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단 좀 맞춰 주시죠. 제임스 브라운 씨.’
나는 눈으로 말했다.
하지만 매정한 아빠는 갑자기 우는 시늉을 했다.
“어쩌지. 아빠는 채소 싫은데.”
“으응?”
이 배신자!
난 분유 먹던 힘까지 끌어다가 아빠가 육아에 소홀하지 않았음을 어필했는데!
“아빠가 맨날 브로콜리 백작한테 당하고 있으면 우리 공주가 대신 먹어서 구해줬지, 그치?”
거짓말까지!
얄밉게 쓱 눈썹을 올리는 아빠를 보며 나는 호달달 떨리는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에이, 꼬맹이 너 사실은 브로콜리 못 먹지?”
“괜찮아, 리리스. 브로콜리는 정말 맛이 없잖아.”
“아, 아냐! 나는 브로콜리 잘 먹어! 맛있어!”
나는 쌍둥이 오빠들에게 반박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브로콜리를 입에 넣었다.
아삭, 씹자 생생한 식감과 함께 특유의 맛이 느껴졌다.
‘으아앙악! 맛없어!’
그러나 억지로 먹은 티를 낼 순 없었다. 나는 쉴 새 없이 오물거렸다.
“풉.”
“…녀석.”
왜인지 고모와 할아버지가 웃고 있었다.
역시 날 대견해하는 모양이라 맘이 놓였다.
‘그래. 브로콜리쯤이야….’
편식 안 하는 야무지고 용감한 내 입에서 브로콜리 백작은 처참하게 도륙당했다.
“휴.”
나의 완벽한 승리였다.
* * *
밥을 먹고 나니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기 시작했다.
집사, 렘 아저씨는 나에게 하녀 언니 둘을 소개해 주었다.
“여기는 아가씨를 돌봐드릴 하녀들이랍니다. 작은 주인님은 오늘부터 감금…, 아니지, 집무실에서 못 나오실 예정이라서요. 괜찮으신가요?”
“네!”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7년이나 내던져 놓은 가주 일에 복귀하려면 아빠는 당연히 바빠질 터였다.
이해하지, 암.
“제티와 쥰은 5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아가씨의 전담이 된 베테랑 하녀들이랍니다.”
“맞아요!”
갈색 단발머리 언니가 흥분하며 끼어들었다.
“저는 제티예요, 아가씨. 목욕물 온도 맞추기, 그림 그리기, 간식 만들기 토너먼트에서 1위를 해서 당당히 아가씨 전담 하녀 자리를 차지했죠. 여기 쥰이랑은 자매예요. 제가 언니구요.”
아니, 뭔 토너먼트까지…?
눈을 껌뻑이는데, 말총머리의 쥰 언니도 팔을 번쩍 들며 자기를 소개했다.
“전 쥰이에요! 팔굽혀펴기 47개, 윗몸일으키기 55개, 제자리멀리뛰기 3미터 종합 1등 최고 기록자입니다. 성심성의껏 아가씨를 보필할 테니 믿고 맡겨주세요!”
대체 7살 꼬맹이 돌보는 데 그런 건 왜 필요해…?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나는 언니들에게 공손히 배꼽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티 언니, 그리고 쥰 언니.”
“어머.”
“흐윽. 아가씨.”
쥰이 나를 답삭 안아 번쩍 들어올리고는 팔에 앉혔다.
‘헉! 과연 체력장 1위!’
말랐는데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괴력이다.
“아가씨, 왜 이렇게 작고 귀여우세요? 네?”
“뺨만 통통하신 거 봐…. 밀가루 반죽 같아. 흘러내릴 것 같아요.”
쥰과 제티는 나를 끌어안고 마구 호들갑 떨었다.
“자, 자! 그만, 얘들아. 인사는 그쯤 해두렴. 아가씨의 오늘 일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렘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큰 주인님께서 오늘부터 아가씨 교육을 분부하셨습니다. 오전 열 시부터 선생들이 올 텐데….”
렘은 말끝을 흐리며 멋쩍게 웃었다.
제도에 온 지 하루 만에 공부하라는 말을 하려니 미안한 눈치였다.
하지만 바라던 바!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렘 아저씨, 저 공부할 수 있어요. 잘해요. 열심히 할게요.”
“어이쿠. 기특하시기도 하지. 어쩜 작은 주인님 어린 시절을 꼭 닮으셔서….”
또 회상에 잠긴 렘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콕콕 닦고는 이어서 말했다.
“오늘은 첫날이니 아마 가볍게 소개하고 어려운 수업은 하지 않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오후에는 오르디아 님과 약속이 있다 들었는데요?”
“네! 고모가 오라버니들이랑 같이 제도 구경 시켜주기로 하셨어요!”
“그러시군요! 그럼 2교시까지 수업한 뒤 점심을 드시고 또 나머지 수업 마치신 다음에….”
렘이 수첩에 별거 있지도 않은 내 스케줄을 빠르게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둘이 아가씨 외출 채비를 도와드리면 되겠구나!”
“네, 집사님!”
“맡겨주십쇼!”
언니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 *
내게는 할아버지가 보낸 선생님들이 좌르륵 붙었다.
할아버지는 아마, 배운 게 없는 나를 속성으로 귀족 사회에 적응시키려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식사 예절도 모르는 거, 눈치채신 것 같았지?’
어쨌든 내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귀족 사회의 예법은 소설을 읽었어도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하나 생겼다.
“자, 보세요. 여기 사과 두 개가 있지요? 그런데 사과 두 개가 한 번 더, 뿅! 하고 생겨났어요.”
1교시 사회 수업은 그럭저럭 들을 만했는데….
2교시, 수학.
그래, 수학부터 좀 문제였다.
“그럼 사과가 네 개죠?”
담당 선생님은 레나 백작 부인.
붉은 머리의 깐깐한 인상과 달리 레나 부인은 무척 상냥한 사람이었다.
“2 곱하기 2는 4랍니다!”
“우와아.”
나는 무미건조한 탄성을 내뱉었다.
“여기에 사과 두 개가 한 번 더, 그러니까 총 세 번 생겨나면 어떻게 될까요?”
레나 부인이 바구니에서 사과 두 개를 더 꺼내 테이블에 올리자.
“2 곱하기 3! 6!”
내 옆에 앉아있던 레온이 대신 대답했다.
레나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 아가씨가 대답하게 해 주셔야지요. 도련님은 다 아시는 거잖아요.”
“그래, 레온. 리리스 공부 방해하지 마. 조용히 있기로 약속하고 수업 구경하러 온 거잖아.”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테오가 어른스럽게 레온을 나무랐다.
‘차라리 방해해 주라….’
나는 한숨을 삼키며 펜을 쥐었다.
사실 내게 필요한 건 예법 등의 교양 학문이었기에 다른 과목을 듣는 것은 꽤 곤욕이었다.
전생 25년, 현생 7년. 도합 32세의 나이로 초등학생들 곱셈 문제를 푸는 중이라니….
“너무 어려우시죠?”
“네에.”
하지만 보통의 일곱 살은 곱셈을 어려워해야만 한다.
내가 덧셈과 뺄셈을 이미 뗐다고 하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놀랐던 레나 부인이었기에….
“그럼 2 곱하기 4랑 2 곱하기 5는 뭘까요? 한번 풀어 보시겠어요? 틀려도 괜찮으니까요.”
“네에….”
“꼬맹아, 내가 알려줘?”
“도련님, 안 돼요!”
“레온, 방해하지 말라니까?”
왁자지껄한 사이에서 나는 문득 초조해졌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나는 할 일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우선.
‘체시어 얼른 구해야 한다구!’
체시어가 우리 가문의 양자가 된 건 열세 살의 가을.
아빠와의 나이 차이를 따져 보면 지금 체시어는 열한 살이니까, 앞으로 2년은 더 오닉스 후작가에서 학대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우리 체시어 살려!’
내가 도와줘야 했다.
아빠가 조금 더 빨리 체시어를 찾을 수 있도록.
그러려면.
‘찾아야 할 사람이 있지.’
몇 년 후에나 아빠의 조력자가 되는, 정보 길드의 수장.
그를 미리 찾아 내 편으로 만들기만 한다면, 체시어를 구해내는 것뿐 아니라 앞으로의 일이 전부 수월해질 거다.
‘그 사람을 만나려면 일단 몰래 나가 봐야 한단 말이지?’
하지만 보호자의 감시 아래 고작 일곱 살의 몸으로는 제약이 너무나도 많았다.
고작 하는 게 공부방에서 수학 문제 푸는 거라니!
‘으아앙! 짜증 나! 곱셉은 이미 19단까지 달달 외워 머릿속에 있단 말이야!’
생각보다 쉽지 않은 현실에 울컥 짜증이 올라와 펜을 마구 놀릴 무렵.
“고, 공녀님?”
“네!”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번쩍 고개를 드니 레나 부인이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이, 이걸 어떻게 하신 거죠?”
왜인지 그녀는 입을 파르르 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쓰고 있던 안경을 힐끗 올렸다.
“네?”
뭔 소리람?
“와, 꼬맹이 너 진짜 똑똑하다?”
“계산도 안 하고 풀었네?”
레온과 테오가 책상 위를 가리키며 한마디씩 했을 때에야,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차, 나 곱셈하던 중이었지?’
힐끗 눈을 내리니, 다른 생각에 빠져 무심코 휘갈겼던 답안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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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이게 무슨 일이야.
레나 부인은 분명… 곱셈의 원리를 설명해준 다음, 2 곱하기 5까지만 풀어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19단까지 써버렸다?’
겉과 속이 다른 바람에 일어난 대참사였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슬그머니 눈만 들어보았다.
의심스러운 눈을 한 레나 부인이 보였다.
‘와, 망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나가지?’
제도 입성, 고작 2일 차.
비밀을 숨기고 있던 어린이는 어마어마한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