸했다.

오늘도 체시어를 몰래 개처럼 끌고 나가, 제도 한복판에 버려두고 혼자만 집으로 돌아갔었다.

“저 버러지가 이 집에 있는 꼴을 못 보겠다고요!”

“닥쳐! 그럼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아무 데나 내버렸다가 제국군에게 능력자 불시 검문이라도 당하면 어쩔 거냐!”

오닉스 후작이 씩씩거렸다.

“능력자라는 게 발각되면 부모를 수소문하겠지. 내 핏줄이라는 게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고, 그럼 나는 사생아를 만든 것도 모자라 밖에 쓰레기처럼 내다 버린 인간이 되는 거다.”

“그렇다고 저 사생아를 세상에 알릴 것도 아니시잖아요! 천한 피가 섞인 버러지를!”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게 가둬서 키우면 될 게 아니냐!”

“그럴 거면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시라고요. 저는 저놈이랑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역하단 말입니다!”

“…….”

조나단의 말에 오닉스 후작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 뜻하는 바는 망설임이었다.

제 명성에 누가 되는 불순물 같은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차마 죽일 수는 없는.

알량한 자책에서 오는 망설임.

“다시는 오늘 같은 짓을 벌이지 마라. 다른 것은 참견 않으마.”

오닉스 후작은 가만히 무릎 꿇고 앉은 체시어를 일별하고는 냉정히 방을 나섰다.

“버러지 새끼.”

기다렸다는 듯 조나단의 주먹이 체시어의 머리 위로 뻗어졌다.

본능적으로 체시어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러자 세상은 느릿해졌다.

아주 천천히, 꼭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아마 10분은 기다려야 저 주먹이 자신의 뺨에 닿을 것이다.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건지, 자신의 눈을 속이는 건지.

이 기묘한 능력이 어떤 종류인지 체시어는 잘 알지 못했다.

그냥 자신이 능력자이기 때문에 가진 능력이리라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다.

“이, 이름이 뭐야?”

문득 골목에서 마주쳤던 사제복 차림의 작은 여자애가 떠올랐다.

어린 사제라면 당연히 고위급의 능력자일 거다.

그런 인간들은 모르겠지.

자기들 발밑에 깔린 수많은 비능력자와 낮은 계급들의 삶을….

‘지겨워.’

체시어는 생각했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오만하고 또 강압적이다.

제 아버지와 이복형처럼.

‘아.’

드디어 닿은 주먹에 고개가 돌아갔다.

세상은 느려졌고 주먹도 천천히 날아오지만, 고통은 고스란히 느껴진다.

피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것은, 형의 화를 돋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게 맞으니까.

낮은 계급은 감히 높은 계급을 올려다봐서도 안 되고, 심기를 거슬러서도 안 된다.

‘그냥 빨리 끝내고 꺼져 버려.’

체시어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세상은 다시 제시간을 찾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주먹과 발길질이 빠르게 쏟아졌다.

‘죽어 버리면 편할 텐데. 그건 또 무서운가.’

체시어는 몸을 웅크리고 날아오는 발길질을 견디며 자조했다.

죽는 방법을 알아도 실천하지는 못한다. 배가 고프니 도망치지 않고 얌전히 후작가로 돌아왔다.

그런 자신이 참 역겹게 느껴졌다.

자살할 용기는 없으니 차라리 명이 다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면 참 좋을 텐데.

“쿨럭, 컥!”

이윽고 홀로 남겨진 체시어는 가만 천장을 올려다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문득 바지 주머니로 손이 갔다.

귀족 여자아이가 건넸던 손수건.

“미, 미안…. 갑자기 만져서 미안해. 여기 둘게.”

대체 이걸 왜 챙겼는지 체시어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토끼가 그려진 손수건을 가만 보다, 이내 손에 꽉 쥐고서는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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