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261)

‘와, 얘네….’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좋은 오빠들이다.’

나는 몽글몽글해진 기분으로 앞에 선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빠도 뭔가를 눈치챘는지 웃고 있었다.

“애들이 대체 왜 저런담? 너희 정말 혼날래?”

고모가 여전히 당황하고 있는 사이.

할아버지는 왜인지 묘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다시 놓아두었던 식기를 들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애들한테….”

“되었다.”

“예?”

“먹자.”

할아버지의 칼질이 신호가 된 것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테오가 먹기 좋게 잘라 준 고기 한 점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는 부드러운 육질과 소스의 달큰함.

불편했던 첫 식사에서 처음으로 느껴본 음식 맛은….

‘황홀해!’

정말이지 황홀했다!

절로 뺨이 포르르 떨릴 만큼!

“큭큭.”

어느새 맞은편에 앉은 아빠가 턱을 괴고 내 표정을 살피며 웃고 있었다.

나는 감동에 차 울먹이며 열심히 오물거리다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맛있느냐?”

맛있냐고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나는 일단 고개를 마구 끄덕인 다음 입에 남은 고기를 야무지게 씹어 삼키고 대답했다.

“네, 하부지! 너무너무 맛있어요!”

아무도 몰라볼 정도로 아주 작게 웃은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많이 먹어라.”

* * *

“우와아.”

내 방은 원래 살던 오두막보다도 한참 더 크고 호화로웠다.

그러나 곳곳에 아빠가 읽어주던 동화책이며 갖고 놀던 장난감이 놓여 있어서 어색하진 않았다.

“마음에 들어?”

“네에에에!”

손수 내 방을 꾸몄다는 아빠는 흐뭇해했다.

“와, 침대도 엄청 폭신폭신해.”

후다닥 침대로 먼저 달려가 본 나는, 마치 구름 위에 누운 듯한 쿠션감에 행복했다.

씩 웃은 아빠가 내 애착 인형인 토순이를 안겨주고 옆자리로 꼬물꼬물 기어 들어왔다.

“자아, 그럼 이만 잡시다.”

“오잉? 같이 자게?”

의아해하는 내 물음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아빠가 되물었다.

“뭐래…. 그럼 따로 자?”

“옛날 집은 방이 하나뿐이라 같이 잤지만, 요긴 널린 게 방인데? 아빠는 아빠 방 있을 거 아니야?”

“아니, 공주야….”

“왜?”

“방이 하나뿐이라서 같이 잔 게 아니고, 아빠는, 공주랑 같이 자는 게 좋으니까 같이 잔 거지. 공주 가끔 악몽 꿀 때도 아빠가 옆에 있어 줘야 하고, 또… 비 오는 날 우르릉 쾅쾅 하면 공주가 무서워하니까….”

“알지, 알지. 그치만 내가 애도 아니고 이제 다 컸는걸? 할아버지가 보면 모라구 한다? 다 큰 딸이랑 언제까지 같이 자려 하냐구.”

“할아버지 눈치는 왜 자꾸 봐? 그리고 너 아직 다 안 컸어. 어디가 컸다는 거야, 대체….”

아빠는 속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준비도 안 됐는데 자기 품에서 독립하려는 딸에게 서운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아빠 품에 파고들었다.

“에휴, 아라써어.”

“혼자 자고 싶은 거야? 벌써?”

“아니? 나도 아직은 아빠랑 자는 게 당연히 좋지. 알써, 할아버지 눈치 안 볼게.”

아빠는 그제야 안심하고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아까 식당에서 당황했지?”

“응. 스푼이랑 포크랑 너무 많아서 뭘 집어야 할지 몰랐어. 나도 여기서 살려면 공부 좀 해야겠더라구….”

아빠가 웃으며 내 코끝을 툭 건드렸다.

“그러게. 우리 공주, 놀기만 해도 바쁜데 말이야. 내일부터는 아빠가 가르쳐줄게.”

“아냐. 아빠 집에 왔으니까 이것저것 바빠질 거잖아. 선생님 불러 주면 내가 알아서 잘 배울게.”

“…? 아니, 공주야….”

또 멍하니 입을 벌리는 아빠의 가슴을 내가 재빨리 토닥였다.

“에잉, 오해하지 말구. 뭐든 다 아빠랑 하면 나야 좋지. 그런데 나 신경 쓰느라 아빠가 할 일 못 하고, 할아버지한테 혼나고… 그런 건 싫어.”

“…….”

“또, 내가 아빠 닮아서 똑똑하고 못 하는 것도 없는 거 사람들한테 보여 줘야지. 구래야 다들, 아빠가 혼자서도 날 잘 키웠다고 칭찬해줄 거 아냐?”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던 아빠가 웃으면서 이마를 마주 비볐다.

“내 딸 언제 이렇게 컸지.”

“진작 컸지이.”

“안 커도 되는데.”

“싫어. 더 클 꼬야~!”

“칫.”

나를 끌어안고 토닥이던 아빠가 아, 탄성을 터뜨렸다.

“있잖아, 공주야.”

“응.”

“아까 골목에서 만났던 남자애 있잖아?”

“아아, 응!”

체시어….

“바로 알아볼게. 아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찾으면 혹시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자.”

“으응, 고마워. 근데 천천히 해도 돼.”

마침 나도 생각하고 있던 일.

미안하지만, 당장은 아빠가 뭘 해도 체시어를 찾기 힘들 거다.

‘아까는 우연한 계기로 마주쳤다지만, 두 번은 없겠지. 원작대로라면 아빠랑 체시어는 2년 후에 다시 만날 테니까.’

지금 체시어는 사생아라는 사실 때문에, 오닉스 후작가에서 철저히 숨겨 키우고 있다.

반면 7년 만에 복귀한 아빠는 아직 제도 사정에 눈이 어두웠다.

물밑에서 사람 찾는 불법 길드 같은 곳에 손 벌릴 생각도 없을 거고.

‘흠. 역시 내가 도와줘야지, 뭐.’

나는 체시어를 떠올리는지 눈빛이 깊어진 아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만 자자,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말구.”

딸이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요.

* * *

어린이는 어린이다워야 한다는 이 세계의 섭리라도 있는 걸까?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

또, 공복이라 힘이 없을 때.

그때의 나는 머리에 힘을 빡 줘도 도통 어른의 사고를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후아아, 큰일 났네.’

무려, 아침에 공복.

몽롱한 아기 정신으로 아빠 손을 잡고 식당에 온 나는 긴장했다.

“리리스, 어서 오렴.”

“꼬맹이 안녕.”

“리리스! 잘 잤어?”

“고모, 안녕하세요! 오라버니들, 안녕!”

고모랑 쌍둥이 오빠들은 그렇다 치고, 할아버지가 마음에 걸렸다.

“하, 하부지도 안녕하세요….”

“그래. 어서 앉아라.”

나는 걱정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자, 우리 공주 아침 먹자!”

그래도 오늘은 바로 옆에 아빠가 있어서 괜찮았다.

나는 아빠가 챙겨 주는 식기를 눈에 잘 익히며 식사에 집중했다.

“으음, 리리스는 왜 이렇게 작고 말랐을까.”

그때.

고모가 먹다 말고 나를 측은한 눈으로 봤다.

할아버지가 쯧, 혀를 찼다.

“못난 놈이 시골에서 돈 한 푼 없이 숨어 지냈는데, 어디 변변한 식사나 제대로 챙겨 주었겠느냐? 굶기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지.”

“흠흠.”

할아버지의 핀잔에 아빠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어어, 아닌데.’

나는 할아버지의 오해를 정정해주고 싶었다.

“아니에요, 하부지….”

눈치를 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빠는, 아빠는 맨날맨날 저한테 맛있는 밥 만들어 주셨는데….”

“…….”

“미, 밀가루 사 와서 빵도 만들어 주구요.”

탄수화물….

“꼬꼬알 요리도 해 주구.”

단백질….

“마당에서 당근이랑 호박도 직접 길러 먹구….”

비타민….

“아! 시장에서 우유도 사다주셨꾸나…. 저요, 하루에 우유 두 개나 맨날맨날 마셨어요!”

칼슘까지….

제임스 브라운 씨는 그 누구보다 딸의 건강한 식단에 진심이었던 주부 9단 싱글대디였다!

나는 아빠의 노력을 할아버지에게 어필하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

할아버지는 그럼에도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여, 역시 고기 때문인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거짓말을 조금 섞어 말했다.

“고, 고기는 쫌 비싸가지구….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먹었는데….”

실은 한 달에 세 번 먹었다.

“풉.”

아빠가 턱을 괴고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어휴, 아빠 바보. 할아버지가 눈치 주고 있는데 뭐가 그리 좋아서 웃는지 모르겠다.

“…그래. 잘 챙겨 먹었구나. 알았다.”

할아버지가 마지못해, 그래도 조금 풀린 얼굴로 말했다.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결국, 제임스 브라운 씨의 노고를 할아버지에게 인정받았다!

“어쩜. 리리스는 정말 착하고 야무지구나. 우리 애들 일곱 살 땐 안 저랬는데.”

흐뭇하게 웃던 고모가 옆에서 식사 중인 쌍둥이를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은근히 어깨가 솟았다.

평생 귀족 도련님으로 산 오빠들보다 야무지단 소릴 듣는 건 기분 좋았다.

“말도 어쩜 저리 예쁘게 하는지 몰라.”

“네! 아빠가 어른들에게는 항상 예의 바르게 인사하라구 했어요.”

“후후, 그랬어?”

고모가 웃었다.

할아버지도 나를 보고 있었는데, 기특해하는 표정이었다.

내 가슴이 조금 앞으로 나왔다.

“쌍둥이가 리리스만큼 어렸을 때 기억하세요, 아버지? 맨날 울고 떼쓰고.”

“저는 안 울어요, 고모! 울지도 않고 아빠 말도 잘 들어요. 떼도 안 쓰구요.”

“기특하구나.”

할아버지가 칭찬했다.

내 가슴은 더 나왔다. 콧김도 슉슉.

“편식도 얼마나 심한지 몰라. 저것 보렴.”

고모가 쌍둥이의 접시를 가리켰다.

휑한 접시에 콩과 당근, 브로콜리만 남아있었다.

“저는 못 먹는 것도 없어요! 콩이랑 브로콜리랑 다….”

나는 말하다 말고 힐끔, 접시를 내려다봤다.

왕 큰 브로콜리가 두 개씩이나 수줍게 놓여 있었다.

“어머, 채소도 잘 먹니?”

기세 좋게 시작한 자랑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거짓말까지 하게 되다니.

나는, 나를 대견해하는 고모와 할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슬쩍 곁눈질로 보니, 아빠는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포크로 브로콜리를 쿡 찍었다.

‘으윽. 이건 심한데.’

귀족 식사에 올라오는 브로콜리라 그런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아주아주 크고 실했다.

“어이구, 편식도 안 하는 착한 우리 딸. 브로콜리도 잘 먹지, 그럼.”

“…….”

식은땀이 났다.

나는 포크 쥔 손을 달달 떨면서 고민했다.

그러다 꾀를 냈다.

“그, 그리구 맛있는 거 있으면 아빠랑 항상 나눠 먹어요!”

나는 브로콜리를 찍은 포크를 아빠 입에 들이밀었다.

“아, 아빠? 아~!”

아빠는 어이없다는 듯 “하.”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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