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가며 변명을 고르다가 멈칫했다.
‘아니, 잠깐. 그런데 어쩌면… 나쁘지 않은 상황일지도?’
암산에 소질 좀 있는, 남들보다 똑똑한 꼬맹이 한 명쯤 있지 않겠는가?
심지어 나는 지덕체 고루 우월하신 그 에녹 루빈슈타인의 딸이기까지 했다.
‘주인공 딸인데 좀 똑똑할 수도 있는 거 아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계속 구구단이나 외우며 시간을 낭비할 순 없는 법.
차라리 기본적인 수준은 빨리 떼고 졸업하는 것으로 노선을 틀자.
생각을 마친 나는 만세를 불렀다.
“선생님! 저 다 맞았어요?”
“네, 네…. 대, 대체 어떻게 하신 거죠?”
“으항항! 선생님이 잘 알려주셔서 쉬웠어요!”
“아니, 제가 뭘 알려드렸다고…?”
“사과 두 개가 세 번씩 뿅하구 생겨나면 여섯 개가 된다구요!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는 앉은 자리에서 예의 바르게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그, 그렇지만 사과 열아홉 개가 아홉 번씩 생겨나면 백일흔한 개가 된다는 것까지는 알려드리지 않았….”
“서, 선생님!”
그냥 좀 넘어가자. 좀.
나는 책상 아래로 짧은 다리를 동동 구르면서 더 배우고 싶은 척을 했다.
“곱셈 다음 나눗셈이라고 하셨죠! 넘무넘무 재미있어요! 빨리 알려주세요!”
“…….”
레나 부인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흥분한 표정으로 마른 입술을 훑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문제지들을 좌르륵 늘어놓으며 말했다.
“제, 제가 보기에 공녀님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불세출의 천재가 틀림없으십니다.”
윽, 이런….
“헉. 리리스가?”
“불세출이 뭐야?”
한마디씩 하는 테오와 레온.
“공녀님, 앞으로 저는 공녀님의 교육에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결의를 다지는 레나 부인.
그 사이에서 곱셈 문제 몇 개 풀고 천재 소리를 듣게 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에 휩싸였다.
이 행동이 후에 엄청난 참사를 불러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 * *
늦은 오후.
에녹은 집무실에서 쉴 새 없이 펜을 휘갈기고 있었다.
“하아.”
아빠는 바빠지지 않겠냐던 딸의 짐작은 다 맞았다.
그간 노르딕이 맡고 있던 공작의 업무를 전부 인계받으려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공주랑 놀 시간도 없다니….’
7년이나 버려뒀던 공작의 직함에 다시 적응하는 것은 꽤 머리 아픈 일이었지만, 그는 열심이었다.
제임스 브라운 씨가 아니라 에녹 공작님으로 지내려면 업무 복귀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니까.
“와, 이제 그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서류가 아직 반절은 더 남았지만, 에녹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쁘다고 놀아 주지도 않는 못난 아빠가 될 생각은 없었다.
“공주랑 놀아야쥐.”
펜을 팽개친 에녹이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벌컥.
문을 열자, 마침 들어오려던 모양인지 집사가 서 있었다.
“어, 렘.”
“어디 가십니까?”
“울 딸한테.”
“공녀님 외출하셨는데요?”
“뭐? 누구랑?”
“오르디아 님이 데리고 나가셨죠. 의상실에서 공녀님 옷을 맞추고 디저트 가게도 간다고 하셨습니다. 쌍둥이 도련님들도 함께 갔어요.”
“와, 누님. 너무하시네. 나만 빼놓고?”
“허허, 작은 주인님이 지금 한가하게 제도 나들이나 나가실 때인가요?”
방긋 웃는 렘의 뼈 있는 말에, 다시 자리로 돌아가며 에녹이 구시렁거렸다.
“…그럼 그냥 마저 끝내지, 뭐. 그런데 왜 왔어?”
“궁금해하실 것 같아 이것저것 보고를 드리려고요. 오늘 공녀님의 첫 수업이 있으셨지 않습니까.”
“맞다, 내가 아버지한테 예법 선생 하나 붙여 달라고 했었지. 우리 딸 어땠어? 재미도 없는 공부 하느라 고생했겠네.”
“오, 아니요. 선생들이 다들 진심으로 극찬하고 돌아갔는걸요. 큰 주인님께서 보고를 받으시고 상당히 흐뭇해하고 계십니다.”
렘이 양쪽 엄지를 척 세웠다.
“역시 작은 주인님. 공녀님 교육에도 소홀하지 않으셨더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뭐 한 거 없는데? 울 딸이 뭘 어쨌는데? 아니, 그리고… 잠깐. 선생들? 지금 선생‘들’이라고 했어?”
“네. 사회, 수학, 경제, 문학, 역사, 예법. 첫 수업이었는데도….”
렘의 말끝이 흐려졌다.
화난 듯 바르르 턱을 떠는 에녹의 반응 때문이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뭐 문제라도?”
“비켜.”
“작은 주인님? 저기요?”
렘을 밀친 에녹이 쾅쾅 발소리를 내며 나섰다.
그가 잔뜩 성이 나 향한 곳은 부친, 노르딕 루빈슈타인의 집무실이었다.
“아버지!”
에녹이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자, 안경을 쓴 여성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노르딕이 팍 인상을 썼다.
“뭐냐.”
“장난하십니까? 그래도 아버지를 믿고 맡겼는데, 애를 온종일 책상 앞에 앉혀두시다니요?”
쾅―!
“에그머니나!”
번개같이 다가온 에녹이 주먹으로 책상을 찍어 내리자 옆에 서 있던 여성이 화들짝 놀랐다.
“예법 교사만 붙여달라고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렸는데.”
“목소리 낮춰라.”
“겨우 일곱 살짜리를, 식사하는 시간 빼고 전부 공부방에 가둬놓으셨다?”
귀족들의 기본 예법은 습득해 놔야 하니 그것만 부탁했는데.
사회, 경제에… 또 뭐? 황당한 렘의 보고를 받고, 에녹은 눈이 확 뒤집혀 있었다.
노르딕은 덤덤히 받아쳤다.
“루빈슈타인의 성을 가진 아이다. 배움이 부족해서야 되겠느냐?”
“제 딸 일곱 살입니다. 아직 놀고 싶어 할 나이라고요. 그리고 양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기본 예법만 가르치겠다고 했잖습니까. 갔다 오면 제가 어련히 알아서 잘…!”
“그만. 나도 오늘은 선생들에게 소개만 하라고 했다. 수업을 받고 싶다고 한 건 리리스였어.”
“하, 아버지.”
에녹이 분노로 절절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리리스는 어른스러운 아이예요. 벌써 할아버지 눈치를 본단 말입니다. 기껏 붙여준 선생을 인사만 하고 돌려보낼 순 없으니 꾸역꾸역 수업을 들었겠죠.”
“그러냐. 보고받은 내용은 그렇지 않던데. 다들 리리스가 나이에 맞지 않게 교육을 받아온 것 같다고 하더구나.”
“딱히 가르친 거 없습니다. 그냥 애가 똑똑한 거예요.”
에녹이 이를 갈며 덧붙였다.
“됐고, 예법 교사 빼고 다 돌려보내십시오. 그리고 아버지는 제 딸 교육에서 손 떼세요. 나머지는 애 양성소 갔다 와서, 제 손으로 직접 할 거니까.”
경고한 에녹이 몸을 돌려 나가려다가, 그제야 옆에 서 있던 여자를 발견하고 노려보았다.
“당신은 뭡니까?”
“저, 저 수학이요….”
에녹이 지그시 눈을 감고 찬찬히 분노를 골랐다.
“저, 공작님? 잠시만 제 얘기 좀 들어보시겠어요?”
“그만 화내고 교사 말이나 들어 봐라. 수학 담당인 레나 부인이다.”
“들어볼 것도 없고.”
레나 부인을 못마땅한 눈으로 일별한 에녹이 덧붙였다.
“내일부터 안 와도 됩니다.”
“아, 안 됩니다. 공작님.”
“뭐요?”
“공녀님은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십니다. 배움에 열정도 있으시고요. 지금 더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알아서 합니다. 가르치지 않겠다는 게 아니에요. 나이에 맞게 천천히….”
좌라락.
말하던 에녹의 앞에, 레나 부인이 돌돌 말려있던 종이 한 장을 길게 펼쳐 보였다.
삐뚤빼뚤한 글씨체는 리리스의 것이었다.
가만 종이를 들여다보던 에녹이 까득, 이를 갈았다.
“…일곱 살짜리 애한테 곱셈을 시켰군. 그것도 19 곱하기 9까지….”
“이게 다가 아닙니다!”
“아직 덧셈, 뺄셈까지밖에 안 가르쳐줬는데….”
“네, 네! 공녀님께 학습 진도를 여쭸더니, 공작님께 뺄셈까지 배웠다고 하시더군요. 곱셈을 가르쳐 달라시기에 저는 2 곱하기 3이 6이 되는 원리만 가르쳐드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레나 부인이 품에 안고 있던 종이 몇 장을 책상 위에 더 펼쳐 보였다.
나눗셈, 사칙연산, 심지어 분수와 소수까지 빼곡한 흔적이 있었다.
그걸 본 에녹의 입이 떡 벌어졌다.
“당신 지금 장난해요? 일곱 살짜리 애한테 뭘 시킨 겁니까?”
“지, 진정하세요. 저는 힘드실까 봐 나눗셈까지만 알려드리겠다고 했습니다만, 공녀님께서 너무 재미있다며 더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고요.”
레나 부인은 침착하게 문제지를 가리켰다.
“게다가 보세요. 한 문제도 틀리지 않으셨어요. 19 곱하기 9를 그냥 머리로 암산하실 때부터 알아봤지만.”
레나 부인이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공녀님은 천재이십니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수학의 천재.”
“…….”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십니다. 나눗셈을 알려드리니 바로 분수의 개념을 터득하셨고, 0과 1 사이에 있는 수를 궁금해하시더니 혼자 소수점까지 찍어보시더군요.”
“그게….”
“전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게 일곱 살 어린아이의 수준이 정말 맞는가, 궁금해서 다른 선생들에게도 물어봤더니.”
“봐라.”
레나 부인의 말을 받은 노르딕이 서랍 안에 넣어뒀던 오늘 수업의 결과물들을 내보였다.
“다른 선생들도 리리스와 안면만 틀 생각이었다. 재밌다고 수업을 해 달라 조른 건 리리스였어. 살펴보니,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한 눈치도 아니고.”
에녹은 가만히 삐뚤빼뚤한 딸의 글씨를 훑었다.
사회, 경제, 문학, 역사….
분명 처음 배웠을 내용인데도 제법 야무지게 정리돼 있었다.
“공작님.”
레나 부인이 쓰고 있던 안경을 추어올리며 말했다.
“공녀님은 분명, 천재이십니다. 그리고 눈치를 본다고 하셨는데, 아니요. 배움을 즐거워하는 표정은 절대 꾸며낼 수가 없어요.”
“…….”
“천재.”
침묵하던 에녹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진짜 천재.”
악마처럼 귓가에 속삭이는 레나 부인의 목소리.
“완전 천재.”
이내 에녹의 입꼬리가 올라갈 듯 말 듯 움찔거렸다.