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61)

“…공주님? 리리스? 우리 공주가 뭐가 죄송해?”

아빠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할아버지의 무서운 눈빛이 보일까 봐 고개도 못 들고 아빠의 바짓자락만 꽉 쥐었다.

“아버지, 표정 푸십시오. 애가 무서워하잖습니까.”

“시끄럽다.”

할아버지는 냉랭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곧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내 위로 그늘이 졌다.

살며시 눈을 들어 보니, 무릎을 굽힌 할아버지의 얼굴이 코앞에 바로 보였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 설마 때리시는 걸까?’

느릿하게 다가오는 손이라 피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응?’

그리고는 살며시 뺨에 닿아오는 온기에 다시 눈을 떴다.

‘뭐, 뭐지?’

꼬집.

멍청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보고 있던 나는, 아프지 않게 뺨을 한 번 꼬집는 손길에 눈을 깜빡였다.

할아버지는 내 말랑말랑한 볼을 한 꼬집 쥔 채로 가만히 멈춰 있었다.

그는 왜인지 떨고 있었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아….”

아빠와 꼭 닮은 할아버지의 파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깨달았다.

이 눈빛, 그리고 이 떨림….

알고 있다!

이건, 내가 지미네 집 삼색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그 귀염둥이들을 보면서 절로 몸이 떨렸던, 바로 그 반응이었다!

“큭.”

머리 위에서 아빠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 할아버지가 나를 귀여워하고 있어?’

긴장해서 잃었던 눈치를 비로소 되찾은 나는 재빨리 목을 가다듬었다.

“하, 하부지!”

할아버지, 정도는 쉽게 발음할 수 있을 만큼 자란 혀지만….

일부러 귀엽게 꼬부려주면서.

“저는 리리쓰예요! 일곱 살!”

수줍게 인사했다.

할아버지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아주 크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수줍게 웃으며 쭈뼛쭈뼛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가 품에 쏙 파고들었다.

“하부지이…, 만나서 반가워요.”

“…….”

뻣뻣하게 굳은 할아버지는 이윽고 나를 끌어안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빠만큼이나 큰 할아버지는 나를 안은 채로, 가까이에서 빤히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래. 내가 네 할애비다.”

나는 웃음을 삼키며 할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빠랑 똑같은 냄새가 났다.

* * *

7년 만에 다시 만난 세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그간의 얘기들을 나눴다.

그로도 부족했는지 둘이서만 따로 나눌 말이 있다는 아빠와 할아버지를 두고, 나는 고모와 함께 나왔다.

지금은 고모의 방으로 가는 길.

“후아아.”

나는 고모의 손을 잡고 짧은 다리로 열심히 따라가다가, 그녀가 우뚝 멈춰 서자 따라 멈췄다.

“어머, 어머. 미안해.”

“네?”

“내가 좀 빨리 걸었지. 지금 마음이 너무 들떠서 그래.”

“아녜요!”

나는 상냥하게 웃는 고모를 보며 감탄했다.

‘와, 진짜 이쁘다…. 주연은 아니지만, 주인공 남매 버프인가?’

앙트라세 공작가에 시집간 고모, 오르디아는 기품이 철철 흐르는 우아한 미모의 귀부인이었다.

고모는 나를 빤히 보다가 갑자기 울컥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오, 리리스. 어쩜 이렇게 천사 같은 아기가 다 있을까.”

“아니에여. 고모가 훨씬 더 천사같이 이뻐요….”

“뭐어?”

맞잡은 손에 뺨을 비비는 나를 보며 고모가 웃었다.

그러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있지, 사실 난 에녹보다도 네 걱정을 많이 했어. 이렇게 작고 귀엽고 약한 아이가….”

“…….”

“…평생을 힘들게 살았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구나. 이제부터는 좋은 곳에서 좋은 옷만 입고, 좋은 것만 먹고 지내렴. 너는 무조건 그래야 해. 루빈슈타인이니까.”

아니….

아빠와의 알콩달콩한 산골 마을 오두막살이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데요.

아빠가 괜히, 내가 빨래했단 소릴 해서 그래.

고모는 내가 무슨 촌구석에서 풀뿌리 씹어먹으며 막노동이라도 한 줄 아는 것 같았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얼른 가자꾸나, 리리스. 사촌 오라버니들을 소개해 줄게.”

“오라버니들이요?”

“그래. 내 두 아들 말이야. 쌍둥이란다. 장난기가 아주 많아서 걱정이지만, 그래도 착한 아이들이야. 맨날 동생을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댔지. 널 굉장히 좋아할걸.”

쌍둥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놀라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마, 맞다. 고모의 아들들이라면 앙트라세 공자들이겠구나.’

앙트라세 공작가의 쌍둥이.

에녹 루빈슈타인의 조카들로, 각각 한 명은 성기사, 한 명은 마검사가 된다.

‘그리고….’

나는 행복해하는 고모의 얼굴을 훔쳐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툭하면 사람 죽어 나가는 이 소설에서, 둘 다 죽을 예정.’

쌍둥이는, 아빠의 양자가 된 체시어가 마음을 연 몇 안 되는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친형처럼 따랐던 그들이 죽었을 때 체시어는 거의 반쯤 미칠 수밖에 없었고.

“음, 우리 테오는 몸이 좀 약해서 걱정이지만.”

“아, 그, 글쿠나.”

마침 걱정하듯 덧붙이는 고모의 말에 나는 멍해졌다.

테오. 테오 앙트라세….

먼저 죽는 쪽의 이름이었다.

“얘들아, 누가 왔는지 보렴!”

방에 도착한 고모가 활짝 문을 열었다.

그러자 테이블 위로 지루한 듯 엎드려 있던 두 남자아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헉, 진짜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것처럼 생겼다.’

육안으로는 절대 구분할 수 없는 생김새라는 설명이 자주 나와서 예상은 했지만.

둘은 판박이였다.

“우와! 진짜 왔어요?”

“뭐야? 완전 작네?”

후다닥 의자에서 내려온 둘은 내 앞까지 다가와 휘둥그레 뜬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한 명은 왼쪽으로, 한 명은 오른쪽으로.

‘행동도 비슷하고….’

꿀 같은 금발에, 나와 닮은 파란 눈동자.

좋은 옷을 차려입은 쌍둥이는 기품 넘치는 귀공자 태가 났다.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너무 똑같이 생겼지? 부끄러운 말이지만, 애들이 작정하고 속이면 엄마인 나도 구분 못 한단다.”

고모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쌍둥이에게 나를 소개했다.

“레온, 테오. 조금 전에 삼촌이 돌아왔어. 이 귀염둥이는 그러니까 너희들의 사촌동생이지. 이름은 리리스라고 해.”

“와아, 리리스? 반가워. 나는 테오 앙트라세야. 열두 살이고.”

왼쪽에 파란 귀걸이를 낀 테오가 다소 흥분한 표정으로 내 앞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구나….’

성기사(가 될 예정)인 테오는 원작에서 묘사된 대로 다정한 성격 같았다.

누군가가 체시어의 불분명한 출신을 물고 늘어질 때마다 자기 일처럼 화내주던 테오….

체시어가 우울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채고 섬세하게 달래주던 테오….

‘나 같아도 친형처럼 따를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런 테오는 기사 서임을 받은 이듬해 봄에 선천성 희귀병 때문에 죽고 만다.

햇수를 헤아려 보면 아마 4년도 안 남았을 거다.

“나도 방가워, 오라버니! 난 일곱 살, 리리스야!”

나는 측은해지는 마음에 작은 손으로 테오의 손가락을 덥석 잡고 살갑게 인사했다.

“아…. 흠흠.”

테오는 부끄러우면서도 좋은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옆에 서 있던 고모의 눈치를 봤다.

빙긋 웃으며 고모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테오가 서툴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아, 이쁘다….”

“으항항.”

“후후후…. 레온, 너도 리리스랑 인사해야지?”

나와 테오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고모가 말했다.

오른쪽 귀에 빨간 귀걸이를 찬 레온은 고모의 뒤에 반쯤 숨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쟤 일곱 살인데 엄청 작아. 바보. 나는 일곱 살 때 진짜 컸는데.”

“뭐? 동생한테 바보라니?”

부끄러운 모양인지 레온은 괜히 고모의 치맛자락을 쭉 당기며 딴청 피웠다.

“리리스, 오라버니들이 똑같이 생기긴 했지만, 성격은 전혀 딴판이란다. 테오는 다정하고 친절하지. 레온은 장난기가 많아서 걱정이고 말이야.”

“제가 뭐가요? 악!”

고모는 자기 주변을 뱅글뱅글 도는 장난꾸러기에게 꿀밤을 먹인 뒤 피곤한 듯 이마를 짚었다.

“레온, 얌전히 굴어. 말도 좀 예쁘게 하고. 이러면 아가씨들이 널 안 좋아한다고 엄마가 몇 번을 말했니? 왕거미 잡아 와서 발레린 영애를 놀린 일이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래? 또 혼나볼래?”

“그건 에리카 발레린이 거미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런 건데요.”

“네가 곤충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친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거지, 털이 숭숭 난 왕거미를 진짜 좋아하는 아가씨가 어디 있어!”

아들 키우기 힘들겠다….

나는 한숨을 푹푹 쉬는 고모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마검사(가 될 예정)인 레온은 장난기가 많고 말을 툭툭 내뱉는 스타일이라 체시어와 사사건건 티격태격이었다.

물론 본심은 아니다. 그 누구보다 체시어를 아꼈던 레온이니까.

레온은 고모에게 혼나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나를 힐끔거렸다. 자꾸 눈이 마주쳤다.

‘에휴, 등장인물 반은 다 죽는 이 미친 소설이 이제는 실화라니….’

아직 어린 열두 살 장난꾸러기 레온의 모습을 보며 나는 원작 한 귀퉁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상처에서 쉴 새 없이 피가 쏟아졌다. 체시어는 숨을 헐떡이는 레온을 떨리는 팔로 끌어안았다.

“레, 레온. 형…. 이,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제발 정신 차려.”

“큭. 아오, 등신. 너 우냐? 울지, 마라…. 남자 새끼가 찌질하게.”

“하아, 하. 조, 조금만 버텨. 형, 제발….”

“이 자식은 죽을 때 되니까 형이라고 부르네. 너 이 새끼, 내가 살려줬는데… 바보처럼, 큭, 죽지 말고.”

“혀, 형…. 형!!”

“…꼭, 살아서 돌아가 주라.”

마지막 부탁과 함께, 레온 앙트라세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사그라졌다.」

‘와, 또 눈물 날 것 같애.’

원작의 2권쯤 등장하는 대규모 마수 토벌전.

레온은 거기서 죽는다.

무려 습격당할 뻔한 체시어의 앞을 막고 대신 공격당하면서.

그 부분을 어찌나 절절하게 써 놨던지 읽으면서 화장지를 두 통이나 썼던 기억이 선했다.

‘진짜 조연들 복지라곤 없는 미친 소설!’

나는 어느새 레온에게 다가가 그의 바짓자락을 잡고 있었다.

멋지고 불쌍한 놈 같으니라고.

“오라버니이…, 만나서 너무너무 기뻐. 우리 친하게 지내자. 같이 거미도 잡구.”

“…….”

“헤헤, 나는 왕거미 좋아해….”

나는 수줍게 레온의 옷자락을 쥐며 말해 보았다.

친해지고 싶은데.

왜인지 레온은 먼저 다가간 나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오, 오라버니?”

그때.

왜인지 위험한 표정으로 움찔움찔 나를 보던 레온이 불쑥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내 오동통한 뺨을 꽈악 움켜쥐더니―

“……?”

―꼬집었다!

“아, 으앙악!”

아주 눈물이 쏙 날 만큼, 세게!

“세, 세상에! 레온!”

“헉! 야, 레온! 너 그렇게 세게 꼬집으면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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