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와 테오가 놀라 소리쳤다.
그 소란에, 레온이 흠칫하며 손을 뗐다.
“어허엉.”
보아하니 딱히 악의는 없고, 그냥 힘 조절에 실패한 것 같았다.
‘으앙, 하지만 타이밍이 안 좋았어!’
마침 레온이 죽고 마는 원작의 슬픈 부분을 떠올리고 있던 나.
안 그래도 코끝이 시큰하는 중이었건만….
뺨까지 세게 꼬집히니, 닭똥 같은 눈물이 반사적으로 뚝뚝 흐르고야 만 것이었다.
“오, 맙소사. 아가, 리리스. 너 괜찮니?”
“아, 저. 끄으….”
“레온! 이 말썽꾸러기! 대체 누가 숙녀의 뺨을 이렇게 세게 꼬집어!”
고모가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나를 달래며 레온을 혼냈다.
“나, 나는 그냥….”
“어떡해. 많이 아픈가 봐. 울지 마, 리리스.”
테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소매를 들어 내 눈물을 닦아줬다.
아프긴 아팠지만 진짜 어린아이들처럼 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타이밍이 영 좋지 못했다.
“난 그냥 귀여워서 그런 건데….”
레온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속삭이는 말은 나만 들었다.
“얼른 사과하지 못하겠니?”
“고, 고모. 저 갠차나요. 킁.”
고모가 계속 화내자, 민망한지 발끝만 휘적거리고 있던 레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
으윽. 안쓰러워라.
나는 코를 훌쩍, 한 번 더 들이마시고 후다닥 레온에게 달려가 그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아니야! 오라버니, 나 진짜 괜찮아. 하나두 안 아파. 갑자기 울어서 미안해.”
“…….”
“그치만… 킁, 담부터는 쫌만, 쫌만 살살… 꼬집어 줘.”
딱딱하게 굳은 레온이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나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는 입꼬리를 움찔거리다 빨개진 얼굴을 휙 틀고 대답했다.
“그, 그러지 뭐!”
* * *
조물조물.
만지작만지작.
“리리스 그만 좀 괴롭혀.”
3초마다 한 번씩 손을 뻗어 내 볼을 만져대는 레온을 못마땅한 듯 지켜보던 테오가 말했다.
“괴롭히는 거 아닌데?”
“자꾸 귀찮게 만지고 있잖아.”
“얘가 살살 만지는 건 괜찮다고 했거든.”
“적당히 하라고.”
“오라버니들.”
둘 사이에 앉아있던 내가 말했다.
“나는 괜찮아!”
뺨 꼬집히는 거야 귀여운 아기의 숙명이니 어쩔 수 없지.
그보다 지금은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구치만 오라버니, 지금은 식사 시간이니까. 다 먹구 나서 맘껏 만져.”
“음. 그러지, 뭐.”
레온이 아쉬운 듯 내 뺨을 조물거리던 손을 뗐다.
지금 여기는 식당.
저녁 식사를 하러 곧바로 이동한 이곳에서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호화로운 광경 때문이었다.
‘와, 정말 사치스럽다!’
가로 3m, 세로 10m는 되는 듯한 거대한 테이블.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고급 촛대, 화려한 꽃과 과일 바구니, 금과 보석 장식.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식탁 위에는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진귀한 음식들이 놓였다.
‘이제 다 나왔나?’
…싶으면, 주방장과 사용인들은 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 쉴 새 없이 계속 음식을 날랐다.
‘아니, 이걸 어떻게 다 먹어? 물론 다 먹으라고 차린 건 아니겠지만….’
나는 고모와 쌍둥이를 살펴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들은 고작 한 끼라기에는 너무 호화로운 이 식사가 당연한 일상처럼 보였다.
“즐거운 식사 하십시오. 아가씨, 도련님들.”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의 셰프처럼 멀끔히 차려입은 주방장이, 나와 쌍둥이들 앞에 손수 개인 접시와 식기를 대령했다.
제일 먼저 놓인 건 식전에 먹는 수프와 빵이었다.
“많이 먹으렴, 리리스.”
“네!”
맞은편의 고모가 먼저 스푼을 들며 다정하게 웃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식기는 또 뭐가 이렇게 많냐고요….’
나이프도 포크도 스푼도 여러 개.
슬쩍 옆을 보니 레온이 제일 큰 스푼을 들고 있어서 나는 눈치껏 따라 들었다.
“어머, 아버지. 오셨어요.”
그때.
할아버지가 포스를 풀풀 풍기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래.”
곧바로 나를 슬쩍 쳐다본 할아버지는 위엄 있게 상석에 앉았다.
“에녹은요?”
“짐을 풀고 온다더구나. 먼저 먹자.”
할아버지까지 오고 나니, 이제는 삐질삐질 땀까지 나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격식을 차린 식당 분위기.
내가 어떻게 여기에 적응할 수 있을 텐가.
‘사, 살려줘요. 식당에 사람이 갇혔어요….’
나는 입술을 발발 떨며 할아버지의 등장과 함께 고요해진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공손한 자세를 하고 일렬로 쭉 서 있는 하녀들.
차근차근 개인 접시를 날라주는 주방장.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태로 식사하는 고모와 할아버지….
‘이게 바로 귀족들의 식사 시간이구나.’
수프는 분명 비싸고 귀한 재료만 듬뿍 들어간 최고급일 게 틀림없었지만―
‘뭔 맛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긴장한 나머지 나는 아무 맛도 못 느끼고 절반이나 남겼다.
“레온.”
“예,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식사하다 말고 엄한 목소리로 레온을 불렀다.
장난꾸러기도 할아버지 앞에서는 얌전해지는 모양인지, 레온은 긴장하며 허리를 바짝 세웠다.
“소란을 피웠다고 하던데.”
“아버지, 레온이 발레린 영애에게 사과했어요. 저도 미안해서, 돌아가기 전에 발레린 백작 부인이랑 티 타임이라도 한번 가지려구요.”
고모가 어색하게 웃으며 레온 대신 대답했다.
아까 왕거미 어쩌고 하더니 생각보다 큰 사고였던 모양이다.
“네 어머니 속 썩인다는 얘기야 많이 전해 들었다마는, 여기에서도 말썽을 부렸다니 내 한마디 해야겠구나.”
할아버지가 식기를 내려놓고 손을 모으며 레온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 또한 루빈슈타인 사람이다. 열두 살이나 되었으니 그 이름의 무게 정도는 알아야 할 나이지.”
“예.”
“항상 자신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살피고 검열하여야 뒤탈이 없다. 예법에 충실하고, 경거망동하지 말며 만인의 귀감이 될 만한 자세를 매 순간 유지하도록 해라.”
“예, 할아버지.”
“앞으로 내 귀에 가문의 이름에 먹칠했다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죄송합니다….”
나는 한껏 풀이 죽어 대답하는 레온을 보며 괜히 찔렸다.
마치 이제부터 귀족으로 살아야 할 내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진짜 원작이랑 빼다 박았네.’
뼛속까지 완벽한 귀족의 표본.
원작에서 체시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할아버지는 365일 24시간 같은 표정과 같은 자세로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했다.
격식과 예법을 목숨 걸고 지켰고 품위 있게 굴지 않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타이밍 죽인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수프 다음으로 스테이크가 나온 지금 이 상황이, 내게는 상당히 절망적이었다.
나는 귀족의 예법이라곤 배운 적 없으니까.
‘뭐, 뭘 집어야 하지?’
나이프는 세 개. 포크도 세 개.
내가 쌍을 맞춰 옳은 식기를 집을 확률은 9분의 1. 극악이었다.
그러나 커닝하면 조금은 가망이 있을지도―
“왜 안 먹어?”
“리리스, 벌써 배불러?”
―라고 생각하며 슬쩍 곁눈질하려는 순간.
도움 안 되는 쌍둥이가 기어코 시선을 모으게 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왜 그러니, 리리스?”
고모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할아버지도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하녀들도 무엇이 불편한지 알아내려는 듯 전부 나를 주시했다.
‘스포트라이트 무슨 일이야!’
고모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시중드는 사용인들에게도, 식사 시간은 아주 평범한 일상일 거다.
그래서 난감해하는 나를 곧바로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뭐라고 대답하지? 솔직하게 식사 예법 모른다고 하는 게 낫겠지? 어차피 내가 이런 식기들 안 써본 거 할아버지도, 고모도 다 아니까….’
그럼에도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조금 민망했다.
안 그래도 아빠와 나 때문에 다들 속앓이를 하지 않았던가?
배운 것 하나 없는 내 모습을 알려 그간의 7년을 또 상기하게끔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어흑흑. 아빠는 빨리 안 오고 뭐 하는 거야.’
결국, 핑글핑글 도는 시야를 다잡으며 아무 나이프나 들려던 그때.
“늦었습니다.”
식당 문이 열리고 멋진 옷으로 갈아입은 아빠가 등장했다.
‘앗, 왔다! 제임스 브라운 씨!’
나의 구세주!
“아, 리리스. 아빠랑 같이….”
눈치 빠른 아빠는 곧장 나를 보고 다가오려 했다.
그때.
“세, 세상에, 레온!”
고모가 소스라쳤다.
‘뭐지?’
옆을 보니, 레온이 포크를 들고 자르지도 않은 스테이크를 푹 찍어 베어 먹고 있었다.
“얘가, 예의 없이 뭐 하는 거니! 옆에 동생도 있는데!”
놀라 입을 떡 벌리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시끄럽게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테오가 스테이크를 마구 썰고 있었다.
“테, 테오 너까지? 대체 누가 그리 경박하게 칼질을 해! 그만 못 하겠니!”
고모는 사색이 되었고 옆에 있던 할아버지도 당황해서 말문을 잃은 채 쌍둥이를 지켜보았다.
“자, 먹어. 리리스.”
1분 만에 한 입 크기로 고기를 조각낸 테오는, 냉큼 내 접시와 자기 접시를 바꿨다.
그리고는 내 앞에 놓인 포크를 대신 골라서 쥐여주었다.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쌍둥이가 날 배려해주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