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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도착한 제도 타운하우스.
아빠의 본가를 보자마자 나는 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아아. 진짜, 진짜 크다.”
웅장한 대문 너머로 가장 먼저 보이는, 만 평은 되어 보이는 녹색 정원.
물병을 든 천사 조각상이 세워진 대리석 분수대.
봄꽃으로 장식해 놓은 아치를 따라 멋들어지게 관리된 조경수들.
그리고 그 뒤에 디귿(ㄷ) 자 모양으로 웅장하게 세워진 백색 저택까지….
‘이게 말이 돼? 땅 좁은 제도에 이런 크기의 대저택이라고?’
대단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본 루빈슈타인 공작저의 위엄은 내 비루한 상상력을 한참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7년이나 시골살이를 했던 아빠도 새삼 놀랍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빠는 곧바로 대문에 달린 줄을 당겨 방문을 알렸다.
“으잉? 아, 아빠아! 잠깐!”
“응? 왜?”
“나 마음의 준비 좀 해야지이…!”
“아하하! 에이, 긴장할 거 없어, 공주야.”
아빠는 떨리지 않는 걸까? 7년 만에 보는 집안사람들일 텐데.
원작에서 몇 번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존재하시는 분들이 여기 포진해 있을 거다.
아빠의 양자인 체시어에게 무척 잘해줬던 착한 집사 아저씨라든가, 매일같이 체시어의 대련 상대가 되어줬던 유쾌한 사병들, 그리고….
‘할아버지.’
가끔 등장할 때마다 포스가 장난 아니었던 에녹 루빈슈타인의 부친, 노르딕 루빈슈타인.
뼛속까지 귀족인 데다가 아빠와 마찬가지로 도스 계급의 능력자인 할아버지는, 활자로만 봐도 위엄이 폴폴 풍겨올 정도였다.
그런 할아버지와의 만남이 걱정되면서도 궁금한 이유는, 원작에서 그가 체시어에게 무척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왜 있잖아.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아닌. 뒤로 챙겨줄 거 다 챙겨주는 그런 스타일.
‘나한테도 상냥하게 대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힘들겠지?’
조금은 떨렸다.
한 3분쯤 기다렸을까.
집사 아저씨가 메이드복 차림의 하녀를 열 명쯤 대동하고 헐레벌떡 뛰어와 대문을 열어주었다.
“자, 자, 자, 작은 주인님. 저, 정말, 정말로… 돌아오셨군요.”
“어, 렘. 오랜만.”
그래! 집사, 렘 아저씨!
사람 좋은 인상의 렘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한참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고 펄쩍 뛰었다.
“오, 이런. 세상에! 그, 그러니까 이분이 작은 주인님의…! 오, 말도 안 돼!”
나는 긴장을 삼키고 사제복 치맛자락을 펼쳐 보이며 숙녀처럼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리리스라구 합니다.”
“헙! 아, 안녕하십니까. 리리스 아가씨. 저는 레미언 산토스라고 합니다. 편하게 렘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렘은 왜인지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뒤에 있던 하녀 언니들을 돌아보았다.
몇몇은 입을 틀어막고 있었고 또 몇몇은 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세상에나. 처, 천사 같으세요.”
“작은 주인님이랑 똑 닮으셨는걸요?”
“너, 너무 귀여… 흡!”
나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속으로 안도했다.
걱정이 좀 됐는데 생각보다 호의적인 반응 같았다.
“언제까지 밖에 세워둘 거야?”
“아니, 내 정신 좀 봐! 죄송합니다, 작은 주인님. 죄송합니다, 리리스 아가씨. 50년 평생 이리 감격스러운 순간이 처음이라.”
“호들갑 떨지 말고.”
아빠가 픽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안내하는 렘을 따랐다.
거대한 정원은 가로지르는 데만 꼬박 5분은 걸렸다. 렘은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성기사단이 황명을 받고 작은 주인님을 모시러 갔다는 소식은 전달받았습니다만, 솔직히 저희 모두, 그리고 큰 주인님께서도 썩 기대하진 않았거든요.”
“그럼 내 얼굴 보고 아버지가 충격 좀 받으시겠네.”
“물론이죠.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어우, 저는… 죽기 전에 작은 주인님을 뵐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해서, 너무.”
렘은 울컥했는지 입술을 꽉 물고 훌쩍거리기까지 했다.
“맞다. 오르디아 님도 와 계십니다.”
“누님도?”
놀라며 묻는 아빠에, 내 머릿속이 멍해졌다.
누님이라면 아빠의 친누나.
내게는 고모였다.
“네. 혹시나 작은 주인님이 돌아오실 수도 있으니까요. 도련님들과 함께 머물고 계신 지 벌써 2주째입니다.”
아빠가 1남 1녀 중 둘째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작에서 그의 누나가 따로 등장한 적은 없어서 이름은 처음 듣는다.
‘으으, 이거 진짜 현실이구나.’
스치듯 언급되었던 이들도 이제 이곳에서 환생한 내게는 활자가 아닌 ‘진짜’ 사람들!
몰랐던 고모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런 현실감이 피부로 와닿았다.
“저는 오늘 저녁을 그 어느 때보다도 성대하게 준비하라고 식당에 일러두겠습니다. 이거, 의지가 샘솟는군요.”
렘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며 나와 아빠를 어마어마한 저택 안으로 들여놓았다.
‘헐.’
이번에는 바보처럼 보이기 싫어서 나는 감탄사를 속으로만 내뱉었다.
‘구, 궁전이네, 궁전.’
어마어마했다.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조금 냉해 보였던 백색 외관과 달리 포근한 우드톤으로 가득한 저택 안.
광활한 내부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카펫이 깔려 있었고 양쪽으로는 넓은 계단이 둥근 곡선을 그리며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목이 꺾일 정도로 고개를 들면 각 층이 보였는데 복도마다 값비싼 태피스트리와 그림, 보석 액자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 사이사이마다 걸린 금색 촛대들마저도 비싸 보였다.
‘저, 저거 진짜 금일까? 진짜 금이겠지?’
왜인지 나와 영 맞지 않는 곳에 들어온 기분이라 조금 위축됐다.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자 아빠가 나를 내려다봤다.
“왜, 공주님?”
“아, 암것두 아냐.”
힘뿐 아니라 재력도 숨긴 제임스 브라운 씨….
“제가 큰 주인님께 먼저 가서….”
“아아, 됐어. 알아서 갈게. 쓰던 방에 계시지?”
“예.”
“그래. 가서 일 봐. 수고.”
아빠는 내 손을 잡고 오른쪽에 있던 계단을 거침없이 올랐다.
‘떨려! 살려줘!’
나는 마른 입술을 연신 씹었다.
2층 오른편 첫 번째 방에 도착한 아빠는 그야말로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아, 아빠! 잠깐…!”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었다.
문이 활짝 열렸다.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할아버지.
그리고 그 옆에 서서 한참 뭔가를 말하고 있는 여자.
두 사람의 고개가 우리를 향해 돌아왔다.
“오, 말도 안 돼. 세상에. 에녹.”
놀란 여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귀부인처럼 틀어 올린 은발과 푸른 눈동자.
그녀는 누가 봐도 아빠와 남매.
나의 고모인 게 분명했다.
“저 왔습니다, 아버지.”
아빠는 마치 어제 집 나갔다가 오늘 돌아온 사람처럼 말했다.
그 어이없는 인사에 할아버지는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포, 포스 장난 아니다.’
아빠를 찰떡같이 닮은 할아버지는 분명 예순은 되었을 나이에도 떡 벌어진 풍채를 갖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오라기 흐트러지지 않은 정돈된 모습에, 그저 앉아만 있는 자세에도 귀족의 위엄이 물씬 풍겼다.
‘무서워.’
입을 막고 눈물을 글썽이다가 나를 빤히 살피는 고모와 달리, 할아버지는 표정이 없어서 무서웠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아빠와 내게로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할아버지의 표정이 보였고, 나는 깨달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악문 턱과 죽일 듯 노려보는 눈빛.
그리고 내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모습.
할아버지만은, 공작가의 사람들과 달리 우리를 마냥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네놈이 지금….”
화가 나겠지. 물론 반가움도 있겠지만 화도 날 거다.
이유야 어찌 됐든, 아빠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무책임하게 집을 떠나 7년이나 연락도 없었으니까.
“안 본 새 많이 늙으셨네요. 마음 아프게.”
“이놈이!”
“아버지, 옆에 애 있어요!”
할아버지의 손이 아빠를 꼭 때릴 것처럼 올라간 순간, 뒤에 있던 고모가 빽 소리쳤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허공에 팔을 올린 그대로 멈췄다.
이윽고 한 번도 내게 닿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시선이 물끄러미 내려왔다.
아빠의 바짓자락을 꽉 붙잡고 벌벌 떨고만 있던 나는,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본능적으로 푹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꼭… 호랑이 같았다.
호랑이가 사람으로 변하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이게 딸이냐.”
“이거라뇨? 우리 공주한테.”
“7년이나 살았는지 죽었는지 연락 한번 없이 혼자 잘도 키웠구나.”
냉랭한 말투에서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혹시나 하고 걱정했던 그대로,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역시…. 나 때문에 아들이랑 7년이나 떨어져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야.’
부, 권력, 귀족의 삶…. 그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에녹 루빈슈타인의 저의가 무엇이었을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갓 태어난 친딸을 데리고 사라졌으니까.
딸을 능력자로 키우지 않으려고.
그러니까 오로지 딸을 위해서.
‘내가 할아버지라도 나 같은 애는 밉겠다. 뭐, 솔직히 아주 조금쯤은 이런 반응일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잖아?’
한창때의 나이였던 아들이 7년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쏟게 하고, 가족과도 절연하게 만든 손녀.
할아버지에게 내 존재는 당연히 달갑지만은 않을 거다.
‘리리스, 이 바보야. 실망하지 마. 당연한 거야. 당연한 거. 미움받고 싶지는 않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벌벌 떨리는 입술을 겨우 열어 중얼거렸다.
“저… 죄,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